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02화
21. Too Bad(4)
누구는 화가 나면 머리가 식어서 침착하게 문제를 대응할 수 있다던데, 나는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너무 흘러넘쳐서 ‘싫다, 성질난다, 마음에 안 든다’ 급의 단순한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의 노선을 바로잡기 위해, 나는 생각보다는 말과 표현을 해야만 했다.
“진섭이가 뭐가 답답해서 이렇게 말하는지는 알겠어.”
“…….”
“속상했지? 이주가 다치고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응?”
내가 쳐다보며 묻자, 천진섭은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더 흥분해서 외칠 줄 알았는데 왠지 평소보다는 낮은 텐션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너무 바보처럼 그러잖아, 다 큰 애가.”
“진짜 그게 다야?”
“…….”
대답이 없었으나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속이 침착해진 것 같아서, 심호흡으로 박동을 가라앉히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나는 여기까지 너희가 와줘서 진짜 기쁘고 좋아. 고맙기도 하고. 우리 열심히 준비했고……. 너희가 우리가 하는 걸 보고 싶어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안심이 되는 게 있거든.”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솔직히 말하기 위해 꽤나 애썼다.
“그런데 기대하고 놀러 왔을 텐데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난 게, 미안하다고 해야 되나……. 아니, 알았어.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그래도 조금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희한테 그러는 게 아니라 상황 전체적으로. 무슨 말인지는 알지.”
그리고.
“이런 일…… 더는 안 생기게 할게. 얘들아, 나 다음 주 화요일 아니면 수요일에 회사 가거든?”
이 사건이 내게 주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때 애들 다 모아서 대화 좀 하자. 스테리나인……. 컴백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반드시, 더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야 한다.
스테리나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당하지 않도록.
만약 당해서 화를 내더라도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은…….
올라서야 했다.
* * *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더라도, 찜질로 뒤처리는 해두는 게 좋겠다’고 우리는 대화의 결론을 정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멍이 생긴 지 하루 이내에는 냉찜질을 하라고 해서, 안승준과 김지상이 근처 편의점에 얼음을 사러 나갔고…….
다친 애는 잠시 쉬라고 자기 침대에 앉혀둔 뒤, 천진섭은 호텔 빨래방에 넣어둔 옷을 꺼내러 가고, 나랑 강주찬 둘이서 간단한 뒷정리를 했다.
쓰레기를 분류해서 씻어두거나 사용한 호텔 수저와 그릇을 설거지하고, 식탁 위와 싱크대를 물티슈로 닦아냈다.
서로 조용히 손발 맞추어 일하던 와중이었다.
문득 강주찬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방 안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야, 정의헌.”
과연 강주찬이다.
한 살 형한테 냅다 반말로 말을 걸어오는 센스가 참으로 남달랐다.
“……진짜, 무슨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면서도 질문 내용 자체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나는 조금 전 멤버들(⅔)에게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망을 조금 말해준 바 있었다.
어차피 다들 지상이가 〈데프아〉 3차 경연 때 무대에 오르고 쓰러지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나 최근 세간에 도는 녹취 파일의 정체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설명은 수월했다.
〈오디뮤〉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K14엔터테인먼트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렸다.
요약하자면 ‘윗선은 다들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려고만 하고, 앨범 준비는 사실상 중단 상태에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들은 도망만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에이레라는 그룹 역시 존폐가 불확실한 상황이며, 일이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세 명 다 –스테리나인에 합류하든 아니든– 어나더뮤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도 했고.
에이레 멤버들 모두가 정의 내리고 싶어 하지 않던 분위기를 단호하게 요약해 전하자, 김지상과 안승준은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우리를 기다리면 안 돼.’
나는 그렇게 말했다.
‘스나 완전체가 아니어도 컴백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팬들은 분명 있고, 방송 보고도 에이레가 아니라 스나로 유입된 분들도 한 명도 없지는 않을 거라고 봐.’
‘…….’
‘5명으로든 6명으로든, 일단 컴백을 해. 그러면 난 이쪽 그룹 일 끝나고 합류할게.’
직후에는 김지상과 안승준에게도 의사를 물었다.
‘너희도 정해……. 어떻게 할 건지. 솔로 데뷔를 하고 싶은지, 스나 활동을 할 건지, 아니면 연기나 뭐 다른 시도를 하고 싶은 건지.’
‘……지금 여기서?’
‘며칠 더 생각해 봐도 돼. 그런데 어차피 뭘 하든 반대하는 사람은 있을 거고, 남의 말 듣고 억지로 하면 불행해져. 그리고 그건 내 말이어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 봐. 혼자 진지하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확답하지는 않았고, 나도 애들이 스스로 더 고찰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끝난 것이 아까 대화였는데 강주찬은 아직 마음에 풀리지 않은 의혹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주찬이라면 물어볼 것 같기도 했다.
주찬이는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은 성격도, 귀찮은 것을 뒤로 미루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형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스나 컴백을 준비하자는 결론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고.”
강주찬의 질문은 왠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강주찬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했다.
“난 스테리나인이라는 그룹이 성공했으면 좋겠어.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응.”
“하나는 나를 위해서, 그룹에 곧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했으니까. 난 너희가 나한테 밀리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흠……. 그러면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너희를 위해서……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날 위해서인 것 같다. 너희가 이렇게 무시당하는 거 보니까……. 열받아.”
강주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돌아온 답은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조금은 기꺼웠다.
“나도 무시당하기 싫어.”
그리고 녀석은 처음 말을 걸었을 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사실 형 거기서 1위 하는 거 보고, ‘탈퇴하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어? 너 나 못 믿었냐?”
“아니, 그런데 너는……. 말을 너무 이상적으로 하잖아. 원래 그런 말은 믿기 힘들어. 누구라도 다 그럴걸.”
강주찬이 가볍게 나를 타박했다.
듣는 입장에서는 그런 까닭 따위 전부 변명처럼 들렸지만.
못 믿었어도 어쩔 수 없는 말이기는 했기에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음.”
강주찬이 단어를 고르는 동안 앞에서 짧게 기다려주었다. 몇 초쯤.
“열심히 할게, 나도.”
따스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문득 강주찬과 내가 마지막으로 단둘이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시기가 〈데프아〉 출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때가 아마도 6월이었을 테니까, 12월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반년만이었다.
여전히 강주찬은 말주변이 없었고 무뚝뚝했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런 여전한 것들이 싫지 않았다.
“……고맙다.”
나는 강주찬보다는 적확한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단지 그뿐이었다.
멋쩍게 웃었다. 녀석은 몰라도 나는.
“나 그래도 약속 지켰지?”
“쟤들 대답 아직 안 했잖아. 또 몰라.”
“그런가……? 난 이미 다 지킨 것 같은데.”
약속이란 내가 〈데프아〉에 출연하기 전에 강주찬에게 걸었던 것이다.
‘내가 승준이도 지상이도 다 데리고, 꼭 늦지 않게 그룹으로 돌아올 테니까……. 형 한 번만 믿어주라.’
물론 아직 결과는 불확실하다지만.
과거를 보고 온 입장에서는, 과거 이 시기와 비교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생겼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많이 변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강주찬이라면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 * *
“……아무튼 제가 파악한 건 여기까지예요.”
그 주 수요일, 귀국해 앵콜 콘서트를 준비하기까지 받은 짧은 휴가 때.
미리 정해둔 대로 나는 어나더뮤직 사옥으로 향해 이사님과 매니저팀 팀장님을 만났다.
두 분 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분들이라서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업계 비밀을 일러바치는 스파이가 된 기분도 들었지만, 보고가 필요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되게 불안정하다는 거네?”
“예, 사실 저는 에이레가 데뷔를 못 하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좀 해요.”
내가 대답하자, 팀장님은 이사님을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이야기가 계속 돌기는 하더라고요. K14엔터테인먼트 회사 내부에 굉장히 많은 문제가 생긴 상황이라고.”
여러모로 이곳저곳 소문이 많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출처 없는 소문이든, 팀장님의 연줄을 통한 소식이든.
이사님은 손깍지를 턱에 대고 이마에 주름이 잡힐 때까지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픕니다, 그렇죠?”
이사님은 이사님 고유의……. 사극에 나오는 임금 옆 심복 같은 말투로 말씀하셨다.
평소에는 안 그러시는데, 우리나 연습생들을 대할 때에는 어색하신지 말투가 저렇게 이상해지시고는 했다.
“이게 의헌이에게도 해당 사항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는데, 기본적으로는 비밀이다~ 생각하고 들어요, 알았지?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동생들에게도 너무 막 그러지는 말고, 예?”
서론이 긴데, 저 정도 멘트면 멤버들에게는 말하기 전에 웬만하면 ‘이사님이 비밀이라고 하시던데……’ 같은 멘트로 운을 띄우라는 의미였다.
이사님이 ‘크흠’ 헛기침을 하시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마 그, 회사가 그룹 매니지먼트를 놓아 버린다면요. 사실 재결합…… 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협력을 다시 하기는 무척 힘들 것 같다고 우리는 예상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호의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선다고 해도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K14엔터가 에이레 매니지먼트를 그만두겠다, 그렇게 정해진다면, 여러 소속사가 합의를 해야 하는 지점이 오는데……. 그게, 어…….”
중언부언 말이 많이 길어지는데, 짧게 줄이면 ‘소속사들끼리 합의가 잘 될 가능성은 낮다’였다.
‘……음?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왠지 ‘그룹 데뷔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뉘앙스였다.
뭐랄까, 위로를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니 이게 정상적인 사고 흐름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