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92화
19. Cinema(6)
나는 천천히, 근거 세 개 중 첫 번째부터 짚었다. 시간순으로 첫 번째.
“그리고 제가 전에도 〈데프아〉를 되게 열심히 봤는데……. 당시에는 MC가 연습생들과 상호 작용을 거의 안 했어요. 제가 본 게 방송이고 편집되어 잘려나간 분량을 감안해도 MC 출연이 적었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고요, 거리를 지키면 지키는 대로 좋고 친근하면 친근한 대로 좋죠.”
〈데프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구공드〉에서는 MC가 ‘맏언니’ 역할을 겸해 연습생들을 많이 돌봐주었다.
‘그쪽은 심지어 배우가 아니라 2세대 아이돌 선배님이 MC를 맡았으니까.’
합숙소에도 자주 방문하고 중간 평가나 연습하는 모습을 견학한다거나, 연습생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주는 등 〈구공드〉는 MC 캐릭터가 분명했다.
심지어 MC는 방송이 종료된 뒤에도 데뷔 그룹이나 솔로 및 새로운 그룹으로 데뷔한 연습생들과 스케줄 중 마주칠 때마다 꼬박꼬박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친목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갔다.
훈훈한 선후배 간의 교류는 사람들에게 호평을 많이 샀지만, 사실 〈데프아〉는 〈구공드〉와 사정이 달랐다.
일단 MC와 연습생들이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는 –연습생 평균을 내어 계산하면 서로 또래까지는 아닐 테지만– 이성 관계라는 점.
그건 무시 못 할 차이였다. 훈훈한 그림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제작진은 MC에게 연습생과의 교류를 많이 요구하지 않았을 거다. 과거 MC 남소리가 연습생들과 거리를 유지했던 것처럼.
‘그렇지만 이번에는 꽤 살뜰하게 연습생들을 챙겼어.’
게다가 아예 콘셉트가 달라졌다.
단정하고 엘리트적인 본인의 이미지에 기반해 ‘MC’스러운 모습만 보이던 과거.
그리고 그 이미지를 ‘연습생 덕질’에 몰두하는 인물상으로 비틀어 ‘1호 후원자’를 자처한 현재.
전에 비해 이번 〈데프아〉는 MC가 더 자주 합숙소에 찾아왔으며, MC와 함께하는 콘텐츠가 많이 편성되었고, MC를 많이 이용했다.
‘이번에도 거리감은 잘 조정했지만, 사실 그게 쉽지는 않았겠지.’
아웃풋은 더 좋았으나 분명 그보다 더 많은 개인 및 제작진의 수고가 들어갔을 테다.
당연히 과거와 현재는 같을 수 없고, 작은 차이로도 나비효과처럼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나는 몇 번 보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출연자 변동으로 발생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워요.”
적어도 MC의 태도 변화에는 내가 영향을 준 것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뭐, 그와 별개로 선배님께서 저나 지상이가 곤란할 때 도와주시기도 했고.”
이건 3차 경연 당시 매니저를 보내 문을 열어준 일.
사실 그때는 웬만한 것은 다 해결된 상황이었지만, 둘보다는 셋이 나았으니 도움은 도움이었다.
더불어 김지상이 전에 지나가듯 이야기한 것. 추가 인터뷰하는 날 선배님과 우연히 마주쳐 대화를 나누었다고.
‘물론 자세한 대화 내용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쯤이야 몰라도 단서는 충분했다.
“그리고 말실수하셨죠. 저는 상태창이 제 비밀의 ‘일부’라고 말한 적 없어요.”
“…….”
“제게 비밀이 더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을까요.”
여기까지가 세 가지 근거.
그리고 보너스 하나 더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저를 ‘정의헌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관공서나 병원 접수처 직원 말고는 없습니다.”
그날의 ‘천사’와 남소리 선배님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알고 있는 것을 전부 털어내자, 선배님은 자신의 미간을 꾹 누르고 침묵했다.
내가 ‘메이크업 받고 오신 거 아닌가’ 생각하기 무섭게 선배님도 화들짝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렇게 허공에 손을 멈춘 애매한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선배님은 곧 내게 선언했다.
“우리 이 이야기 여기까지만 해요…….”
“저 맞혔어요?”
“눈치 본다면서요……!”
눈치 없는 척도 잘한다는 거 역시 아까 말할 걸 그랬다.
바로 직전에 한 말이라서 대충 발뺌할 수도 없고, 나는 시키는 대로 눈치나 살폈다.
그렇지만 무슨 마음으로 주제를 끊어내시는지는 짐작이 어려웠다.
‘당황해서, 아니면 단순히 민망해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선배님이 겉으로는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오늘 이 대화는 비밀로 했으면 좋겠네요.”
“누구에게요?”
“누구든, 남들에게는요.”
“그렇게 할게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남에게 떠벌리고 다닐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그, 그건. 하아……. 나중에 말할게요.”
“묻고 싶은 게 많은데요…….”
말끝을 흐리며 쳐다보자, 선배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검지를 내밀었다.
“……하나만 들을게요. 대답 못 할 수도 있어요…….”
“두 개 안 될까요…….”
“그래요, 진짜 두 개. 더는 안 돼요.”
선배님은 검지 옆에 중지를 펴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애교와 생떼가 통하는 상대라서 다행이었다…….
“하나는……. 제 시간을 돌려주신 그분이요. 잘 계시나요.”
첫 번째 질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잘 몰라요. 노코멘트가 아니라……. 정말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음.”
“하지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간결하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이 생각보다도 복잡했다.
지금 당장은 만나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
“두 번째는……. 그, 눈치 안 보는 질문도 괜찮으실까요.”
“……해보세요.”
“천사라는 건 어느 정도 인원과 체계로 이루어진 집단인가요…….”
물어본 뒤 곧바로 찾아오는 정적에 눈치가 보였다……. 젠장.
질문한 까닭은 간단했다.
알고 있는 것은 많은데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의 신념보다는 어떤 집단의 규율 때문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다만 이번에는 확신을 가지고 살살 긁어본 건 아니고, 작은 의혹을 가지고 우선 질러본 것에 가까웠다.
“이건 대답 못 하는 질문으로 할게요…….”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내듯 개미만 한 음량으로 남소리 선배님이 대답했다.
탈탈 털려 힘이 한 톨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에 나도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더 어쩌겠는가. 대충 열람 권한이 아직은 없는 정보라고 여기기로 했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만족하기로 하자.’
그 ‘천사’ 시스템이 단순 기계나 AI였다면 더 털어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남소리 선배님은 인간 같았고, 사람을 –그것도 나보다 연차 높은 동종업계 선배님을– 더 곤란하게 만들 수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대화를 그쯤 정리했다. 어차피 다음 스케줄이 곧이기도 했다.
“아무튼 오늘 대화 정말 감사합니다. 연락 다시 드릴게요.”
“저 톡도 메시지도 잘 안 봐요…….”
“……저도 매일 연락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어도 둘 다 연예인이고 이성인 이상 나도 조심은 하는데…….
그 말은 굳이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속으로 삼켰다.
‘그러니까, 오늘의 깨달음은 두 가지구나.’
하나, 이 일 오래 하고 싶으면 일회용품 자제하자.
둘……. 〈오렌지 디스크 뮤직 어워드〉, 통칭 〈오디뮤〉.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 + +
이후 며칠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좀처럼 생각에 결론을 맺을 수가 없었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사인하고, 이런저런 논의를 하고…….
그야말로 시간도 품도 정신력도 많이 드는 태스크의 연속이었다.
특히 계약은 아티스트(구 연습생)와의 직접 계약뿐만 아니라 소속사와 소속사 사이의 계약까지 끼어 있어서 엄청나게 복잡했다.
‘내가 봐도 이상한 것 같은 조항은 우리 매니저팀에서 알아서 빨간 줄 그어서 돌리더라고.’
그래도 회사가 이런 일은 잘해서, 덕분에 중간 직원들의 논의를 구경하며 병풍처럼 앉아 있다가 왔다.
그리고 〈데프아〉 시퀄 콘텐츠……. 이건 데뷔 그룹 ‘에이레’ 리얼리티를 KMC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한다고 한다.
덧붙여 〈데프아〉 투어 콘서트는 한국에서 서울, 부산, 광주 찍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를 도는 ‘36인 후보생 콘서트’였다.
방송 콘텐츠는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콘서트였다.
‘인기 많을 때 뽕을 뽑으려고 인간들이 일정을 진짜 타이트하게 잡아둬서…….’
이제 투어 시작이 3주밖에 안 남았고, 한국 공연 예매도 진작에 끝났다.
저 예매는 최근에 끝난 것도 아니고 신곡 미션, 그러니까 ‘3차 데스 매치’ 하기도 전에 종료되었다.
추가 예매를 오픈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서버가 다운되고 전석 매진되었단다.
2차 탈락자 발표로 36명 인원이 나오자마자 콘서트 공지와 홍보를 돌린 KMC도 참 자본에 미쳤다고 할 수 있었다.
“왜 여기 아무도 없니?”
“내가 너무 빨리 왔으니까…….”
하여간 나는 아빠와 캐리어 세 개를 끌고 이고 지고 실없는 문답을 나누며 새 숙소에 이르렀다.
다들 저녁에 온다고 하던데, 나는 출발할 때도 도착해서도 해가 중천이었다.
아빠가 오늘 학교 가는 길에 –대학교수라서 그래 봤자 출근이 느긋하다– 태워준다고 해서 타고 왔더니…….
난방도 돌아가지 않아서 싸늘하고 인기척도 없는 실내에 1등 입주자가 되고 말았다.
“암튼 수고해. 아빠 갈게.”
“어잉~ 파이팅해여~”
그렇게 아빠를 보내드리고, 나는 숙소를 조금 둘러보았다.
〈데프아〉의 인기나, 그에 따른 스토킹 및 사생활 침해 위험에 비해서는 방범이 애매한 집이었다.
‘비교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는 게 스나뿐이라서 그쪽을 계속 생각하게 되네.’
스테리나인 숙소는 아파트인데, 공동현관을 비밀번호가 아니라 지문 입력으로 열고 들어가는 구조다.
그래서 배달음식 받을 때에도 밖에 나가야 해서 사실 귀찮은 것도 많지만……. 장점도 적당히 많았다.
그런데 여기 ‘에이레’ 숙소는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물론 여기가 집값은 더 비쌀 가능성이 높은데, 시설이 영…….’
화장실은 세 개나 있었지만, 샤워 시설은 둘. 부엌이나 거실은 1층에 하나뿐이고…….
아무리 봐도 열 명을 살림 살라고 집어넣기에는 협소한 것 같은 내부였다.
‘식대 한 끼에 팔천 원이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불길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나더뮤직은 연습생 때부터 식비는 다 법인카드로 처리하고, 나중에 영수증 모아서 가져다 주면 되는 구조였다.
밥 먹는 일로 혼난 것도 한이주가 데뷔 다음 해인가, 카드 착각해서 법카로 갈릭 스테이크 9인분 긁었을 때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도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넘어갔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애사심이 막 솟는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궁상맞은 생각을 하며 방과 기본 옵션 가구, 전자제품 등을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두고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으며, 붕 뜨는 시간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은 정했고……. 이제 풀어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돼.’
때가 되어 돌아온, 계획 점검 및 재구성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