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106화 (106/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06화

22. G.B.T.B.(2)

쉽게 말하면, 비트와 랩 위주인 힙합 베이스 댄스곡은 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그것보다는 발라드나 R&B처럼 보컬 위주 노래로 가자는 말.

사실 비트가 좋은 힙합 베이스 노래가 최신, 그러니까 미래 기준으로는 세련된 음악이다.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와 버린 거, 지금은 유행에 어울리는 음악이 낫지.’

거기에 군무보다는 독무 위주로 안무와 무대를 구성하면 느릿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낼 수 있다.

단체에서 몇 명 빠졌을 때 느껴지는 빈자리를 아예 ‘이별’, ‘쓸쓸함’, ‘슬픔’ 등 감정으로 연출한다면?

일부러 무대를 꽉 채우지 않는 것이다.

빈 자리를 연출의 일부로 이용하는 것.

발매 시기가 겨울이니까 겨울 느낌을 내도 좋을 테고.

나는 여기까지, 생각해 가져온 내용을 멤버들에게 말해주었다.

“뭔가 되게……. 낯선 느낌이네.”

“어떤 곡을 하게 될지 감이 잘 안 와.”

이영하나 천진섭처럼 주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 이거 좀 더 발전시켜 보고 싶은데.”

강주찬처럼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 반대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네.’

왜냐하면……. 처음 해보는 콘셉트였다.

이런 곡은 과거 삶에서 스테리나인 활동을 하면서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테리나인이 한 가지 콘셉트 외길만 걸어온 것은 또 아니지만…….’

* 중소 기획사 아이돌 특징: 컴백할 때마다 이것저것 다 해본다. 스테리나인도 그랬다.

아무튼, 나도 이런 콘셉트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만큼 멤버들이 이런 것을 하고 싶은지가 중요했다.

“일단 영상 몇 개 보자.”

나는 먼저 내가 찾아온 레퍼런스를 몇 가지 보여주었다.

국내 아이돌 중에는 마땅한 자료가 없어서(미래에는 조금 있겠지만……), 해외 팝 가수 음악에 어떤 댄스 스튜디오에서 안무를 만들어 녹화한 영상을 가져왔다.

케이팝 댄스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자유롭고 기품 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R&B 보컬 가수가 발매한 겨울 음악의 뮤직비디오나 촬영 기법이나 미감이 특이한 영화 클립 몇 개, 책에서 읽은 마음에 드는 구절도 발췌해서 몇 줄 소개했다.

“속도는 너무 빠르지 않게 이런 곡 정도면 좋을 것 같아.”

영상을 보여주며 한마디 덧붙이는데, 다른 사람보다는 강주찬이 흥미를 많이 보였다.

뮤직비디오가 재생 중인 태블릿PC에 들어가 합체될 것처럼 집중하는 모습…….

영상 재생이 끝나자, 태블릿PC 화면을 끄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살 붙이는 건 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딱 여기까지만 찾아왔거든. 얘기 좀 나눠보고 싶은데, 어때?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이랑 크게 상관없어도 되니까 아이디어나 하고 싶은 거 있어서 가져온 사람들은 지금 뭔가 얘기를 해봐.”

우리는 이렇게 되면……. 세 가지 타입으로 멤버들을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조사해 오는 것은 모두의 몫이니까 각자 취향대로 가져오는 일이 많은데, 완성도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업무 분담이 이루어진다고나 할까.

나를 제외하고, 세 타입이 어떻게 묶이냐면…….

먼저 첫 번째 그룹.

작곡이든 작사든 관심이 있고 공부해서 기술적인 지식이 있는 유형.

강주찬을 중심으로 서난영이나 서드림도 여기 포함된다.

내게도 소속을 붙인다면 아마도 이 그룹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방금 보여준 것보다는 좀 더 느려도 될 것 같은데. 조금 더 정적으로 감성을 강조하는 거지.”

“그래도 이별 같은 키워드는……. 나는 비추. 너무 우리 상황이랑 겹쳐 보이는 요소가 있으면 왜곡해서 알아듣는 사람도 분명 나올 것 같아. 나 그런 건 별로라서~”

“아, 좀……. 어쿠스틱 스트링 사운드 쓰면 좋을 것 같은데. 따뜻한 느낌 들게……. 힘 빼고 속삭이는 투로 가도 좋은데 한이주가 이런 거 못 해서 뭔가 애매해…….”

주로 생산적인 의견을 낸다.

이 시점 나는 ‘키워드 디벨롭을 더 해보기’라고 핸드폰 메모장에 문장을 적어넣었다.

‘감정을 강조하되 약간 더 포괄적으로……. 흠. 메모, 메모.’

그리고 두 번째는 매니아 그룹이었다.

“난 당연히 트렌디한 댄스곡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나오는 의견이 더 괜찮은 것 같아서 그냥 찾아온 것들만 보여줄게. 최근 3년 사이에 계절감 맞는 뮤직비디오 몇 개 조사해 봤거든……. 아, 이건 팬송이라서 심볼들을 좀 걸러서 봐야 돼.”

맏이는 국내외 신곡을 곧장 찾아 듣고 각 음악의 기술 및 맥락 이해도가 높은 이영하.

“나는 아이디어 없어서 조사만 해왔어. 올해 유명했던 케이팝 위주로 리스트업하고 분석해 봤는데, 대형 신인의 등장보다는 선배님들이 컴백해서 히트한 곡이 많았고…… 이 경우에는 안정적으로 기존 그룹 색을 유지한 경우가 많더라고. 걸그룹은 청량, 보이그룹은 섹시 파워풀 같은 느낌? 아, 그리고 〈구공드〉나 그 파생그룹이 제일 인기 많은 신인이었지…….”

이쪽은 〈데프아〉에서도 전력을 보여준 케이팝 매니아, 둘째 안승준이었다.

“나도 조사 담당이라고 생각하고 올해 플리 복습 좀 하고 왔지~ EDM……. DJ 음악, 댄스클럽 음악, 그리고 힙합 같은 걸 많이 들었더라고. 그런데 이런 노래는 해외 곡이 많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와는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제일 많이 들은 국내 곡은 ‘서키스’의 〈하루살이〉, ‘유은도’ 〈힘내주세요〉, ‘키지’의 〈쉼표〉, 이렇게 되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이주는 걸어 다니는 스트리밍 차트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중적인 취향의 소유자다.

한이주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노래는 어떻게든 팬이 붙었고, 얘가 너무 좋다고 주변에 추천하고 다니는 노래는 몇 년이 지나 역주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심지어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도 마찬가지…….’

신기한 녀석이다. 사람 한 명이 빅데이터 역할을 한다.

세 사람 얘기 중 지금 당장 도움이 될 만한 건 아무래도 한이주의 플레이리스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자주 들은 국내 곡.

여기서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이다.

“한이주 왜 이렇게 슬픈 노래를 많이 들어.”

“너 인디 노래도 들어?”

김지상, 천진섭. 불평 많고 군소리 많고 취향까지 까다로운 투덜이들.

사실 서드림도 엄밀히 말하면 이 그룹이지만, 아까 음악 면에서 의견을 냈으니 오늘은 제외다.

이 친구들이 하는 소리는 힘 빠질 때 들으면 조금 약오르기도 했으나, 도움이 되는 말도 많았다.

그리고 취향에 맞거나 아이디어가 좋으면 즉시 칭찬도 할 줄 아는 애들이라…….

‘필터링 없는 1호 리스너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예컨대 지금만 해도, 구시렁대는 듯 좋은 말을 했으니까 말이다.

“……슬픈 노래?”

“어? 그 한국 노래 플리 한번 재생해 봐.”

나랑 강주찬이 바로 꼬투리를 잡아냈다.

그렇게 한이주 핸드폰에서 순서대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루살이〉는 얼터너티브 록으로 ‘도시 속에서 살아가면 하루하루 사망 선고를 받아 죽음을 반복하는 것 같다’는 고찰을 담은 곡.

〈힘내주세요〉는 인디 포크 송으로, 제목 그대로 ‘힘들지만 힘내서 살아가야 한다’고 친구나 연인에게 말하는 듯한 노래였으며…….

〈쉼표〉라는 곡은 이른바 싱잉 랩 위주 감성 힙합으로 ‘힘들 때마다 쉼표를 찍듯 이 노래를 듣고 네가 휴식하기를’ 기원하는 곡이었다.

“공통점이 뭔지 알겠어?”

“어…… 세상 살기 힘들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너도 나도 패배자다…….”

서드림이 직관적으로 말하고 서난영이 농담하는데 느낌이 올 듯 말 듯했다.

슬프다는 말도 어울렸지만, 그보다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노래들이었으므로.

“……위로인 것 같아.”

그리고 이영하가 키워드 하나로 혼란을 요약 정리했다.

“힘들어도 살아가야 한다…… 보다는, 힘들어도 네가 살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다 살기 힘들어, 그래도 내일은 더 좋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지, 솔직하게.”

영하의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반짝 전구가 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솔직하게’라는 표현이 스테리나인의 노선과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스테리나인이 발매해 온 곡은 언제나 ‘진심’이라는 핵심을 공유했으므로.

“이거 좋다.”

그리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방향이 정해지고, 각자가 알고 있는 참고 자료가 모였다.

큰 줄기가 결정되자 이런저런 서로의 생각과 취향을 교환하며 잔가지는 아주 빠르게 뻗어 나갔다.

‘위로’라는 키워드, 멜로디컬하고 서정적인 댄스곡, 공감, 솔직함.

모든 발상이 한 점에 모아지려는 그때 문득 김지상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게 좀…… 괜히 대중적인 걸 노리는 거 아닌가 생각도 들어.”

“스테리나인이……. 대중적…… 이다?”

“……아니니까 문제인 거지. 좀 안 어울리는 느낌일까 봐.”

한이주가 그런 단어는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 중얼거렸고 김지상이 부연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고, 내가 아니라 강주찬이 했다.

“대중이 뭔데. 우리 팬 아닌 사람들이면 다 대중 아닌가.”

“…….”

“그야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대중적인 음원 흥행을 노리는 건 아니긴 하지, 그런데.”

단어 선택이 공격적이고 노골적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하는 사람 많을 거야.”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용은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음반이지, 이건.”

그래서 나는 강주찬의 말을 받아 이어갔다.

“주찬이 말이 맞아. 스테리나인이라는 그룹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 잘한다, 몇 명 빠져도 설득력 있고 훌륭한 노래를 만들 수 있다. 이번 앨범은 그런 용도라고 봐.”

이사님은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퀄리티라고.

이런 의미는 아닐 테지만, 나는 결국 맥락이 통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번 앨범은……. 다른 목적 없어. 증명이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프로듀싱 하나는 진짜 잘한다, 멤버들 능력치 좋다, 퀄리티 높다.

사람들이 그 사실만 알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목적 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적이 좋으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야.’

서두르지 말고, 멀리 보는 거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 활동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앨범이다.

트렌드를 잡아채고, 기존 멤버들의 특기를 활용하면서, 스테리나인의 특징 ‘솔직함’으로 승부를 거는.

강주찬은 그 자리에서, 막 떠오른 가제가 있다며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나에게〉.

영어 부제는 ‘Honestly’, 한글 뜻은 ‘솔직히, 정말로’.

청춘을 살아가는 나에게 내가 보내는 솔직한 위로, 악수, 노래로 건네는 말.

‘지금까지는 느낌이 좋아. 여기서부터는 애들한테 맡기도록 하고…….’

스테리나인 앨범 콘셉트가 자리를 잡았다면, 나는 이제 ‘에이레’로서 달리 할 일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