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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81화 (81/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81화

17. DDARA(5)

내가 속으로 할 말을 가다듬는 사이, 채호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부러인지 꽤나 가벼운 어조로.

“너는 이런 고민 잘 안 하고 살지.”

녀석은 옆으로 몸을 눕힌 자세로 눈만 들어 나를 보았다.

웃긴 건 그 도발 같은 농담에 어그로가 끌린 나였다.

“나는 원래 평소 살면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

“…….”

“주어진 일이 있으면 하고, 미래의 나를 믿고……. 그런데 조금 과신하고 그래…….”

적절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채호원은 말이 없었다.

나는 헛기침하고, 처음 채호원이 주문했던 ‘해결 방법’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너 16일이랑 17일 중에 언제가 좋아.”

아까 옆으로 치워놓았던 태블릿PC를 다시 가져와, 캘린더를 보며 내가 물었다.

원래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합숙 끝날 때쯤에 알려주려고 했는데, 따져보면 지금이 더 나은 타이밍 같았다.

“16일은 일요일이고, 17일은 월요일. 우리 이번 합숙 끝나는 게 15일 토요일이고.”

“어? 그러면 월요일.”

“오케이, 월요일로. 장소는 이쪽에서 정한다.”

“……무슨 일인데?”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정현이 형 쉬는 날이래.”

황정현, 예명 앤섬. 스픽스의 리더였던 사람이자 탈퇴한 멤버, 현직 사회복무요원 군인.

그리고 나와 가끔 연락하며 채호원과 아직 이야기할 것이 남은 사람…….

“둘이 만나게 해줄게.”

지금 채호원에게는 내 조언보다 그 형과의 대면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채호원은 빨간색 경기도 버스를 탄다며 대학로나 잠실, 그것도 아니면 서울역으로 불러 달라고 했지만……. 약속 장소는 다른 곳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황정현의 자택.

형이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본가인데, 주말부터 며칠 동안은 운 좋게 집이 비어 초대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단다.

다만 위치가 1호선 끝자락이라 채호원은 이동 거리가 짧아졌고, 나는 반대로 도착하는 데 편도 두 시간이나 걸렸다.

‘덕분에 일찍 일어났다. 뭐 이런…….’

무사히 파이널 합숙을 끝내고 느슨해진 내 정신머리에 긴장감을 안겨주는 1호선이었다…….

요즘은 밖에 나가면 힐끔거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진까지 찍으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웬만하면 택시를 타는데, 이번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삼자대면. 채호원과는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 함께 택시를 타고 왔다.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둘이서만 만나라고 할걸.”

“야, 두 시간밖에 안 걸렸잖아. 이래서 서울 사는 놈은…….”

정면에서 핀잔이 꽂혔다. 나를 가운데에 두고 문을 열어준 황정현과 내 옆의 채호원이 합심의 시선을 교환했다.

순식간에 2 대 1로 구도가 형성되려는 것 같아서, 나는 급하게 끊어내고 실내로 들어섰다.

손에 든 흰 종이 상자와 테이크아웃 생과일주스가 담긴 음료 캐리어를 형에게 건네며 내가 말했다.

“제 취향대로 골랐는데, 형 알레르기 없는 거 맞죠?”

“얘 진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정현이 형 견과류 다 드신다니까.”

채호원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스테리나인과 달리 스픽스는 그룹 내에서도 존댓말을 쓴 것 같았다.

사족인데, 이런 건 사실 위에서 내리누르는 게 아니라 어린 쪽이 어려움을 느껴서 말을 잘 못 놓는 거다.

그룹 분위기가 상상이 될 듯 말 듯 했다. 채호원은 웃고 있었지만, 어색한 기류가 없지는 않았으므로.

정현이 형은 받은 것들을 부엌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다 먹지, 그럼……. 이거 박스는 뭐야?”

“호두 파이인데 저희 동네에서 유명하다고 해서 사왔거든요. 좀 큰 걸로 했는데, 남겨서 부모님 오시면 같이 드셔요.”

파이는 가본 적 없는 가게를 엄마 추천만 듣고 선택했고, 주스는 프랜차이즈였는데 둘 다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처음의 분위기도 시답지 않은 안부를 공유하며 떠들자 서서히 풀렸다.

생색 좀 내자면 둘 다 쭈뼛쭈뼛 말을 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것을 내가 MC처럼 어르고 달래며 이끌어줬다.

“생방송 연습까지 했다면서.”

“갈수록 시간을 얼마 안 줘서 힘들더라고요.”

나는 연습이 쉬워지고 편해졌다고 며칠 내내 생각했는데, 채호원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같이 연습한 팀원끼리 손발이 잘 맞기도 했고, 가혹하던 랩 트레이너도 인터넷에서 태도로 욕을 들어먹고 자제하는 게 보였다.

게다가 전보다 제작진이 체계나 사소한 매너 면에서 연습생을 더 존중하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변화였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별말 없이 채호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의헌이랑 정현이 형은 언제 연락했던 거예요?”

“추석 전인가? 좀 된 것 같은데.”

“무슨 추석 전이야, 의헌아. 8월 말이었는데.”

“아~ 맞다.”

가만히 되짚어보니 〈데프아〉 2회와 3회 방송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1차 합숙이 막 끝난 게릴라 버스킹 다음 주, 이영하와 남의 생일 파티 끝나고 면담하기 직전.

날짜를 계산한 결과 한 달 반에서 보름쯤 지난 듯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사이 정현이 형은 머리가 꽤 자랐다.

‘공익은 두발 규정이 없나…….’

황정현은 8월에 나와 둘이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사람이 포용적으로 변했고 온화해졌다.

벌크업이라도 했는지 체격이 더 커져 ‘아이돌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졌는데, 그 빈자리를 전에 없던 소탈함과 느릿함이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데프아〉에서 겪은 일과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죽 하다가 흐름이 황정현의 이야기로 빠졌다.

“아, 처음부터 공익이었던 건 아니구나.”

“그렇게 됐어. 뭐……. 먹는 약이 많아서.”

그게 우리가 갑자기 군인 신분인 사람 집에 와 있을 수 있는 까닭이다.

무슨 심사를 받아서 현역에서 공익으로 전환이 되었다나 뭐라나. 조울증 때문이라고 들었다.

채호원은 이런저런 질문을 계속했는데, 문답을 조합해 보면 채호원은 몇 달 동안 황정현의 소식을 전혀 접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부러 피한 것도 같은데.’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같이 지낸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은 듯– 잘 대화하는 두 사람이었다.

슬슬 진지한 주제가 나오는 흐름 같아서 슬그머니 도망가려고 하니까, 황정현이 넌지시 나를 내리눌렀다.

“의헌아……. 너도 들어라.”

“넵.”

언제 한번 짚었던 것 같은데, 나는 정말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조금 움츠러든다.

한두 살 위면 대충 뭉개보겠는데 정현이 형과는 대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서 더 쪼들렸다.

우리는 황정현이 데려가는 대로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 근처에 적당히 앉았다.

“아, 그게…….”

채호원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나에게 했던 말을 황정현에게도 털어놓았다.

어떻게 말할지 미리 생각하고 정제를 거쳤는지 내게 말할 때보다는 표현이 순하고 덜 감정적이었지만, 의미는 유사했다.

추가된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채호원이 황정현의 탈퇴 이후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같은 것.

황정현은 채호원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이야기가 끝나자 감상을 간추려 말했다.

“호원이가 많이 서운했나 봐.”

“……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미안한 게 있네.”

“왜 그랬어요?”

지나치게 깔끔하여 부실한 감마저 있는 사과에 채호원이 추가 질문을 했다.

황정현은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지만, 낯빛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지.”

“…….”

“내가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잖아.”

서른을 앞둔 아홉수, 스물아홉이면 스테리나인이 해체하고 내가 과거로 돌아온 시기다.

원래 아이돌이 ‘재계약이나 군 복무를 앞두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찍어 먹다가도 도망가는 법이라고 이영하가 그러더라.

‘특히 군 복무는 공백기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원래 ‘아이돌은 25살 넘으면 다 은퇴시켜야 돼’라는 익명의 의견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게 이 세계다.

일례로 내가 지금 신체 나이가 스물셋인데, 너무 나이 들어서 〈데프아〉에 출연했다고 흉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 말이 얼마나 틀렸는지 혹은 얼마나 비주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있으면 인기 얻기 힘든 것은 사실이니까.

‘겪어봤으니까 안다.’

스물아홉이면 역주행의 희망을 걸어보기에도 늦다.

조용한 틈을 타 나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 10월.

10월이었다. 스테리나인이 해체한 그때처럼.

그리고 스물아홉의 나이.

리더라는 직함과 등 뒤의 멤버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정현이 포기한 이유를 나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공감했다.

‘……힘들었으니까, 나도.’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고, 그 영향으로 나는 아직도 팬들에게 고마움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나를 과거로 보내주신 그분은 잘 지내실까.’

남은 것은 내가 들고 온 편지 한 통으로 편지 상자에 넣어두고 지금도 가끔 꺼내어 다시 읽고 있다.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SNS를 살피거나 수소문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추적은 불가능했다.

주소도 없고 이름도 없고, 단서라고 할만한 것도 과거로 돌아오며 전부 사라졌으니까.

‘찾아갈 수도 없고……. 방법은 찾아오게 하는 것뿐.’

그리고 찾아오게 하는 건 찾아가는 것보다 어렵다.

[우리 절대 포기하지 말고 멈추지 말자.]

[우리는 영원히 한 편이니까.]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더 많이 알려지고, 오래 버티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당장 보답에 손을 댈 수 없다면 말씀이라도 잘 듣자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호원아.”

황정현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현실로 끌어냈다.

“나는 내가,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어.”

……음?

“네 입장에서만 보면 어떡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황정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채호원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어째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채호원도 시야가 넓은 편은 아니며 정현이 형이 꽤 뒤끝이 긴 성격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적당히 재회의 기쁨에 취해 서로 감동적인 덕담이나 주고받도록, 분위기로 비벼보려고 했건만 쉽지 않았다.

“잠깐만요…….”

내가 몸을 일으켰다.

혼자 다른 생각이나 하며 소파에 배경처럼 투명하게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텄다.

“저, 되게 현실적이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요.”

“……?”

“저는 호원이가, 그. 좋아하는 형에게 좋은 말이랑 따뜻한 응원 좀 듣고, 묵은 오해도 풀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고 이 만남을 주선했거든요.”

어리둥절하게 양쪽에서 돌아보는 둘 사이로 손 하트를 만들어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 조금 희망적인 말을 해줍시다.”

모임의 개요부터 결론까지 다 밝히자, 하트 왼쪽에서 황정현이 물었다.

“……내가?”

안 되나…….

나는 서로 맞닿은 열 손가락을 떼어내며 대답했다.

“그러면 제가 할게요.”

왠지 대화 흐름이 엉망으로 꼬인 기분이었지만, 셋 다 침묵하느니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컵 바닥에 약간 남은 망고 스무디를 전부 빨아 마시며 나는 황급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봤자 제대로 정리는 안 되어서.

“내 이야기 좀 할게. 스나 얘기도 아니고, 내 얘기.”

결국 내가 꺼내 든 카드는 가장 단순한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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