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98화
20. DNA(6)
“물론 회사 허락 없이 움직일 수는 없지만……. 네 의사도 중요하니까, 먼저 물어봤어.”
나는 낙서가 가득한 태블릿PC를 김지상의 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
김지상은 짧게 침묵하다가, 어쩐지 표정이 밝아지더니 목소리 톤을 높여 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공개되면, 우리한테 하차 요구했던 사람들이 다 법정 간다는 거지?”
추론의 끝에 도달해 깨달음을 얻은 지상이는 조금 신이 나 보였다.
“……윤아 작가님은 딱 법정까지만 갈지도.”
“그래? 그러면 더 좋지. 난 좋아.”
오케이 사인.
조금 허망한 기분마저 들 정도로 깔끔한 승낙이었다.
‘어이가 없네…….’
계산 끝에 저런 본인만의 방법으로 사건을 이해했다는 게 웃기기도 했다.
물론 틀린 결론은 아니고 뜻만 통하면 된다지만…….
이렇게 결말이 날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저 말로 설명할 걸 그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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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많은 일이 있었다.
진짜로……. 많은 일이 있었다. 시간은 겨우 몇 주 지난 것 같은데…….
일단 우리 회사는 많은 우려와 상의와 조건 끝에 녹취 파일 사용 허가를 내려주었다.
‘편집 짬이 있어서 그런가, 쏙쏙 뽑아서 잘 쓰더라…….’
김미진 PD는 감사히 파일을 복사해 가져갔고, 동료들과 함께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파일 가공을 마치고 온갖 곳에 증거를 뿌리며 전투태세에 돌입했다는 말이다.
우리 신상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사람들은 피해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 했고, 추측이 어려워지자 녹취가 가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피해자일 수도 있는 연습생 목록에 지상이와 나, 심지어 승준이 이름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우리는 해명하지 않았다.
‘리스트에 있는 다른 소속사들도 대개 대응이 없었지.’
그러다가 ‘2차 가해 위험이 있으니 무분별한 추측은 자제하자’라는 움직임이 팬덤 사이에 돌았고, 루머에 얽힌 소속사들도 비슷한 내용이 담긴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렇게 모두의 가슴 속에 찜찜함만을 남긴 채 피해자 추측은 적당히 사그라들었다.
한편 아주 빠른 속도로 정돈 없이, KMC와 K14엔터테인먼트의 비리와 유착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잠시 눈 뗐다가 다시 보면 새로운 뉴스가 그들을 욕하거나 비판하거나 고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뜨거운 관심이로군.’
역시 자극적이라서 그런가.
화를 내는 사람도 많고, 떠드는 사람도 많았다.
소식은 신문 사회 면을 장식하고, 공중파 뉴스에 등장했다. 이튜브나 SNS, 인터넷 커뮤니티는 늘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에이레 멤버들은 매일의 일을 했다.
리얼리티 편성이 조금 미루어졌다는 것 외에는 일정에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실무진은 우리에게 데뷔 앨범도 준비하자고 했고, 많은 루틴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요 며칠은 그냥 해체하라는 의견도 상당히 많이 보이던데.’
사실 그런 의견은 대형 신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견제 같기도 했다.
예컨대 ‘PD가 원하는 멤버 짚어서 방송 내보낸 것 자체가 조작’, ‘투표 수는 안 건드렸다니까 조작은 아님’ 의견이 대립하거나.
‘피해도 확실하지 않고 멤버들은 잘못 없다’, ‘데뷔해서 잘되는 것 자체가 피해자 가슴에 대못 박는 일’ 하고 싸우는 사람들도 보이고.
아무튼 난리도 아니었다.
별로 가슴에 대못이 박히지 않은 나는 하루하루 콘서트 연습이나 할 뿐이었다.
‘취소나 환불도 안 된다고 하고……. 열심히 해야지.’
이번이 〈데프아〉를 통해 사귄 친구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단독 콘서트가 될 테니까, 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요즘은 아무리 보안요원이 잡아내도 어떻게든 콘서트 영상이 남아 돌아다니니 대충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콘서트 좋아!’
체조 경기장처럼 큰 무대에서 단독 공연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꽤나 설레었다.
‘스테리나인으로 만오천 명 관객 채우려면 앞으로 몇 년 걸리려나…….’
합동 콘서트나 연말 무대 경험은 있으니까 큰 공연장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기분만은 색달랐다.
공연 인원이 4스나 정도로 많아 까다로운 점은 있었으나, 연습 과정이 고되지는 않았다.
내가 거쳐온 팀들 자체가 탈락자 공석이 많지 않았으므로……. 맞춰볼 요소가 적어서 난이도가 낮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연습실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마음에 안 드는 디테일을 보강하거나, 남의 연습을 봐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둘 중 후자였다.
나는 연습실 맨 뒤 중앙, 의자 위에 서서 모두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노래를 틀고 완곡 퍼포먼스를 본 뒤, 끝나고 피드백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다들 실력이 그사이에 또 늘었다. 괜찮네.”
원래 서론과 결론은 칭찬으로 열고 닫아야 한다.
“할 말 많이는 없고, 일단 ‘La La La 터지는 Flashlight’ 이 부분에서 지금 왼쪽 날개 너무 퍼져.”
그렇게 나는 몇 가지 보고 미묘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조리 이야기해 주었다.
노래가 멎어서인지, 구석에서 쉬고 있던 다른 –이 곡을 하지 않는– 연습생들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두 번째 싸비 들어갈 때 태훈이 형 오른쪽 팔이 너무 올라가요. 어깨에 힘 빼고 조금만 내립시다.”
“이렇게?”
“네네. 그리고 이거 다음에 이어지는 동작, 손 이렇게 하는 거 있잖아요. 원곡에서는 엄지 검지랑 중지까지 펴거든요, 엄지 검지 총 모양이 아니라. 꼭 총 모양으로 해야 된다는 건 아닌데, 서로 손동작 디테일은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략 그런 이야기를 몇 분 이어가는데, 연습생 중 한 명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요? 의헌이 형 무서워.”
그러자 21위로 파이널 직전 탈락했던, 나와 〈늑대의 시간〉이나 〈일일구〉 무대를 같이 했던 주태훈 형이 숨을 고르다가 웃었다.
“너 의헌이랑 팀 해본 적 없나?”
“네, 없죠……. 있었으면 저 파이널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팀 되면 더 심해요?”
“어우, 진짜 그냥……. 우솔 쌤보다 더 무섭지. 네 상상보다 딱 세 배 더 무섭다.”
자학인지 남을 디스하는 건지 모를 발언과 함께 앞담이 들려왔다.
“사람 앞에 두고 둘 다 배짱이 아주 보기 좋네요.”
“거봐, 무섭지?”
“진짜 대박 인정합니다.”
시답지 않은 농담과 오버액션이 오가는 오후.
엄밀히 말해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는 조금 오랜만이었다.
물론 이건 두 사람의 넉살 좋은 성격 덕분에 연출된 상황 같기도 했지만…….
‘에이레 멤버들 하고만 있으면 이러지 못하니까, 요즘은.’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다들 자주 불안해했고, 예민해져 있었고, 불시에 우울함을 드러냈다.
평소나 방송에서 밝았던 멤버들도 텐션을 끌어올리지 못할뿐더러 안승준과 김지상도 주변 눈치를 계속 봤다.
〈데프아〉에서 시작된 여러 문제가 워낙에 흉흉하기도 하고, 일개 아이돌 멤버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안한 요소도 많고, 멤버들이 쓸데없이 욕을 먹기도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말이지 오랜만에, 짧게나마 웃고 떠든 그때였다.
“수, 수민아. 왜 그래.”
“뭐야? 수민이 괜찮아?”
그때, 에이레 멤버 중 하나인 송수민이……. 아무 예고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당황한 듯 눈을 계속 비비는 게, 본인도 당황한 듯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앉아만 있던 애들도 일어나서 그쪽으로 모였다.
나도 몹시 당황해 살피러 다가갔음은 당연한 일이고.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갑자기 왜 이러지? 아…….”
“아이구, 괜찮아. 뭔가 놀랐나 보다. 괜찮아.”
먼저 나는 송수민 등을 토닥이며 달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흩어지라고 눈짓했다.
돌연 이러는 원인이 뾰족하게 짐작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 명 스무 명이 한 명에게 달라붙어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하려면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내 팔을 뒤에서 슬쩍 잡는 손길이 있었다.
‘음?’
돌아보니까, 류희재였다.
“……넌 하던 일 해. 내가 수민이랑 같이 있을게.”
“어? 아, 네.”
그러고 보니 이 그룹……. 내가 리더가 아니었다.
나는 이런 행동에 리더고 뭐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류희재는 몇 주간 리더 일에 열심히 임하고 싶어 했다.
여러모로 노력도 했고 나서기도 자주 나섰고, 내 눈에도 보일 만큼 나를 의식한 액션이 많기도 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슨 생각이나 계책이 있으려나.’
류희재의 화법에 나는 여전히 묘한 불신이 있었지만……. 시간 끌고 싶지 않아서 일단은 물러섰다.
둘이서 보컬 연습실에 틀어박히는 것 같아 정수기에서 찬물이나 받아서 방에 넣어주고, 그게 다였다.
‘좀 오래 걸리네…….’
삼십 분 가까이 시간이 흘러서, 일 분 간격으로 시계를 들여다볼 무렵 보컬 연습실 문이 열렸다.
눈가가 여전히 발갛게 부어 있는 송수민과 살짝 기진맥진해 보이는 류희재가 같이 나왔다.
나는 대충 그 근처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류희재는 내게 하던 일이나 하라고 했지만, 어차피 내 연습 시간 아니라서 내 마음이다), 두 사람을 보고 서둘러 일어났다.
“진정 좀 했어?”
나는 송수민에게 접근해 물었다.
“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죄송해할 건 없고, 괜찮으면 됐어. 스트레스 쌓이면 다 그러더라.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스트레스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돼요……?”
“네가 모르는 사이에 쌓였을 수도 있지, 뭐. 가서 낮잠 좀 자고 있어. 이따가 저녁 맛있는 거 사갈게.”
그렇게 송수민을 달래서 잘 보내주고, 나는 드디어 류희재에게 손짓했다.
아까까지 두 사람이 들어가 있었던 보컬 연습실을 가리키면서 말이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들어보려는 속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