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71화
16. Monster(1)
물론 박 부장은 겨우 이런 ‘사소한’ 논란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소속사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 이미 성립된 계약은 굳건해 깨지지 않을 테니까.
김미진 PD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흐름을 잡은 것에 우선 만족했다.
박 부장이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림이 이러니 남들 눈에는 ‘박 부장은 불쌍한 피해자고 김 PD는 미친 망나니’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 김 PD는 문득 생각했다.
“미진 씨, 말이 지금 너무 거칠어. 릴렉스부터. 어?”
“상황이 급한데 지금 말투가 중요해요? 까놓고 얘기합시다. 우리 지금 꼬리 잘라야 돼요.”
김 PD는 릴렉스하는 척을 해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드라마는 애들 데리고도 뽑을 수 있어요.”
‘어나더즈’ 셋과 얽힌 소재거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방송에서는 아직 세 명이 서로 친하다는 것조차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제작진이 일부러 그들을 연결 짓지 않으려고, 셋 혹은 둘씩의 관계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제작진은 세 사람의 연결고리를 투명하게 흐려놓고 싶어 했다.
“이제라도 관계 조명하고, 그 애들 띄워요.”
“허…….”
“안 띄워도 어차피 최소 한 명은 데뷔할걸요. 투표 수에 손대지 않는 이상.”
‘데뷔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매니지먼트 측의 고집이었다면, 〈데프아〉 제작진은 ‘캐릭터 이미지’를 신경 쓰는 쪽이었다.
이미지를 신경 쓴다는 건 곧 방송 외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방송계의 그 억지 관습을 김 PD는 모르지 않았다.
‘남이 만든 스토리는 사용하지 않겠다. 우리가 최초가 되겠다, 그게 방송 제작자의 자존심 아니겠어?’
〈데프아〉 방송 전에 만들어진 아이돌의 성격이나 관계 따위는 그들에게 방해 요소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경력직’ 연습생을 띄워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이 가진 재료를 신선하지 않게 여겨서.
K14엔터테인먼트 입장과 KMC의 입장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 처음부터 달랐다.
‘하지만 자존심 위에 돈이 있으니까.’
‘어나더즈’ 연습생들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은 이상, 그리고 그들이 이슈의 중심이 된 이상.
〈데프아〉 제작진들은 그 셋을 적대시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김미진 PD가 아니더라도, 그의 동료는 이제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인기 많으면 밀어줘야지…….’
인기가 많다는 것은 팬덤이 크다는 말, 그리고 팬덤이 크다는 것은……. 조회 수나 이런저런 판매 수익이 높다는 말이다.
KMC는 추후 데뷔 그룹 리얼리티나 부가 콘텐츠가 가져올 수입 역시 내다보아야 했다.
……KMC가 돈방석에 앉아도 PD는 월급쟁이라 여느 때처럼 가난할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요약: 이제 데뷔 경력이 있는 연습생들을 살려두는 게 〈데프아〉 제작진에게도 이득이다.
정확히는 정의헌과 안승준, 김지상을.
‘박 부장도 이 계산이 안 되는 것은 아닐 텐데.’
대체 왜 박 부장은 시선을 바꾸지 않는가.
김 PD는 누가 박 부장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매니지먼트 회사.’
만약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은 회사 K14엔터테인먼트에게 경력직 연습생을 거부해야 하는 방송 외적 사유가 있다면?
그들은 그래서, 인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데뷔 그룹에 ‘어나더즈’ 세 사람을 잘라내고 가야 한다면.
‘……이 쓰레기, 뭐 받았구나!’
그래서 매니지먼트 회사가 사기를 치든 비리를 저지르든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한배를 탔으니까. 매니지먼트는 잘라낼 수 있는 꼬리가 아니라, 박 부장의 몸통 일부이니까.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가까스로 내려 앉히며 김 PD는 박 부장을 불렀다.
“너무하시네요, 부장님.”
“너무하기는. 미진 씨도 이해를 좀 해야지. 다 협업이니까.”
“이해는 하죠. 저 협업도 해요. 그런데요…….”
지금이야말로 마음속에 고이 아껴두었던 카드를 꺼낼 때였다.
“그런데 부장님은, 올해 2월 마지막 주였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보다 더 준비한 뒤 박 부장 코앞에 들이밀어 주고 싶었지만…….
더 기다려 봤자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올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김 PD는 목소리를 낮추어 질문했다.
“역삼역에는 왜 가셨어요?”
뚜벅, 뚜벅. 신발 밑창과 바닥이 느리게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김미진 PD가 박 부장에게로 다가갔다.
눈이 계속 마주쳤다. 박 부장보다 십 센티미터는 작은 김 PD였지만, 그는 올려볼지언정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려워 유지했던 안전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공포를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두렵든 아니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김 PD는 떳떳했기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 태도 때문일까. 몸집의 대소나 권위의 상하와는 거꾸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김 PD가 박 부장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관전 중인 후배들이 듣지 못하게, 김 PD가 박 부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삼역 화이트가라오케요.”
말을 꺼내고 김 PD가 한 보 뒤로 떨어졌다. 박 부장의 얼굴이 물감을 푼 것처럼 벌겋게 물들어갔다.
부끄러움보다는 분노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또는 당혹감이라든가.
“야, 인마!”
먼저 고함.
“……아니,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야!”
그리고 버벅거리는 말소리.
김 PD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죄짓고 살래?’
‘화이트가라오케’는 이름만 봐도 뻔하지만 유흥업소였다.
박 부장이 즐겨 방문하는 단골 업소. 거기서 무슨 더러운 일이 일어나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박 부장이 여러 관계자들에게 접대를 받았고, 그 관계자에 K14엔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였다.
한마디로 부정청탁, 배임수재.
김미진 PD가 파악한 바로는 대충 이런 일이었다.
* KMC의 자회사 K14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박 부장 대신 수천만 원의 술값을 냈다.
* K14는 술을 사는 과정에서 ‘이 연습생은 떨어뜨리고, 이 연습생은 올려달라’고 청했다.
* 박 부장은 그걸 또 좋다면서 받아 처먹었다.
더불어 박 부장은 ‘올려야 하는’ 연습생 소속사 관계자에게도 생색을 내며 금품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황만 있고 확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김 PD는 출입 기록 등 증거가 있는 사건만 언급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거 어떻게 알았어.”
박 부장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고…….
“아니, 생각해 보세요.”
김 PD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부장님이 먼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다 웹 예능 부서에 박아두셨잖아요.”
그가 이튜브 웹 예능 프로젝트를 제작하며 노조를 만들지 않은 까닭이 바로 그거다.
“당연히 저희끼리 뭉치죠.”
노동조합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모임이 웹 예능 부서에 이미 결성되었으니까…….
김 PD는 이사진의 비리를 꼬집는 대자보를 사내에 써 붙였다가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곳’ KMC 사옥 지하 2층에서 김미진 PD는 혈기에 이끌린 햇병아리 취급을 받았다.
사회부 기자와 연락했다가 적발된 PD, 방송국 입구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사운드 엔지니어, 상사에게 대놓고 쓴소리를 했던 카메라 감독, 그 외 회사의 수상한 비밀을 알게 되어버린 여러 직원들…….
KMC 웹 예능 제작부는 그 잔뼈 굵은 선후배들의 유배지였다.
‘미안하지만, 동지들. 제가 먼저 부뚜막 올라가겠습니다.’
물론 김 PD도 정보를 대의가 아니라 협박을 위해 사용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무기가 필요했다. 박 부장과 직접 맞설 수 있는 수단이.
‘최근 양질의 정보 물어다 줬으니 쌤쌤인 셈 치자.’
김 PD는 웹 예능부 동료들과 알아서 혼자 타협했다.
‘OTV 〈구공드〉 표절 이슈 말이지.’
허윤아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OTV 방송국에서 허 작가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가 〈90’s Dreamers〉, 그러니까 〈구공드〉와 〈데프아〉에 동시 참여한 인력 중 제일 연차가 높아 지목된 것 같았다.
허 작가 말로는 기획 단계에서 레퍼런스 이상 삼은 것이 있는지, 아이디어 회의 등에 사용한 자료가 있는지 물었단다.
‘솔직히 표절 인정은 안 될 것 같기는 한데.’
원래 이 나라 법은 표현, 그러니까 아웃풋만 가지고 표절을 판단한다.
제작 의도나 사상, 감정 같은 ‘아이디어’는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 포맷이나 자잘한 개별 요소는 아이디어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는 표현과 아이디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김 PD는 OTV 관계자들이 그 사실을 모를 것 같지 않았다.
‘걔들은 그거 말고 더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에 포클레인을 끌고 올 계획 아닐까. 김 PD는 추리했다.
‘웬만하면 크게 터뜨려 주면 좋겠네.’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웹 예능부 조합도 윗선을 공격하게 말이다.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
“그러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부장님.”
모든 계획과 별개로 김 PD는 어나더뮤직 연습생들을, 스테리나인 멤버들을 방송에서 살려주고 싶었다.
그건 측은지심이나 개인적인 애정이 아니었다.
당연히 리더 역할은 정의헌만 한 사람이 없었고, 안승준은 재능이 있었으며, 김지상의 비주얼과 캐릭터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지지는 단순히 비즈니스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김미진 PD의, PD로서의 프라이드 문제.
그는 자신이 고른 사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김 PD가 2차 데스 매치 때 현장 연출에 공을 들이자 그들은 보란 듯이 다음 라운드로 도약했다.
3차 데스 매치에서 〈TOUCH〉 순서를 맨 마지막으로 조정하자 현장 관객들은 그들만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내 욕심이야. 이건 도박이고.’
아무리 상사가 반대하더라도 대중과 팬들은 가치를 알아보았고, 김 PD는 그 인정이 기꺼웠다.
그는 자신의 안목과 직감을 믿었다.
‘1위도 저 셋 중에 나오겠지.’
조금만 더 띄워주면, 그 애들은 더 높고 큰 존재가 될 것이다.
늦기는커녕 이제 시작이었다.
〈데프아〉가 종영해도 그들은 더 이름을 드높일 테니까.
‘그러니까 판돈을 더 넣어보자고.’
그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 부장이 바깥과 통하는 회의실 창문 블라인드를 젖히는 소리였다.
그는 밖을 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김 PD를 불렀다.
“김미진,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진다. 알았어?”
“문제 안 생겨요~”
“종태한테 하드 받아서 편집실로 가.”
다른 스태프에게 전화하려는 듯 핸드폰을 드는 박 부장에게 김 PD가 ‘네엡’ 하고 대답했다.
박 부장의 선언은, 앞으로의 방송 진행과 ‘3차 데스 매치’의 모든 편집 권한을 김 PD에게 위임하겠다는 뜻이었다.
몇 주째 김 PD가 맡았던 이튜브 클립, 무대 직캠, 브이로그 따위의 허드렛일 편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그리고 너, 어디 가서 그 일 말하기만 해.”
박 부장이 회의실을 나서려는 김 PD에게 굵직하게 경고했다.
“그럼요, 말 안 할게요.”
김 PD가 가볍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이미 다 말한 데다가, 후일 이슈가 된다면 그 폭로자는 김 PD가 아니라 동료들일 계획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