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76화
16. Monster(6)
김지상은 이번에야말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해보자고 각오를 다졌다.
방송은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고, 더 늦으면 이미지 회복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소속사를 통해서 아무리 입장문에 법적 조치 공지를 띄워도 오해하는 사람은 끝까지 했으니까.
그들이 방송을 통해 오해하게 된 것이라면, 아무렴 방송에 새롭게 보여지는 것이 가장 명쾌한 해결책이기는 했다.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
여기서 데뷔해 새 그룹에 들어가고 싶냐고 하면 사실 그는 그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한계를 보고 시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였다. 김지상은 올라서고 싶었다.
“저, 그러니까…….”
“잠깐! 그전에.”
하지만 김지상의 말은 시작도 하기 전에 김미진 PD에 의해 막혔다.
김 PD는 김지상이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현 상황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사과부터 드릴게요.”
“예?”
“물론 제 사과로는 택도 없으니까, 꼭 진짜 잘못한 놈들 사과도 챙겨 받으셔야 해요. 아셨죠.”
“…….”
김지상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시니컬한 김 PD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조금 움츠러들었다.
정의헌이 바로 어제 ‘김미진 PD님은 협조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표정 관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 사람 뭐야?’ 정도로는 생각하고 있으니까, 같은 편인 줄 몰랐다면 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까.
김지상이 혼란스럽거나 말거나 김 PD는 브리핑을 술술 이어갔다.
“지금도 보시면, 원래는 후반 작업이 제 몫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저희도 며칠 사이 내부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거든요.”
“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권한이 약간 생긴 상태고, 후반 기획에도 이렇게 참여를 하고 있죠.”
“……축하드립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사실 따지자면 일이 많아져서 곤란한 것도 있어요. 그래도 기분은 좋으니까 축하 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김 PD가 웃었다. 며칠 동안 십 년은 감수한 것 같은 피폐한 웃음이었다.
김지상으로는 내막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으나, 그다지 짐작해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문제가 되었던 거 있잖아요.”
“……방송 편집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중에서 사람 매장하는 편집. 이제 안 들어갈 거예요.”
김 PD는 대놓고, 숨김없이 말했다.
김지상은 이렇게 발언에 가감이 없어도 되는 건지 순간 고민했으나 알아듣기 쉬워서 편한 점은 있었다.
‘나는 의헌이 형이 긍정 회로 돌린 줄만 알았는데.’
솔직히 그는 정의헌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을 허풍으로 여기며 때로 답답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김 PD는 정의헌의 추측보다도 훨씬 노골적이고 밑도 끝도 없이 ‘우리는 협력 관계’라고 어필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허윤아 작가까지 표현 수위가 높아질 때만 조용히 흘겨볼 뿐 말을 저지하지는 않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오버해서 말하는 건가?’
김지상은 상대의 마음을 넘겨짚어 생각했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실 김미진 PD는 며칠 잠을 못 잔 데다가 아군 앞이라서 나사가 풀리다 못해 빠진 것뿐이었지만.
“그래서 우리 이제, 어디까지 방송에 넣고 어디서부터 컷 할지 이야기를 해봅시다.”
하여간 상황 소개는 그렇게 정리되었다. 김 PD가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PC를 두 번 탭해 화면을 불러냈다.
김지상은 이때, 김 PD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선수를 쳐서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하려던 말이었으니까.
“다 쓰셔도 돼요.”
“어……. 잠시만, 뭐라고요?”
“저 쓰러지는 장면 그냥 쓰셔도 된다고요.”
김 PD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던 허윤아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일시 정지한 것 같은 정적 끝에 김 PD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 그걸 물어보려던 건 맞는데요, 허, 참…….”
“혹시 준비해 오신 게 있으면 들을게요.”
“아, 그래요. 그 얘기부터 할게요.”
김지상은 이미 마음을 굳혔지만, 김미진 PD가 설명하는 영상 사용 방침과 규약 따위는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들었다.
사전에 허락부터 받아두는 절차라서 제작 사정에 따라 실제로 방송에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고, 만약 사용하더라도 흐리게 처리하거나 화면을 돌려 직접적인 그림은 피할 예정이란다.
구구절절할 정도로 서류와 예시 등을 가져와 말해주는 김 PD의 태도에 김지상은 생경함을 느끼면서도, 존중받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김미진 PD는 김지상에게 허락의 까닭을 묻지 않았다. 김지상도 별로 모든 사연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카메라 너머 사람들에게도, 김 PD에게도. 어떤 비밀은 마음에 묻고 살 생각이었다.
다만 그는 손에 쥔 모든 수단을 이번 일에 걸어볼 의향이 있었다.
‘걸지 않느냐, 거느냐.’
그는 조금 전 남소리의 격려를 회상했다.
그래, 선택.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선택이었다.
김지상은 이제까지 아이돌이 되기로, 어나더뮤직이라는 소속사에서 데뷔하기로, ‘스테리나인’ 그룹 멤버들을 받아들이기로 직접 결정했다.
그리고 이미 데뷔한 아이돌의 신분으로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방송 출연을 선택했다.
또한 자신의 약점까지 수백만의 대중 앞에 내보이는 것도, 약점을 내세워 이미지를 전환하는 것도 선택일 것이다.
‘아, 김미진 PD를 조력자로 고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김지상은 자신의 의지로 정의헌의 선택을 신뢰하기로 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가 말했다.
카메라가 돈다.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 *
인터뷰가 종료되고, 방송국 스튜디오를 나오는 길.
시월 초였지만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하게 변해 있었다.
김지상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핸드폰 지도 어플로 집까지 가는 가까운 길을 알아보았다.
빨간 직행좌석버스를 타고 마을버스로 갈아타는 방법도,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도착 시각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 집안이 어떤 모습일지도.
‘……가지 말까?’
집을 생각해도 좀처럼 평화로운 풍경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 드는 충동에 그는 허리를 펴고 방송국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지하철역을 내다보았다.
짧게 생각했다.
집이 아니어도 갈 곳은 있었다.
직장인의 퇴근 시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지상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뭐…….’
오늘이 가기 전에 그는 한 가지 더 선택을 한다.
저를 괴롭히는 이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뭐 어때.’
스테리나인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 그는, 군중의 틈바구니에 끼어 생각했다.
어떤 회피는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고.
김지상은 미처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머릿속에 막연히, 어디에도 가지 않고 멤버들과 함께하는 그림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데.’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그래서 그 상상대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살고 싶었다.
‘이게 맞는 거야.’
그가 욕심이 되어가는 다짐을 조용히 마음에 새기던 그 무렵.
지하철이 출발하며 손잡이를 잡은 사람들이 일시에 옆으로 흔들렸다.
모두 휘청였지만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간격을 두고 선 사람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 + +
금요일은 김지상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고, 〈데프아〉 9회 본방송 당일이었다.
김지상은 퇴원 이후로도 집에 가지 않으며 숙소에 머물렀다. 숙소는 멤버들의 입국이 아직이라 두 채 모두 빈집이었다.
김 씨 가족 사이의 대화가 잘 안 되었을 수도 있고, 연락을 아예 나누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듣자 하니 주중 낮에 본가에 아무도 없을 때를 틈타 노트북이나 옷가지 따위의 필요한 짐은 가져왔다고 하는 것 같았다.
‘굳이 힘들여가며 같이 있을 필요는 없지…….’
가정사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애가 지금 스트레스를 느낀다는데 말 얹기도 좀 그래서 내버려 두고 있다.
[생일 축하해 우리동생 이따가 점심때 보자 ㅋㅋ♥]
[스테리나인 김지상: (다람쥐 캐릭터가 하트 던지는 이모티콘)]
자정이 조금 지나 톡으로 생일을 축하해 주며, 나는 오후에 안승준을 데리고 숙소에 가기로 지상이에게 약속했다.
김지상과의 일대일 톡방에는 주중에 내가 몇 번 보낸 안부 인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대부분 ‘누가 너 건강 상태 괜찮은지 물어보더라’ 하고 내가 보낸 톡이었다.
걱정은 되는데 직접 묻자니 김지상과 사이가 애매한 녀석들이 자꾸 내게 안부를 물어와서, 사랑의 메신저 활동 좀 했다.
“내 생일에도 이렇게 해줘야 된다?”
늦은 점심으로 김지상 소원이었던 육전덮밥도 먹고, 근처 베이커리에서 홀케이크도 사서 숙소로 들어오는데 안승준이 말했다.
안승준은 10월 12일생으로 김지상과 겨우 닷새 차이를 두고 태어났다.
“그때 우리 또 합숙 아니야? 핸드폰 막 뺏기고.”
“우리가 일 등으로 축하해 줄 수는 있겠다.”
김지상이 부정적인 코멘트를, 내가 긍정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좌절한 안승준은 덤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적당히 집 정리를 하고, 하루 자고 가기 위해 옷도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TV 앞에 모였다.
“어, 아직 광고 나온다.”
“빨리 불 꺼. 촛불부터 불자.”
이후에는 허겁지겁 움직였다. 광고 시간을 틈타 안승준이 불을 끄고 내가 성냥으로 촛불에 불을 붙였다.
생일 노래는 원래 멤버들이 모이면 아카펠라로 부르는데 사람이 많이 빠져서 그냥 합창이 되었다.
“소원 뭐 빌었어?”
“안승준 길 걷다가 넘어지게 해주세요.”
“어? 너 내 생일 때 보자.”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한 접시씩 잘라 들고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TV를 켜면 어느덧 방송 인트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저께 추가의 추가 인터뷰로 스튜디오에 불려갔다 온 안승준이 괜스레 웃었다.
“이게 뭐라고 떨린다.”
“떨릴 일이긴 하지?”
인터뷰 현장 분위기와 주고받은 내용을 근거 삼아 추리해 보면, 편집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도 편집 완성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지난 방송 내용을 요약 소개하는 인트로가 지나간 뒤 방송은 ‘3차 데스 매치’를 조명했다.
‘생각보다 미진 PD님이 권한을 많이 받으셨나 본데.’
진행 자체도 속도감이 있었고, 정석보다는 참신한 편집 스킬을 이용해 전개 흐름 또한 세련되게 느껴졌다.
방송을 여러 번 챙겨본 입장으로는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에 나는 순식간에 영상에 몰입하게 되었다.
무대 편집이야 누구 담당인지는 몰라도 원래 꾸준히 퀄리티가 좋았고.
문제의 〈TOUCH〉 퍼포먼스를 담당한 ‘아미고’ 팀은 방송 시간의 끝자락에 전파를 탔다.
여섯 팀 중 마지막 순서.
여느 때처럼 방송은 무대 전 연습 및 준비 과정을 먼저 소개했다.
[리더 정의헌 후보생의 주도로 진행되는 편곡 회의]
연습실에 모인 팀원들의 모습과 자막이 화면에 나타난 순간.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놀라서 포크를 씹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