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74화 (74/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74화

16. Monster(4)

나는 안승준에게 조금 더 설명해 주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의사는 알렸잖아.”

“그 작가님하고 말했다는 거?”

“말도 했고……. 녹음도 공유해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내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머리를 굴리기 위해 이번에는 선을 그어보았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과 우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으로.

후자는 이미 물 위로 드러났으니……. 나는 전자의 존재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방송 제작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일선에 나서고 싶지도 않고, 만약 나서더라도 그림이 이상해지지 않나.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대신해 줄……. 즉 역할을 나눠 수행할 사람을 찾기로 했다.

좋게 말하자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사악하게 말하면 능력 있고 내가 이용 가능한 사람을.

‘그런 사람이 없을 리는 없으니까.’

아무리 세상에 나쁜 놈이 많아도, 정말 나쁜 놈만 존재하면 체계가 유지가 안 된다.

아무리 KMC여도 선량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적어도 나와 얼굴 맞대고 소통하는 스태프는 대부분 악의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소시민이었다.

‘실제로 KMC 이슈가 터졌을 때, 내부고발자 수도 장난 아니었지…….’

그러므로 그중에서 괜찮은 대상을 물색해야 했다.

‘아, 웬만하면 나와 어느 정도 소통이 되고, 말단이 아니라 발언권이 있는 사람으로.’

조건을 하나하나 세워 소거법으로 계산해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허윤아 작가였다.

전에 우리에게 윗선의 말을 전한 –하차 권유를 한–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고, 앞뒤를 추측해 보니 그때의 통화 녹음도 가지고 있을 듯하여 호기롭게 질러보았다.

예전에 잡담할 때 정식 인터뷰가 아닌 통화도 꽤 정확히 발췌해 말씀하던 것을 기억하고 허세를 부린 셈이다.

물론 방송 작가는 업무 특성상 제작, 그러니까 돈 대고 완성물을 포장하는 일에는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윤아 작가님을 설득하면 미진 PD님도 따라올 테니까.’

김미진 PD.

과거 OTV와 KMC가 충돌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 KMC의 비리라는 새로운 이슈를 밀어 넣은 장본인이다.

정확히는 공론화를 추진한 모임인지 조합의 일원이었는데, 그 모임 멤버 중 내가 아는 사람이 미진 PD님뿐이어서 말이다.

‘일이 커져서 팀 활동을 하지 못한 데뷔조 입장에서는 원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최종 데뷔 그룹이 흩어지기를 바라는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앞으로도 싫어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원인 제공자는 미진 PD님이 아니라 책임 안 지고 튀어버린 K14엔터테인먼트기도 하고.

어쨌거나 허윤아 작가와 김미진 PD는 듀오라고 해야 하나……. 대충 말해서 한 팀이니까.

듣자 하니 고등학교 시절 선후배 사이라던데 그때부터 친했는지, 나중에 친해진 건지는 또 모르겠다.

하여간 허윤아 작가와 김미진 PD, 그 둘만 있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이 나올 거다.

‘첫째는 계산, 두 번째는 신뢰.’

사람은 내가 골랐지만, 움직이는 것은 그들 몫이었다.

나는 ‘부탁’했고 부탁에 강제성은 전무했다.

‘강제해 봐야 좋을 게 없지.’

내가 정치질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게 우호적인 사람에게 협박을 해봤자 손해뿐이다.

지금은 내 편인 사람들이 충분히 활개 칠 때까지 시간을 두고 보는 게 맞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무섭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나는 핸드폰을 끌어와 문자 내용을 눈으로 훑듯이 읽고 안승준에게도 보여주었다.

“잘 진행될 수도 있겠어.”

추가 인터뷰를 위해 오늘 낮이나 저녁에 스튜디오로 와줄 수 있냐는 허윤아 작가님의 연락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자를 읽어낸 안승준의 낯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승준이는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본인 핸드폰을 가져와 알림을 확인한 뒤 말했다.

“나한테는 안 왔는데.”

“나만 부른 건가?”

“지상이한테도 뭐 온 거 아니야?”

“쟤는 오늘, 내일은 안 돼. 병원부터 가야지……. 네가 같이 좀 가줘라.”

가는 길에 둘이 할 얘기 있으면 하고 그래. 내가 덧붙였다.

승준이가 멋쩍은 듯 핸드폰을 다시 손에서 놓았다.

“엄청 잘 챙겨주네.”

“왜, 질투 나냐.”

“뭐래? 형이 언제부터 이랬나 싶어서.”

갑작스러운 궁금증이었지만, 그다지 정곡을 예리하게 찌르는 의문은 아니었다.

나는 딱히 시간을 되돌아와서 사람이 변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애들 제대로 챙기게 된 것은 아마 데뷔 직전 즈음부터였을 거다. 그전에는 성격 파탄이었고.

“우리 데뷔 전에 엄청 버스킹하고 다녔을 때 있잖아.”

다시 말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혹은 나이 먹어서 서서히 태도를 고쳐먹은 게 아니다.

계기가 있었다.

스테리나인은 데뷔 전 프로모션 활동으로 서울 곳곳을 돌면서 버스킹을 했고, 버스킹의 주 콘텐츠는 댄스 커버였다.

우리는 익숙한 케이팝 히트곡이나 소속사 선배 아이돌 노래를 틀어놓고 지나다니는 시민들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언제 신촌에서 하는데, 엄청 비 올 것 같았던 날 기억나?”

“어, 알 것 같은데. 그날…….”

안승준이 말끝을 흐렸다. 기억이 나는가 보다.

그날 멤버 중 하나가 안무 실수를 했고, 큰 동작은 아니었지만 대형 문제로 눈에 잘 띄었다.

문제는 내가 뒤로 도는 자세를 하고 있어 그 순간 녀석을 발견한 것이다.

본인의 실수를 깨달아 ‘헉’ 하는 얼굴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긴장 때문인지 녀석은 이후로도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날 버스킹은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마무리되었다.

궂은 날씨에 낮 시간이라 실수하는 영상이 널리 퍼지거나 인터넷에 업로드되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만 내가 그날 밤 걔를 따로 불러내서 화를……. 조금 많이 냈다.

열심히, 잘하고 싶었는데 결과물이 따라주지 않자 분하고 무안했다.

게다가 마음이 초조해져 피드백만 해야 할 때 감정까지 분출해 버리고 말았다.

내 실수였다.

“……그날 한이주 울리고 새사람이 되기로 했다.”

“우와~ 나쁜 남자.”

안승준이 이상한 추임새를 넣었다.

“나 진짜 그 이후로 반성하고 너희들한테 화 안 내고 살잖아.”

한이주는……. 나보다 세 살 어리고, 스테리나인 막내 두 명 중 생일이 빠른 쪽이다.

이영하랑 같은 메인보컬인데, 영하가 스킬과 연구를 중요시한다면 이주는 감각과 개성을 따르는 타입이다.

보이스 톤도 영하가 얇고 높아 여성 음역대를 넘나든다면 한이주는 허스키하고 파워풀한 스타일.

사람 자체도 자유롭고 유쾌하며 긍정적인 영혼이다.

성격이 둥글둥글 수더분한 데다가 예민한 것이 없어서 어떤 의미로는 내가 제일 편하게 대하는 멤버기도 하다.

물론 얘도 노래를 잘하는 만큼 (신이 밸런스 조정을 했는지) 춤이 애매하다는 단점은 있다. 키가 커서 그렇다.

하지만 아이돌 중에 춤 잘 추는 사람은 많고 노래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므로 우리가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긴 데뷔하고 나서는 분위기가 좀 변했지.”

승준이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의식해서 노력했으니까, 당연하다.

‘나도 짜증 나고, 나도 슬프고 속상하다고.’

‘…….’

‘그렇게 화 안 내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꾸 그래.’

마냥 밝은 줄 알았던 한이주는 그날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걔 나이가 그때 열여덟이었다. 그래서 감정적이었고 솔직했으며 가감이 없었다.

나도 그 엇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에 시야도 좁고 깨달음도 얻었던 거겠지만.

아무튼 요점은 걔가 평소에는 진지한 구석이 전혀 없는 애고, 그래서 그때 나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딩동.

흐물흐물한 과거 회상에 겹쳐 숙소 공동현관 방문 알림음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을 보니, 일찍이 주문해 두었던 음식을 들고 온 배달 기사가 건물 밖에 서 있었다.

“대답 됐으면 김지상이나 데리고 나와.”

나는 밖으로 나서며 승준이에게 신호했다.

* * *

다음 날, 입원 검사 뒤 퇴원 당일. 김지상은 핸드폰으로 문자를 한 통 받았다.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제작진 허윤아 작가로부터 온 문자였다.

상태가 괜찮은지 묻는 안부 질문 뒤에는, 다음 방송의 추가 인터뷰를 위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KMC 녹화 스튜디오에 방문해 줄 수 있는지 의사를 묻는 내용이 이어졌다.

정의헌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안승준에게도 비슷한 연락이 도착했다는 말을 김지상도 언뜻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들고 왔던 종이 쇼핑백에 겉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나오며, KMC 스튜디오까지의 거리를 검색해보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걸으면 사오십 분 남짓 소요되는 거리.

‘바로 갈까.’

검사 결과 건강한 편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하고, 오늘 예정된 일정도 달리 없었으니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귀찮기에 웬만하면 한 번 외출하는 김에 모든 일정을 끝내고 싶은 그였다…….

결심을 세운 김지상은 수신 문자에 빠르게 답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지금 바로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1시간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곧 허윤아 작가의 수락 대답이 돌아왔다. 앞선 촬영을 마무리 중이니 조금은 천천히 와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적당히 스케줄 고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려둔 뒤, 김지상은 지하철역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루 핸드폰을 보지 않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번갈아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문자 메시지 수십 개가 도착해 있었다.

메시지는 대부분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말썽을 부린 것을 비난하는……. 저주의 말이었다.

원색적인 단어로 범벅이 된 글을 미리 보기로만 두어 줄 읽고 김지상은 알림을 지웠다.

‘쯧.’

그는 혀를 차고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간헐적으로 불특정한 시선이나 카메라 렌즈 빛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무시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무시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 감정을 느껴도 무던한 척.

그런 것들이 피곤하기는 했으나 무엇이든 깊이 느껴 흔들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김지상의 냉소는 토막적인 피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이십 분은 걸릴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이십오 분쯤?”

“그러면 저기 밖에 앉아 있을게요. 끝나면 불러주세요.”

이런저런 입장 절차를 마친 후 그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스튜디오 옆 3인용 장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병원 화장실에서 대충 헤어스타일과 피부 등을 정리하고 온 터라 삼십 분에 가까운 시간이 붕 떴다.

허윤아 작가가 ‘굳이 그날 스타일 그대로 나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가죠’라고 말해 더 꾸미기도 애매해, 그저 멍하니 앉아 있던 그때.

눈을 땅에 고정하고 있던 김지상의 시야에 누군가의 신발이 침범해 들어왔다.

굽이 있고 앞코가 동그란 갈색 앵클부츠였다.

‘……?’

시선을 올려서 보면 익숙한 얼굴이.

“그, 안녕하세요.”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여성은,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의 MC, 배우 남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