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75화
16. Monster(5)
김지상도 남소리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남소리가 〈데프아〉의 MC라서, 몇 개월 동안 촬영으로 만난 인연과 별개로 그녀는 본디 유명 인사였다.
‘대세 연예인이니까.’
남소리는 20대 중후반의 젊은 배우로, 작년 온갖 연말 대상을 휩쓴 로맨스 사극 드라마 〈춘향열애사〉의 원톱 주연 ‘성춘향’ 역을 맡아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개인적인 기부 행위라든지 봉사 활동 등의 꾸준한 선행으로 대중적인 이미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말이다.
한마디로 대형 프로젝트의 메인 MC를 맡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연예인.
‘오히려 선배님 체급이 더 큰 느낌…… 일지도.’
남소리가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은 춘향 외에도 ‘부잣집 아가씨’, 기자, 아나운서 등의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역할이었다.
단순히 ‘MC’라면 어울리지만, 남자 아이돌 오디션 서바이벌 방송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모든 우려와 달리 남소리는 프로그램 시작부터 막바지까지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좋은 분 같기는 한데.’
그는 태만하지도 않고, 아이돌 연습생들을 깔보지도 않았다.
사전 조사는 프로페셔널했고 연습생들과도 잘 지냈으며 현장 경연 관객 앞에서도 분위기를 잘 살렸다.
게다가 비하인드에서는 실수하거나 농담을 하거나 연습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친근한 캐릭터를 얻었으니…….
더러는 ‘남소리의 매력을 〈데프아〉를 통해 알았다’거나, ‘〈데프아〉는 남소리의 재발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색해…….’
연습생이 MC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그림을 원하던 제작진 덕에 김지상도 몇 번 남소리와 대화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없는 장소에서, 사적으로 남소리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예기치 못한 일대일 만남이라니.
“저……. 괜찮으세요? 제가 혹시 불편하게 한 거라든가…….”
“그,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김지상이 화들짝 놀라 인사를 받자, 남소리는 한 칸을 띄우고 김지상의 옆자리에 앉았다.
긴장으로 어깨에 힘을 주는 김지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소리는 질문을 이어갔다.
“……몸은 어떠세요?”
묻는 목소리는 김지상만큼이나 작았는데, 그래서 김지상으로서는 의아한 점도 있었다.
그렇게 사교적이거나 밝은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어오는 것인지.
단순히 MC 역할의 연장선으로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인지, 혹은 다른 듣고 싶은 말이 있는지.
“어, 음……. 이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인터뷰로……. 오신 건가요?”
“네, 그날 했어야 되는데 마무리를 못 해서요. 선배님은요?”
“저는 나레이션 녹음 때문에……. 곧 갈 것 같아요.”
그래도 두 사람은 대화했다. 서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의례적인 안부가 몇 마디 더 오갔다.
자신보다도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남소리를 보고 김지상이 반대급부로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그리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서 새로운 대화 주제를 끄집어내기도 했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경연하던 날 매니저님께서 저희한테 와주셨잖아요.”
예컨대 며칠 전 남소리의 매니저를 만났던 일. 그가 잠긴 문을 밖에서 여는 것을 도와주었으니까.
촬영 마무리 후에 구출을 간접적으로 부탁한 남소리에게도 인사를 하러 간다는 것이 사고 때문에 무산되지 않았나.
김지상은 대신 지금 남소리에게 감사를 전하며, 상대가 궁금해하는 사건의 자초지종도 대충 설명해 주었다.
‘관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잠긴 방에 들어갔다’고, 정의헌이 매니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서.
“다행이에요. 그때 다치지 않고, 무대도 잘 끝내서.”
“그……. 무대는 괜찮게 보셨을까요.”
“멋있었어요. 무리한다는 느낌도 없어서……. 상태가 그렇게 나쁜지 사실 몰랐어요.”
그녀가 꾸밈없는 감상을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제법 김지상이 듣고 싶어 하던 평가였다.
“……충분히 데뷔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상 씨는.”
“아. 감사합니다.”
“주변 분들도 그렇고요. 잘하시니까…….”
“주변……? 아.”
스테리나인 멤버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김지상의 ‘주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말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져서인지, 그다지 불편하게 들리는 질문은 아니었다.
김지상은 짧은 고민 끝에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좋은 형이죠. 안승준도 착하고, 다 착해요.”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는……. 혼자 활동하다 보니까.”
“단체생활은 단점이 더 많기는 해요. 멤버들은 착하지만…….”
‘멤버들’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해 보거나 생각해 본 것은 다소 오랜만인 듯싶었다.
사실 김지상으로서는 아직까지도 어색한 멤버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어색한 멤버도 사람이 싫지는 않았다.
잘 다가와 주는 멤버는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켜주는 멤버는 존중을 받을 수 있어 편했다.
안승준과는 〈데프아〉를 겪으며 부쩍 친해졌고, 원래 가장 죽이 잘 맞는 멤버는 서난영이었다. 이영하의 섬세한 배려는 늘 고마웠으며, 강주찬과는 룸메이트이기도 하고 깊은 대화도 여러 번 나누어 다른 의미로 친했다.
한이주는 성격이 밝아서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좋았고, 막내인 서드림은 그저 귀여운 데다가, 어색함의 장본인 천진섭하고도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정의헌은.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 명씩 사유를 붙이면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그룹이었다.
오늘 이 순간 김지상은, 여전히 스테리나인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저도 깊게 오래 사귀는 스타일이에요.”
“……저는 오래는 모르겠고, 깊게라면…….”
김지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테리나인 아홉 명 중에서도 내향적이기로는 1, 2위를 다투는 김지상이었다.
〈데프아〉를 통해 친해진 사람도 연결 다리가 존재하는 채호원이나, 원래 같은 그룹에 아는 사람이었던 안승준 정도니까.
연락처를 교환한 사람이라면 많았으나 그 뒤 따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정말이지 손에 꼽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교적이지 않고 친구가 없다는 것은 절대 자랑이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잘 지내요.”
그래도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말해보기로 했다.
“아까 말한 멤버들도 그렇고, 그. 선배님께서도 도와주셨고요…….”
우여곡절이 상당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은 잘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도 슬슬 정신을 환기해야만 한다고, 김지상은 생각했다.
남소리가 고개를 갸웃이 기울였다. 공을 이쪽으로 돌릴 줄 몰랐다고 말하는 듯한 낯이었다.
김지상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친분도 없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이건 비밀로 할 거야. 적어도 지금은.’
그는 겁을 먹으면 달아나는 사람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몇 번의 악의가 그를 할퀴고 지나갔는지 모른다.
김지상은 고되고 지쳤으며 때때로 치욕스러웠다.
가끔은 지금까지 얼마나 쌓아오고 노력해 왔든 다 그만두고 싶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불안스레 걸을 바에는 차라리 그냥 멈추자, 포기하자, 마음먹는 순간이 오지 않는가.
그는 불안했다.
하지만 기어코, 포기하자는 결정은 하지 않았다.
‘조금만 상황이 달랐다면, 이번에도 회피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많았기에.
그들을 이제 그가 똑바로 인식했기 때문에.
‘어깨 힘 빼고, 생각을 비워.’
두 손으로 붙잡혀 눈을 마주 보았기 때문에…….
김지상은 넘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힘낼 수 있게 해주셔서요.”
김지상은 단순하고 불분명하게 상황을 간추려 남소리에게 말했다.
번아웃이나 우울이라고도 진단할 수 있었지만, 그런 노골적인 단어는 일부러 피했다.
자기 객관화가 어느 정도 된 이제는 전만큼 무기력하지 않았으므로.
“흐음…….”
남소리는 명확한 대답 대신 콧소리를 내었다.
눈으로는 김지상이 아닌 허공을 바라보는 채였다. 초점이 모호한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더블 클릭을 하는 것처럼 불현듯 눈을 두어 번 빠르게 찡긋이기도 했다.
‘이거 어렵네’라고 입속말로 뇌는 목소리가 김지상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했다.
‘뭐지?’
김지상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남소리의 매니저가 ‘남소리는 신기가 있다’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다만 김지상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신내림처럼 극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옆에 앉은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대화 도중 핸드폰을 보듯, 다른 일에 신경이 팔린 느낌.
“남소리 선배님?”
“아.”
김지상이 조심스레 부르자, 남소리가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죄송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네? 네. 괜찮아요.”
“그런데, 음……. 제가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남소리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볍게 손뼉을 친 뒤 말했다.
“저는……. 김지상 씨가 도움받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
“예를 들어서, 조언 같은 것도 그렇잖아요. 말해주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어렵잖아요.”
목소리에서 신중한 감정이 흠뻑 묻어나왔다. 김지상은 말을 아끼며 잠자코 들었다.
“주변 사람을 얼마나 의지하고, 그 사람과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지는 본인 선택이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자칫 상투적이게 들릴 수 있는 격려였다.
“제 말은……. 잘하셨다고요.”
“아…….”
“김지상 씨도 ‘내가 잘 선택했구나’ 하고 뿌듯해하셔도 될 것 같아요. 힘이 나서 상황이 좋아졌다면요.”
그런데도 말에 담긴 마음의 온기가 꽤 가까이 와닿았기 때문일까.
김지상은 굳이 그 말을 속으로 헐뜯거나 냉소하지 않기로 했다.
“PD님 오시네요.”
그때 남소리가 김지상의 등 뒤를 향해 눈짓했다. 말마따나 김미진 PD가 두 사람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남소리를 따라 김지상도 기립했다. 어느덧 대화를 정리해야 하는 때.
김 PD는 남소리와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김지상에게 말했다.
“아이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바로 안으로 들어갈게요.”
“아, 예.”
손짓하는 김 PD를 따라가기 전에, 김지상은 남소리에게 잽싸게 인사를 남겼다.
“저, 감사합니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화이팅. 할 수 있어요.”
남소리가 작게 웃었다.
* * *
실내에 마련된 인터뷰 공간. 김지상은 풀렸던 정신이 다시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는 넓지 않았다. 〈데프아〉 촬영 초반에 사전 인터뷰를 했던 회의실만 하거나 그보다 약간 작은 듯싶었다.
카메라는 두 대, 스태프 세 명. 그것도 김미진 PD와 허윤아 작가, 보조 카메라를 다루는 젊은 스태프 한 명이었다.
세 사람에게 따로 인사한 김지상이 카메라 앞에 놓인 의자에 앉자, 김 PD가 메인 카메라 위치를 직접 조정했다.
“촬영 전에 이야기부터 같이 해볼게요. 편집 방향에 대해서.”
김 PD의 말에 김지상은 조용히 심호흡했다.
자신을 곧이곧대로 보는 새까만 카메라 렌즈가 묘한 압박을 주었다.
‘할 수 있어, 말하자.’
그러나 그에게는, PD가 직접 방송에 관해 논의하자고 하는 이때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