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17화
23. ON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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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섭외 공문은 바로 당일 회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유가 넉넉하지 않은 상황인 만큼 회사는 빠르게 의견을 모아 멤버들에게도 전해주었다.
‘설 연휴인데…….’
휴가고 뭐고 없이 일괄 불려나온 우리 스테리나인 멤버들과 어나더뮤직 직원들……. 바쁜 1월 말이었다.
회사 입장은 당연히 두손 두발 다 들고 찬성 및 환영.
편곡, 프로듀싱, 안무, 세트 미술 비용 등 돈이 만만치 않게 깨지는 프로젝트일 텐데도 꽤나 흔쾌했다.
‘뭐, 노선을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기는 해.’
모쪼록 그룹 활동에 시동을 건다면 자체 예능이든 커버 영상이든 방송 출연이든 콘텐츠가 필요하다.
소통이나 행사 무대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곧바로 다음 앨범을 발매할 수도 없고.
그리고 무엇이든 전부 경비가 드는 일이었다.
그냥 회사가 고투자 고효율을 노리기로 방침을 정한 것 같았다.
회사에게 감사한 마음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답하면 충분할 듯하고.
‘순조롭네.’
회사 직원들은 〈오디뮤〉 스페셜 스테이지 준비 관련으로 프로듀서인 만다륜이나 백업 댄스팀 등과 연락하느라 또 무척 바빠진 모양이지만,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그러면 완전히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들어가는 거네요.”
“그런데 방송이 폭삭 망할 라인업은 아니잖아.”
한편 나를 포함한 스테리나인 멤버들은 회의실에 앉아서 이사님, 매니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방송 참여하고, 체계 없는 회사 다녀와서 좀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이제 겨우 4년 차의 문턱을 밟은 아이돌이었다.
다시 말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해야 했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것도 모두 참여를 전제로 각자의 소감을 발표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멤버들과는 그룹 합류에 관해 지난 가족 회의에서 이미 다 이야기를 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밀제트〉에 관해서만 대화를 나누어도 충분했다.
‘의견은 잘 맞지.’
〈밀제트〉는 스테리나인에게 좋은 기회다, 이 전제에는 만장일치로 동의를 보냈다.
그리고 다들 기회가 다가왔으면 잡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의외로 천진섭이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다른 멤버들도 깊게 걱정하지 않고 동의했다.
누가 보더라도 얻을 게 잃을 것보다 많은 상황이었으므로.
안승준만 이번에 〈밀제트〉에 참여하면 서바이벌이 세 번째라고 엄살을 부렸다.
“너 서바이벌 체질이잖아.”
“야! 그거랑 그게 같냐!”
서난영이 안승준이 〈데프아〉에서 지은 가사를 인용하면서 승준이의 논리를 박살 냈다.
안승준은 발끈 오버액션으로 화를 냈고, 바보 같은 대화를 듣는 나머지 사람들은 웃기나 했다.
잡담 섞인 회의는 그렇게 편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결론은 ‘촉박하더라도 〈밀제트〉에 참여하고, 〈오디뮤〉 무대 역시 준비하자’로 났다.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임시 스케줄이고, 정리한 건 매니저팀 통해서 단톡으로 보내주도록 할게요. 확정되면 확정 버전으로 다시 보낼 거고.”
이사님이 소개해 주시는 빡빡한 가일정을 들으며 우리는 자리를 정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그렇게 회의실을 나오는데, 문득 이영하가 휴게실로 나를 불러세웠다.
먼저 나가도 되는데 말을 걸기 위해 복도 옆으로 빠져서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헌아, 너 바로 집으로 가?”
“아니, 연습실 비어 있으면 안무 연습 좀 하고 가려는데. 왜?”
나는 아직 숙소로 짐을 옮기지 않아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본가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동 거리가 멀지도 않아서 택시를 타거나 그날따라 무장이 잘 되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했다.
“안무는 뭐 하는데?”
“응? 〈나에게〉지. 동선도 수정해야 되고, 나도 제스처 같은 거 연구 좀 해봐야지…….”
왠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강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스테리나인의 〈오디뮤〉 스페셜 스테이지 곡은 〈나에게〉로 결정되었다.
가장 최신 곡이니까 당연한 선곡이었다. 원래 4분이 넘어가는 긴 곡이라 조금 다듬게 되지 않을까.
벌스 사이 여백을 조금 잘라내고, 퍼포먼스 파트를 추가해서 3분 후반대로 만들지 않을까 싶다.
회의 자리에서 즉시 아홉 명 버전으로 파트를 재분배했기에 동선 작업 정도라면 지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 없어서 대충 해놓고 피드백 받고 얼렁뚱땅 피드백대로 수정하고를 반복해야 하는 시기라서 말이다…….
“끝나면 잠깐 볼래?”
“어……. 너 시간 괜찮으면?”
“괜찮아, 나도 할 거 있으니까.”
그렇게 잡힌 난데없는 약속.
회의부터 저녁 먹고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연습이 끝나면 벌써 자정 근처였다.
오래 걸리니까 먼저 가도 된다고 메시지를 보내도 이영하는 부득불 기다리겠다고 대답해왔다.
영하는 자기도 할 일이 있고 일찍 끝나지 않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게 변명이라는 티는 꽤 났다.
당장 급하지도 않은 일인데 시간 때우려고 하는 느낌.
뉘앙스를 눈치 채니까 어쩐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해서 나는 그쯤 하던 일을 갈무리하고 나왔다.
‘이 정도만 하고 나중에 보완하자.’
사옥 1층 출입구 쪽에서 이영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뺨이 얼얼할 만큼 한파가 찾아온 명절의 밤.
영하는 밖을 향해 눈짓했다. 작게 미소 지으며.
“한강 갈래?”
“……가서 배드민턴 칠까.”
“안 돼, 날씨 추워서……. 걷기만 할 거야.”
나는 걸으면 추운 게 따뜻해지기라도 하냐며 투덜거리다가 말았다.
그렇게 택시를 불러 올라탔다.
보는 눈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는 맞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밖에 사람이 적을 때였다.
빨간 날 밤 넘어 새벽까지 밖에서 노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더러……. 한강에 놀러와 봤자 자기들끼리 노느라 우리는 신경도 안 쓸 듯하니까.
택시에서 내려 묵묵히 걷다가, 우리는 따뜻한 캔음료를 두 개 뽑아서 강이 보이는 평상에 앉았다.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아.”
내가 강 방향으로 시선을 두며 중얼거렸다.
“실제로 오랜만이니까.”
“그러게, 한 일 년은 된 것 같다.”
“마지막은 여름 아니었나?”
“그러면 일 년 반인가……. 춥다…….”
연습생 때는 정말 자주 왔고, 데뷔하고 나서도 가끔, 20대 후반이어도 자주 오갔으니…….
한강 공원은 산책하기 좋았지만, 겨울에는 잘 오지 않아서인지 왠지 기분이 새로웠다.
오는 길 도로에는 사람이 없었고 한강 공원은 가로등으로 환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찼다.
강 너머에는 평소와 달리 불이 꺼진 건물이 많았다.
도시의 듬성듬성한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일렁이고, 칼바람에 나뭇잎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이영하는 말이 없었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냐.”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지네……. 잠시만.”
“영아, 나 추워…….”
내가 투덜대도 이영하는 손에 쥔 핫팩만 던져주고 꿋꿋이 침묵을 지켰다.
결국 먼저 다시 입을 연 건 나였다.
“서바이벌 참여하는 거 힘들어?”
수평선을 쳐다보던 영하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깜빡이는 두 눈.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왠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생각나는 거 뭐든 다 말해봐.”
영하가 시선을 피하려고 해서, 나는 발을 들어 녀석의 신발코를 툭 쳤다.
생각할 시간을 더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이영하는 결국 헛기침과 함께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싫은 것도 아니고……. 아니긴 한데.”
“그러면 뭔데.”
“부담이 되는 건 맞아.”
목소리가 얇고 높았다. 여느 때처럼.
“나도 알아, 너는 이런 말 이해 잘 못 한다는 거. 그래서 너한테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 민망한데, 지금…….”
“그래도 얘기를 해봐.”
“알았다고. 그래도 너한테 말하려고 부른 거잖아……. 남한테 말해봤자 네게 말하느니만 못하다는 것도 아니까.”
인상을 찡그리고 말하는데, 그 표정에서 복잡한 마음이 느껴졌다.
더 말하게 두었다.
“그냥 요즘 있었던 일인데…….”
그렇게 운을 뗀 말은 갈수록 횡설수설해져서, 나는 점점 영하의 마음을 따라가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영하는 짧게 해외 투어와 이번 〈나에게〉 활동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어디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힘들었던 일.
스트레스받았던 것.
예컨대 시간이 딜레이되는데 공지는 들어오지 않고, 매니저와는 연락도 잘 안 되던 일이라든가.
관객들은 이미 공연장에 다 들어왔는데 기계 문제로 스나는 무대에 올라가지는 못하던 상황이라든가.
해외에서는 현지 스태프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공지가 왜곡되어 전달된 일.
음악방송 현장에서 생긴 문제를 팬들이 스태프에게 말하지 않고, 소통 어플로 영하에게 직접 항의한 일.
그런 것을 보고, 해결해 주지 못해서 또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런 일들.
‘이영하가 반응을 많이 신경 쓴다는 걸 아니까 영하를 들들 볶는 거지…….’
내가 있어도 발생할 수 있으며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기도 했으나, 영하는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한탄을 쏟아내다가, 녀석은 불현듯 테이프가 끊긴 것처럼 뚝 멈추었다.
“……미안.”
“아니야 더 심한 말 같아도 그냥 해봐. 들을 테니까.”
이영하는 사과했고, 나는 받지 않았다.
그보다는 더 듣고 싶었다.
무엇을 그렇게 속에 쌓아두었기에 지금 여기 이 타이밍에 폭발시키고 있는지.
사실 내 입장에서는 급작스럽기도 하고 전조가 없는 일이지 않나.
‘그렇지만…….’
모든 사건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고 조금씩 누적되다가 어느 날 터질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화는 정말 온건한 해결법이었다.
이영하다운 해결법.
폭력적이지 않고 극단적이지 않고 동시에 똑똑한.
“의헌아. 나 열심히 했어, 이번에.”
그러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대화를.
“……남들 보기에는 티도 안 나고, 신통치 않았겠지만…….”
“당연히 알지. 다 알 거야.”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말은…….”
말을 주저하는 이영하는 왠지,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아. 열심히 하려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아. 좋지. 그런데…….”
“응.”
“조금만 더……. 네가 우리를 살펴줬으면 좋겠어.”
영하는 말하다가 말고 시선을 돌렸다.
눈이 향하는 곳은 다시 새벽의 한강.
“지금이 문제라는 건 아니야. 그런데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이러다가는.”
그러나 나는 여전히 녀석의 옆얼굴을 보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미안해,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한데……. 네가 제발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
“네가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영하가 마음을 쥐어짜 내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