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88화
19. Cinema(2)
긴장감이 가파르게 올라간 상황.
그러나 곧바로 1위 후보가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 1위 후보를 발표하기 전에 알려야 할 것이 있죠.
중간에 쉬어 가는 격으로 삽입된 짧은 코너가 이어졌다.
- 바로 데뷔 그룹 이름 공개입니다.
MC 등 뒤의 스크린에 CG 애니메이션이 채워지며, 데뷔 그룹의 로고 그래픽이 재생되었다.
MC는 여유롭고 영상의 움직임은 느렸으나 좁은 자취방의 분위기는 흥분과 불안으로 들끓는 거대한 가마솥 그 자체였다.
띄어쓰기 없이 쓰는 ‘평생레디하겠다는피의연합’ 6명 친구들은 TV는 물론 서로의 소리도 듣지 않고 각자 할 말을 쏟아내었다.
“어떻게 되려고 진행이 이러지?”
“이러면 지상이 10위야? 더 떨어진다고? 오바야.”
“말이 안 돼. 류희재 3위면 누가 2위 할 건데.”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가, 일주일 내내 케이팝을 이야기하는 모든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던 의문을 꺼내놓았다.
“헌이가……. 1위겠지?”
정의헌이 과연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에서 최종 1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팬이든, 팬이 아닌 사람이든 관심을 가지고 말을 얹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누가 1위일 것인가, 그 연습생은 1위를 할 수 있을까.
정의헌은 유력하게 손꼽히는 1위 후보였다.
꾸준히 상위권. 평가가 좋았고 인기가 많았다.
중간에 악마의 편집을 당한 회차에서도 무대만은 호평 일색이었다.
물론 초반 두 번의 탈락자 발표식은 순위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정확한 지표는 알 수 없다지만…….
팬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직캠은 언제나 조회 수 상위권이었고, 댓글이나 좋아요 수도 중하위권과 단위가 달랐다.
“정의헌은 좀 호감픽 아니야? 이제 투표 1명 뽑는데 글쎄……. 최대 2위 아닐까 싶은데.”
투덜거리기와 다 된 밥에 재 뿌리기가 특기인 친구, ‘김빵’이 말했다.
즉시 반박이 쏟아졌다.
“야~ 의헌이 무시하지 마. 호감픽도 우리처럼 하루에 인터넷 10시간씩 하는 사람들 픽이 다가 아니잖아.”
“맞다, 나 이번에 취직했잖아. 그런데 회사 분들이랑 스몰토크하면 〈데프아〉 얘기 되게 많이 나와.”
“나도 주변에 아이돌 같은 거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다는 머글 친구들도 다 〈데프아〉 재미있다고 그러더라.”
그런 사람들은 우리처럼 매일 인터넷 투표는 안 해도 생방송 문자 투표는 할 테니까.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안개는 화면 왼쪽 상단, 프로그램 로고 옆 작게 ‘문자 투표 종료’라고 적혀 있는 배너로 눈을 돌렸다.
‘1위……?’
불현듯 실감이 났다.
온갖 케이팝 팬들이 다 지켜보고, 하루에 몇백 개나 새 기사가 쏟아지는 대히트 프로그램 1위가 정의헌이 될 수도 있다니.
사람이 편안한 면도 있고……. 팬사인회나 퇴근길, 주차장 등에서지만 짧은 말도 몇 번 나눠보아서인지…….
정의헌은 본래 묘하게 인간적인 거리감이 가까운 사람이었다.
안개는 이 순간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그가 낯설게, 멀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두근두근한 거리감이 싫지만은 않았다.
-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니셜 ‘A’와, 어엿한 전사가 된 후보생들의 새로운 출발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Re’를 합성한 이름입니다.
로고가 합쳐지며 완성된 글자는 ‘A:Re’.
글자 가운데의 콜론을 ‘i’ 발음으로 쳐서 ‘에이레’라고 읽는단다.
“데뷔 그룹 이름 ‘안테나’라는 찌라시 있었는데.”
“뭐야……. 싫어. 에이레가 백배 낫다.”
사실 조금은 맥을 끊는 것 같기도 한 이벤트였으나, 난잡한 흐름에도 자취방 인원들은 착실히 감상을 쌓았다.
- 자, 그러면!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에이레’의 킬링파트 담당 멤버가 될, 최종 1위! 그 후보 두 명을 지금 공개합니다!
아주 짧은 침묵 후 1위 후보가 연달아 호명되었다.
- 어나더뮤직 정의헌 후보생.
한 명은 충분히 예측한 결과였다.
- 그리고……. 같은 어나더뮤직, 김지상 후보생입니다.
다른 한 명은, 설마 하며 마음을 졸였던 얼굴.
이름이 불리자 정의헌은 작게 웃었고, 김지상은 감았던 눈을 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길. 김지상의 어깨를 감싸 두드려 주는 정의헌의 손이 있었다.
MC 옆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방송이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자리의 여섯 명 중 누구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초현실적인 광경이 지금 생방송으로 세계 시청자들에게 송출되고 있었다.
“시바아……. 말도 안 돼.”
“진짜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는 참가자 풀이 정말로 좋은 축에 속했다.
첫 대형 보이그룹 서바이벌이었으니까.
〈구공드〉의 출중한 성적을 보고, 출세의 기회를 노리던 재야의 고수들이 모두 지원했기 때문이다.
비주얼도 좋았고, 실력도 꽤 괜찮았고, 캐릭터도 매력 있고……. 웬만한 연습생들은 전부 열심히 했다.
초반에 빌런 노릇을 하다가 자진 하차한 김병석마저도 피지컬이 좋고 편집 혜택을 잘 받아 은근 인기가 있지 않았는가.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출연자 구성에 사람들은 점점 유입되고, 빠져나가지 않았다.
안개는 〈데프아〉 CP라는 사람이 ‘최종회 생방송 시청률 목표는 6%’라고 인터뷰한 기사를 떠올렸다.
‘아니, 그러니까! 저 100명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는데도!’
당당하게 1위와 2위 그리고 6위를 차지하게 된, 자랑스러운 내 가수들.
안개의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울컥울컥 감정이 차올랐다.
그때 MC 남소리가 대본에 적힌 대로 두 1위 후보의 〈데프아〉 내 업적을 간단히 소개했다.
- 김지상 후보생, 저번 발표에서 7위를 기록했는데, 1위가 된다면 무려 6위나 순위가 상승하게 됩니다. 상위권에서의 급등이라는, 아주 어려운 일을 해냈는데요. 그동안 마음고생 할 일이 많았던 후보생이라서 개인적으로는 순위와 무관하게 ‘정말로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 아……. 사실 ‘이쯤 안 불리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위 후보라는, 너무 높은 순위에 이름이 불려서. 지금 조금 마음이 이상합니다. 순위가 공개되어도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모두에게요.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김지상이 또박또박 감상을 말했고, 비슷한 질문은 정의헌에게도 돌아갔다.
- 정의헌 후보생은 달리 말이 필요가 없는 후보생이죠. 촬영 기간 내내 연습생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 트레이너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든든한 존재입니다. 저번 순위는 2위였는데, 더 올라갈 수 있다는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이 유효한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 그러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사실 그때는 방송이라 반쯤 농담으로 재미있는 말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이게 지금 1위 후보로 같은 그룹으로 활동하고, 같은 소속사인……. 아끼는 동생 지상이랑 같이 불리니까 욕심이 또 진지하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쯤 안개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왔다, 스나 언급……. 생방송 짱이네.”
“아, 얘가 이러니까 스나 완전체 무대 너무너무 보고 싶어…….”
“오빠……. 레디 부인들 말라 죽어가요…….”
화면에서 정의헌과 김지상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교차했다.
- 그렇지만 지상이가 1위를 하더라도, 제 일처럼 기쁠 테니까요. 어느 쪽이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의헌은 단정하게 말했고, 듣는 김지상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어떡해, 지상이 울려고 해…….”
“헐. 애기 우는 거 나 처음 봐.”
몇십 초, MC는 순위를 발표할 것처럼 시간을 끌었다.
화제성을 다 잡아먹은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작진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발견하고 다 함께 미친 것 같았다.
- 1위는…….
-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파이널 매치 ‘라스트 맨 스탠딩’, 최종 1위는……!
- 1위 승자는……. 어나더뮤직…….!!
줬다가 뺏는 화법이었다.
“진심 개 빡친다. 어나더뮤직인 거 누가 모르냐고.”
“황당하다 황당해!”
안개의 심장이 터지거나 명이 끊기거나, 숨이 꼴딱 넘어가거나 셋 중 하나 사건이 발생하려고 할 무렵.
- ……어나더뮤직 정의헌 후보생!
폭죽이 펑 터지고, 색색깔의 길쭉한 릴테이프가 허공에 흩날렸다.
효과에 놀랐는지 혹은 결과에 놀랐는지, 정의헌이 크게 어깨를 떨었다.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지고 MC가 소감을 요청했으며, 정의헌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잠깐, 안개는 정의헌이 마이크를 잡는 모습에 넋이 팔렸다.
정의헌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 아, 제가……. 웬만하면 약하거나 어두운 말을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좀 솔직해지고 싶은 날이네요.
감동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다만 기분이 좋을 때 짓는 특유의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차분한 목소리.
- 하지만 그때에도 저는 언제나처럼 새로운 시작을 꿈꿨고, 끝난 일도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사실은 다소 모호하여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그는 추상적이고도 단단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저의 그 꿈, 몽상, 아니면 헛된 고집이나 무모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 가치를 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부 여러분 덕분입니다. 그동안 포기하지 않기를, 그만두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아요. 여러분의 존재가 그 증명입니다.
그는 가족, 연습생들, 그리고 스태프와 회사 직원 등 주변 사람들과 팬덤 ‘꿀벌단’을 빠르게 짚어가며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 다시금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다음에 올 또 다른 시작점까지……. 앞으로도 쉼 없이 달려보겠습니다. 사랑해요.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발표에 안개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만이 몸속에 쌓였다.
- 저도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의헌이 형보다는 짧게 해볼게요.
이어 최종 2위 소감을 말하는, 김지상.
- 저는 정말 오랜 시간…….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늘 있었는데, 〈데프아〉가 제게 깨달음을 준 것 같아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더라고요. 숫자보다는 받은 마음의 양을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지상이 최애인 인원 몇은 김지상에게 화면이 돌아가는 그 시점부터 훌쩍훌쩍 울었다.
- 도와주신 덕분에 이제 저는, 어제의 저보다 오늘의 저를, 내일의 김지상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김지상은 눈물 고인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바탕 1위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마무리되고,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승자 좌석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결말로 치닫는 전개 속, MC가 무대 한가운데에 나서며 정신을 환기하였다.
- 이제 ‘에이레’에 합류할 마지막 멤버, 10위 후보생을 공개할 차례입니다.
열 명 중 이제 한 명,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