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97화
20. DNA(5)
“PD님.”
복잡하지 않은 고민을 끝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주변 분들이랑 이야기 좀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예……. 예?”
김미진 PD는 마치 정신이 뒤늦게 든 사람처럼 어눌하게 반응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제안하려는 내용 자체를 불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한번 확실하게 말로써 강조했다.
“녹음 파일 사용에 관해서요.”
“…….”
“아, 이게 될지 확실한 건 아니라서……. 논의를 해보겠다는 이야기예요.”
일을 가능케 하려면 현장에 같이 있었던 김지상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와도 회의해야 했다.
스나 멤버들에게는……. 전부에게까지는 아니어도, 안승준에게는 미리 알려둬야 애가 서운해하거나 놀라지 않겠고…….
에이레 멤버들에게는 밝힐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대충 머릿속에서 분류 작업을 마치고, 나는.
“정해지면 연락드리게 PD님 전화번호 좀 부탁드립니다…….”
……어안이 막힌 듯 제대로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미진 PD님의 번호를 땄다.
나의 이 행동이 PD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리고 이 녹취가 세상에 밝혀진다면 ‘KMC 내부 고발’ 시기가 앞당겨지고, 여파도 빨리 찾아올 터.
그렇게 된다면 나도 더 빠르게 그룹에 합류해, 더 안정적으로 〈오디뮤〉 무대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선배님~ 저희 세팅 완료했습니다~”
밖에서 우리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서, 나는 바닥에 누운 캐리어를 세웠다.
꾸벅 인사하고 먼저 거실로 나가려는데 PD님이 문득 내 이름을 불렀다.
“저, 의헌 씨.”
“네?”
“아니, 그. 그러니까……. 고마워서요.”
아직 한 일도 딱히 없는데 무슨 벌써 감사냐고 너스레를 떨어보려다가, 나는 그냥 말을 삼켰다.
사실 미진 PD님도 녹음을 활용할 방법까지 생각이 가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부탁하기는 어려우니까.
‘반대로 내가 제안하는 건 쉽지만.’
마음이 잘 맞아 좋은 결론이 났다고 해두자.
“제가 이번 리얼리티가 여기서 맡은 마지막 프로젝트거든요. 그래서 뭔가…….”
“PD님 퇴사하세요?!”
“어쩌다 보니까 정해졌어. 아무튼, 의헌 씨. 무슨 말인지 알죠? 누구랑 사이가 좋고 누구랑 나쁘고, 그런 거랑 별개로 말이에요. 끝물에 이런 일이 생겨서 그동안 속이 복잡한 것도 있었어요, 제가.”
퇴사하냐고 물은 것은 내가 아니라 허윤아 작가였다.
물론 이 소식은 나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의헌 씨가 그렇게 나서준다고 하니까 좀 안심이 됐다고요. 고마워요.”
우리의 의문은 대충 얼버무린 채로, 미진 PD님은 결론을 냈다.
나는 곧 연락드리겠다는 말로 마주 인사해 주고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섰다.
‘그냥 순수하게 기분 좋아 보이셨는데, 사람 마음은 겉만 보고는 정말 모르겠다.’
한편 등 뒤에서 두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PD님 잘린 거 아니죠……?”
“야, 아니거든?”
“김미진 어디 가는데…….”
“아이고~ 이직입니다요~”
어디 KMC보다 괜찮은 회사에서 –후보가 짐작이 안 된다– 헤드헌팅이 들어온 것 같은 투였다.
KMC의 초가삼간 다 불타 없어지기 전에 회사를 옮기는 것도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거실은 말마따나 카메라와 조명이 전부 세팅된 채로, 에이레 멤버들은 이미 카메라 앞에 모여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캐리어 지퍼에 뭐가 걸려서 닫히지가 않더라고. 셋이 매달려서 짐 좀 정리하느라.”
나는 물어오는 말에 대충 대답해 주며, 거실 빈자리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촬영이 끝나고도 할 일이 많았다.
* * *
그날 밤, 김지상의 방.
복층 위인 내 3인실과 달리(캐리어 3개 계단으로 옮기느라 몸살 날 뻔했다), 지상이는 1층 거실 바로 옆 2인실을 썼다.
나는 지상이랑 같은 방을 쓰는 멤버에게 싹싹 빌어 잠시 대화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둘만 있는 공간을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2층 침대에 누워 있는 김지상을 끌어내려 마룻바닥에 같이 앉아 PD님, 작가님과 대화한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그래서 내 말은, 우리가 녹음 사용을 좀 허락했으면 하거든.”
“으음, 응.”
“물론 우리 목소리는 자르고 변조 같은 걸 해서 공개할 텐데, 루머 생기는 건 막을 길이 없어서……. 위험이 없지는 않아.”
물론 방송에 우리가 자리를 비운 내용이 나온 것도 아니고…….
리액션 컷 사이에 걸치는 모습으로도 ‘우리가 이십 분 넘게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하물며 잠시 화장실에 가거나 짧게 복도에 나가는 등 드문드문 대기실을 출입하던 연습생 수는 늘 상당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관계자는 조금 있고, 소문도 돌 수 있으나……. 사실 증거와 논리가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와 지상이가 각각 1위와 2위로 최종 순위를 기록하며 데뷔를 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피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
그래서 대중은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테다.
우리가 자력으로 잠긴 문을 안에서 열고 무대에 올라갔다, 그래서 무대를 부수고 상위권으로 데뷔했다…….
‘그날 쓰러지고 병원 간 애들 데리고 루머 만들지 마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 주장이었다.
심지어 방송 편집이 포장해서 만들어준 스토리까지 있어서 진실의 가닥을 찾아내기에는 힘이 꽤나 들 거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입장에서 당한 것을 밝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지.’
우리 이미지에 타격은 오겠지만, 그것도 KMC와 K14엔터가 비리와 접대로 무너졌을 때 ‘에이레’가 받을 타격에 비하면 티끌이었다.
걱정은 일단 접어두는 게 좋겠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너무 근심이 많은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그런데 김지상은 내가 이 내용을 모조리 설명해 준 뒤에도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결정하기 어려워서 짓는 표정이 아니라 이해 자체가 안 될 때의 얼굴이었다.
“너 이해 못 했지.”
“못 했다. 어쩔래.”
“아니, 왜 당당해? 들어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지상이의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태블릿PC를 집어왔다(몇 달 전에 빌려준 내 거다).
그리고 곧장 화면 잠금을 풀고 그림 메모장 어플을 열었다. 몇 주 전 채호원의 행동에서 영감을 얻은 방법이었다.
바로바로, 그림과 함께 설명하기.
우선은 포털 사이트에서 법정 사진을 검색해 다운로드한 뒤 빈 화면에 불러왔다.
“여기 사람이 앉아 있는데.”
“눈 마주치지 마.”
아마도 정치인일 사람을 적당히 무시하며, 빈 공간에는 이름을 썼다.
KMC, K14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네가 낮에 보여준 뉴스 있지. 떨어진 연습생 소속사가 신고자일 가능성이 높다더라.”
“가능성이 높은 수준도 아니고 확실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어디인지는 모르니까 이건 ‘XX엔터’라고 적어두기로 하고.”
그렇게 세 개 단체의 이름이 법정 사진 아래에 적혔다.
KMC, K14엔터, XX엔터. 나는 그 옆에 각자의 죄목을 적어두었다.
* KMC: 사기, 배임, 협박
* K14엔터: 사기, 배임, 협박
* XX엔터: 배임
같은 단어를 여러 번 쓰니까 질문이 들어왔다.
“배임이 뭐야?”
“어……. 좀 복잡한데, 여기서는 ‘배임증재’, ‘배임수재’의 큰 카테고리로 쓴 거긴 해.”
“증재랑 수재는 뭔데.”
“증재는 준 거, 수재는 받은 거. 돈, 그러니까 뇌물을 주거나 받았다. 참고로 받은 쪽 형량이 더 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지상이가 중얼거렸다.
“사기는 데뷔 인원을 원하는 대로 미리 추려서 사기인 건가.”
“그렇지.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러면 투표 조작도 사기야?”
“아마도? 이번이 죄로 인정되면 전과 2범이네…….”
나는 중얼거리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방송 종사자……. 말하자면 언론인이 돈을 받은 거라서 부정청탁 금지법인가, 아마 거기에도 걸릴걸.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이건 알아만 둬. 나도 판결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법도 알못이라……. 공방 들어가고 항소하고 하면 더 추가되거나 줄어들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대로 대충 쓰는 거니까 그것도 감안하고.”
말하면서는 펜 색을 빨간색으로 바꾸어 몇몇 글자 위에 선을 긋기도 했다.
* KMC: 사기, 배임, 협박
* K14엔터: 사기, 배임, 협박
* XX엔터: 배임
그다음에 그린 것은, KMC와 XX엔터를 시작점으로 뻗어 나가는 화살표 표시.
세모난 화살표 끝 두 개가 법정 사진 속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이 죄목이 뉴스 기사로 밝혀졌고, 조사하면 밝혀질 혐의거든?”
“어려워.”
“아니, 벌써부터 어려워하면 어떡하냐…….”
나는 또 펜 색을 파란색으로 바꾸고 몇몇 글씨를 두껍게 덧그렸다.
“계속 들어봐. 이게 우리가 당한 거야. 별표는 우리가 증거 가진 거.”
……라고 말하면서.
* KMC: 사기, 배임,협박
* K14엔터: 사기, 배임, 협박*
* XX엔터: 배임
김지상이 끄적끄적 움직이는 펜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 녹음이 왜 중요한 증거인지 잘 모르겠어.”
“음……. 중요하지. 사실 제일 중요하지.”
KMC에서 내부 고발을 준비하는 팀에서도 CP의 술값 영수증 내역이나 종업원의 증언 따위를 확보하기는 했을 거다.
결국 그런 정보가 증거가 되어 KMC의 합병과 K14엔터의 폐업을 이루어냈지만,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 항소를 여러 번 걸었고, 실제로 증거가 약하다며 형량이 낮아지기도 했어.’
또한 그 증거들은 한눈이나 한 귀에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막말로 요약하면, 자극이 부족했다.
“지상아, KMC와 K14엔터가 아무리 계열이 같아도……. 사실 다른 회사잖아?”
“그건 그렇지……? 딱히 체감이 잘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그래서 중요한 걸 놓친 거야. 그때 우리가 무슨 얘기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음……. 응.”
김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협박의 내용.
〈데프아〉에서 자진 하차하라는 말.
KMC의 요구와 정확히 같은 요구였다.
“다른 회사 두 개가 서로 같은 요구를 했어. 그건 즉 유착이 존재한다는 의미고…….”
말끝을 늘이며, 이번에는 펜 색을 초록색으로 변경해 목록 중 남은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초록색 밑줄은 ‘우리 증거를 공개하면 세상에 드러날 혐의’를 의미했다.
* KMC: 사기, 배임, 협박
* K14엔터: 사기, 배임, 협박*
* XX엔터: 배임
여러 가지 색으로 얼룩덜룩한 리스트가 그렇게 완성되었고.
나는 마지막으로 K14엔터테인먼트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사진 속 피고인석에 화살표를 쏘았다.
“협박 내용이 공개되면 K14엔터를 바로 법정으로 끌고 올 수 있어.”
“…….”
“KMC의 죄질이 더 나빠지는 건 덤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녹음 증거는 꽤 괜찮은 떡밥이었다.
김미진 PD와 그 동료들이 열렬히 원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