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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95화 (95/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95화

20. DNA(3)

그러니까 몇 주 전, 김미진 PD는 〈데프아〉 3차 경연 현장 촬영 직후 박 부장과 ‘회의 겸 말싸움’을 조금 하고, 박 부장에게서 편집 권한을 받아왔다.

그리고 동료인 허윤아 작가와 머리를 맞대고 후반 작업 구상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또한 단 며칠, 칠팔십 시간에 준하는 강도 높은 노동 끝에 최고의 아웃풋을 세계에 전송했다.

짧게 요약하면……. 김 PD는 그날부터 자신이 밀어주고 싶었던 연습생들을 시원하게 밀어주었다.

그렇게 박 부장은 좋게 편집해주겠다고 돈까지 받고 약속한 뒤, 지키지 않은 천하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알아서 못 밀어주게 되었다고 빌었어야지!’

김 PD는 그냥 박 부장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아니, 사실 전가했다는 말부터가 틀린 표현이었다. 김 PD는 박 부장의 사연 따위 알 바 아니었으므로.

그 양반 K14엔터에 가서 싹싹 비느라 자잘하게 돈 받아먹은 것은 기억도 못 한 게 아닐까, 김 PD는 생각했다.

“일이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선배 엔지니어가 중얼거렸다. 김 PD는 선배가 걱정하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신고자가 본인이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은근슬쩍 숨겨가며, 자신의 부당함만을 주장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발적으로 돈을 갖다 바친 사실이 밝혀질 것 같으면 합의금으로 술값을 환불받고 입을 닫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뒤에서 KMC 내부 고발을 준비 중인 동료들만 타이밍을 놓치고 고발의 임팩트를 잃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동료들은 상사의 비리를 세상에 밝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자 했으니까.

“일단 며칠 정도는 서두르지 말고 두고 보는 게 어때요?”

김 PD는 정수기로 머그컵에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담으며 제안했다.

새로운 사건이 돋아날 가지는 현재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보다 분명 많았으므로.

좋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미 발생해 바꿀 수 없는 사건은, 지긋지긋하던 박 부장의 경찰 구속뿐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어휴……. 그런데……. 그 컵은 대체 뭐냐?”

“아, 이거요.”

김미진 PD는 손잡이를 잡은 손을 돌려 머그컵에 프린트된 글자를 선배에게 보여주었다.

그 컵은 김 PD가 몇 년 전 모 시리즈 영화 시사회에 당첨되어 특전으로 받아온 굿즈였다.

흰 배경의 머그컵 한쪽에는 시뻘건 잉크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서기 21세기 밥버러지들의 눈물’이라고.

“이런 날 아니면 언제 꺼내어 쓰겠습니까…….”

김 PD가 컵에 담긴 미지근하고 투명한 물을 들이켰다.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지만, 김미진 PD는 당장은 기뻐하기로 했다.

〈데프아〉 총연출 박 부장, 드디어 경찰에 덜미 잡히다……. 짱.

* * *

그날 저녁에는 에이레 리얼리티 촬영 일정이 있었다.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부터 해야 했다…….

‘끝나고 미진 PD님이랑 얘기해야지.’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목은 〈WE ARE A:Re〉.

팀 이름 자체가 be 동사에서부터 ‘are’에서부터 나온 거니까, 말장난이 약간 들어간 제목이었다.

‘존재하다’, ‘있다’ 같은 단어 뜻으로 그룹 이름에 의미 부여를 했다나 뭐라나.

‘현장 분위기 나쁘지 않고…….’

스태프 구성이 궁금했는데, 김미진 PD와 허윤아 작가가 제작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촬영이 시작된 이 시점에는 두 분 다 우리 숙소에 와 계시다는 이야기다.

조금 전, 두 분은 인기에 비해 허름한 숙소의 현관문을 열며 ‘오……’ 하고 반응하셨다.

그 감탄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리더와 룸메이트를 정하고, 각자 가져온 캐리어를 소개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텐데요~”

각자의 스케줄 문제로 제법 늦은 시간 시작한 촬영.

임시 MC는 나…… 한테 제작진들이 시켰는데, 나는 ‘쟤가 발음이 더 좋다’고 안승준한테 일을 넘겼다.

왜 굳이 리더 정하는 것까지 촬영을 하나 궁금했지만, 〈데프아〉에서도 그 과정 다 찍어갔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리더는 내가……. 해보고 싶은데.”

의외로 류희재가 먼저 손을 들고 의사를 밝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땡큐였다.

리더 역할 수행이 신통치 않았다고 뒷이야기까지 들은 것은 물론 잊지 않았지만…….

귀찮은 일 대신 맡아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만큼 험담이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와는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 제일 연장자가 리더를 맡는 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럽기도 하고.

‘처음부터 내가 리더 포지션으로 공개된 스나 하고는 느낌이 또 다르달까…….’

아예 리더라고 도장을 찍어서 출시된 것과 개인 인지도가 있는 상태에서 타이틀을 붙이는 것의 차이였다.

류희재의 자원에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이 형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의헌을 부리더로 추천합니다.”

“…….”

“찬성하시는 분.”

제안한 류희재까지 총 아홉 명이 손을 들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열 번째로 손을 들며 부리더 등극 소감을 발표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게 돈 계산이라서, 총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총무가 뽑혔다.

“총무 정했으니까 서기도 투표해요.”

총무가 정해지자마자 내가 제안하니, 눈치 빠른 친구들은 대략적인 흐름을 짐작한 것 같았다.

“이 정도 인원 되면 회계도 한 명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숙소 청소 중요하니까 전 미화부장 필요할 것 같아요.”

“저희 사진 자주 찍어야 되니까 사진 담당도 한 명 정해요.”

“사진 정했으니까 영상 담당도 뽑을까요.”

그렇게 리더, 부리더, 총무, 서기, 회계, 미화부장, 사진 담당, 영상 담당, 요리 담당, 통역 담당 멤버가 선정되었다.

총무는 비품 체크와 밥 주문 담당, 회계는 영수증 모으기 위주로 살짝 업무가 달랐다.

사진 담당은 갤러리 검사를 해서 사진을 제일 잘 찍는 멤버로, 영상 담당은 핸드폰 화질이 제일 좋은 멤버로 골랐고.

요리 담당과 통역 담당은 그냥 억지로 갖다 붙인 직무로 요리나 외국어 조언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다.

덧붙이자면 안승준이 서기(MC 잘하고 있어서 서기도 잘할 것 같다고 주장함), 김지상이 회계(그냥 귀찮은 거 시켜주고 싶어서 내가 열심히 밀었음), 송수민이 요리 담당(언제 취미가 요리라고 들어서 추천해 줌)이었다.

‘다 같이 소처럼 일하자고.’

우리는 기세를 몰아 숙소 내규도 몇 개 정하며 리더 결정 코너를 마무리했다.

특별하다고 할 만한 조항은 없었고, 그냥 단체 생활에 당연히 필요한 규칙들이었다.

* 주의 줄 때, 부탁할 때, 잔소리할 때 예쁘게 말하기 (꼽주는 말투 엄금)

* 밥 먹었으면 바로 쓰레기 버리고 청소하기 (칼, 가위, 집게, 수저 등 설거지 필수)

* 너무 늦은 시간에 세탁기 쓰지 않기, 꼭 필요하다면 빨래하겠다고 얘기하고 하기

* 남의 침대에는 허락받고 올라가기

등등. ‘외국인 멤버 앞에서는 어려운 단어 쓰고 나서 꼭 설명해 주기’ 같은 특약 조항도 있었다.

……사실 내가 낸 의견이 많았는데, 너무 또래랑 오래 살아본 사람 티가 나서 다 정리하고 보니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다 안 겪어보면 모르는 중요한 요소들이라서 이런 자리에서 미리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사족을 추가하자면 스테리나인 숙소·연습실 규칙 및 불문율은 여기에 몇 개 더 있었다.

‘숙소 나갈 때나 연습실 퇴근할 때 전등과 컴퓨터 모두 끄기’, ‘공용 물건은 쓰고 나서 제자리에 두기’, ‘방문 열기 전 먼저 노크하기’, ‘가족이나 지인의 숙소 방문 시 미리 말하기’, ‘샤워할 때 화장실에 핸드폰 들고 들어가지 않기’, ‘제발 샤워하고 물 흘리면서 나오지 말기’, ‘인형 자주 세탁하기’ 등등등…….

옷이나 가방, 신발, 액세서리는 돌려 쓰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관련 규칙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음은 룸메이트 정하기인데요, 저희가 스태프분들께 아까 받은 쪽지가 있죠. 우리 리더가 읽어볼까요?”

안승준은 생각보다 MC를 무척 자연스럽게 잘 봤다.

류희재는 갑작스러운 지목에 살짝 당황한 듯했으나, 곧 표정 관리를 하고 안승준이 건네준 쪽지 내용을 읽었다.

“룸메이트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원하는 방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결정합니다.”

룸메이트 결정은……. 뭐, 평범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승자가 먼저 방을 골라 룸메이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스템.

남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에는 이유가 있는 법에, 복잡하지도 않았으니까 적당히 납득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진짜 3인실까지 있네.’

사람이 열 명인데 방이 네 개뿐이라 3인실 두 개, 2인실 두 개로 나뉘었다.

내 룸메이트가 된 면면은 그룹 막내 박지웅과 최종 5위로 데뷔한 캐나다 국적의 멤버 양노아였다.

둘 다 한 번씩은 〈데프아〉 내에서 같은 팀으로 경연을 해봐서 그렇게 막 낯선 얼굴까지는 아니었다.

가위바위보 운이 엉망이라 내가 마지막으로 2층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이 어색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잘 부탁해요, 형.”

“어어~ 잘 지내보자.”

“저도 힘낼게요.”

우리 중학생은 무엇을 힘내려고 하는 걸까…….

원래는 2인실을 쓰고 싶었는데, 사람을 모아두고 보니 3인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딱히 룸메이트 정하기에서 특이한 사건은 없었다. 류희재와 송수민이 단둘이 방을 쓰게 된 일을 제외하면.

‘묘한 만남이다…….’

류희재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수민이는 착하니까 어떻게든 되겠거니 생각했다.

서로 친해지기 전에 왠지 그룹이 해체될 것 같았지만, 류희재가 리더를 맡은 이상 노력하지 않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둘이 친목을 나누는 모습을 대충 그려보다가 곧 상상력의 한계로 그만두었다.

“짐 옮기기 전에 우리 캐리어 가지고 인터뷰하고 갈게요~”

이후 제작진의 지시에 우리는 가구가 제일 없는 1층 방으로 순서대로 들어가 개인 촬영을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가방 내용물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촬영하려는 것 같았다. 간단한 속마음 인터뷰와 더해서 말이다.

나는 스태프나 멤버들과 이야기해 일부러 내 순서를 맨 마지막으로 조정했다.

거실에서 들어보니 방 안 소리가 방음도 제법 괜찮게 되었다.

‘인터뷰가 다 끝나야 타이밍이 오려나.’

캐리어 소개 겸 개인 인터뷰가 끝나면, 엔딩 녹화만 따고 오늘 촬영이 종료된다.

녹화가 끝나고 정신없을 때를 노리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대화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촬영 스태프들은 장비를 옮기느라 바쁠 때쯤으로 나는 말 걸어볼 시기를 정했다.

거실 구석에 옹기종기 모아둔 캐리어 더미에서 내 것 세 개를 골라 방으로 들어가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지막 순서인 부리더 정의헌입니다.”

카메라 뒤에 선 스태프들을 슬쩍 살폈다.

촬영 내내 느꼈는데, 오늘 김미진 PD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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