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70화
15. Tamed-Dashed(7)
밀월은 궁금했다. ‘계약 기간 5년’은 (어나더뮤직을 포함하여) 연습생들의 소속사와 합의가 된 결정인지, 아니면 저 엔터테인먼트가 주주들 앞에서 입을 턴 것인지. 캡처 몇 장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5년 동안 데뷔 그룹으로 활동해야 한다면…….
‘스테리나인은 어떡하고?’
밀월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데프아〉를 재미있게 보고 덕질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스테리나인이라는 그룹의 팬이었기 때문에.
물론 소속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유명해진 멤버들을 스테리나인에 다시 끼워 그룹을 키우고 싶어 할 테지만 말이다.
‘어나더가 자기 불리한 쪽으로 계약을 수정했을 리가 없지.’
어나더뮤직을 믿기보다는 〈데프아〉 제작진이나 그 주변 관계자들을 믿지 않는 것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냥, 왠지 그쪽이 독단적으로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그는 잠시 누워서 천장을 보고 생각하다가 글에 첨부된 사진을 길게 눌러 저장했다.
그리고 자기 전 마지막으로 툿투 계정에 사진을 첨부해 글을 올렸다.
밀월 ˚₊ᄋ—̳͟͞͞♡ @H0N3YM01N
익명소녀가 폼으로 제보해줬는데 사진 잘 뜨라고 링크 말고 새 글로 올려요
5년 ㅋㅋㅋ 오잉 이거 소속사랑 합의된 사항은 맞죠??? (내가 어나더면 합의 안해줄듯?)
증권신고서 거짓말로 쓰면 불법이에요 ㅁㅊ... [사진]
그 투잇을 쓰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시점 밀월의 SNS 프로필은 이런 상태였다.
「밀월 ˚₊ᄋ—̳͟͞͞♡ @H0N3YM01N
바보곰을 사랑하는 527가지 ⒺⓊ #의헌 #EUIHEON #STARRYNINE
팔로잉 82 팔로워 67,351」
어느덧 구독자가 6만 명.
아이러니하게도 사진 올리는 계정 팔로워 수보다 사담하는 계정 팔로워 수가 더 많았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가 몇 달 사이에 팬덤의 유명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주목을 받는 사람이 파격적인 내용의 글을 최초 게시하는 상황.
심지어 이 새벽에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는 사람들은 모두 김지상의 건강 이슈로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모두가 예민하여 작은 돌도 큰 파문을 일으키는데, 바위를 던진다면 어떠할까.
실시간으로 늘어가는 공유 수.
밀월의 게시글을 온갖 커뮤니티로 퍼 나르는 네티즌들.
실시간 트렌드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는 ‘#데프아_제작진_사과해’ 해시태그까지.
……밀월이 잠든 사이에 인터넷은 글자 그대로 난리가 났다.
+ + +
“일이 이렇게 된 게 애들 탓은 아니잖아요.”
KMC 방송국 본부. 좁은 회의실에 김미진 PD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만 같아서는 서류 더미를 CP 얼굴에 흩날리듯 뿌려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남은 한 줌 예의가 공격을 저지했다.
여태까지 김 PD가 동료에게 정식으로 ‘편집 방향을 바꾸자’고 설득을 시도한 횟수가 다섯 이상이다.
그리고 그 경고를 무시한 결과, 상황이 이렇게 최악에 다다랐으니…….
김 PD의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이해를 못 하는 사람만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니, 미진 씨. 이렇게 화를 낼 일이야? 서로 뭉쳐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치프 프로듀서, 그러니까 데프아의 연출 총책임자인 박 부장이 말했다.
웬만하면 방송국에서는 경력이 쌓여도 칭호가 ‘선배님’이나 ‘PD님’인데, 박 부장은 늘 ‘부장님’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김 PD는 대체 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고 갔냐고 따져 묻고픈 기분이었으나, 한 번 더 참아주었다.
“해결을 어떻게 할 건데요?”
“그 점을 이제부터 이야기를 해 봐야지. 다들 들어봐.”
박 부장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회의실 벽면 스크린에 촬영한 영상을 띄워놓았다.
그는 느긋하게 〈TOUCH〉 팀 대기실 촬영 파일을 휙휙 넘기더니 PPT 리모컨의 레이저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이때 이탈을 하네. 이 타이밍에 한 번 끊고…….”
그가 장면을 조금 더 앞으로 넘겨서 파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녹화된 음성이 회의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나는 진짜, 지금 안 하면 안 돼.
박 부장은 연습생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영상을 정지하고 ‘들었지’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캡처한 파일 몇 개를 클릭해 자료랍시고 보여주며 발표를 이어갔다.
“여기 보면 연습생 문제라는 의견도 많잖아. 좋아요 1134회. 두 개 연결해.”
박 부장이 들고 온 자료 화면은 인터넷 게시판에 익명의 네티즌이 쓴 글이었다.
좋아요가 1134회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옆에 뻔히 ‘싫어요 7035회’라고 적혀 있었다…….
하여간 박 부장은 이번 이슈를 ‘출연진의 판단 미스로 일어난 사고였다’고 무마하자는 입장이었다.
“아니면 싹 컷 하고 하차 공지 띄우자고 하든가. 이게 2안.”
건강상의 문제라고 하면 이제 다 알아듣겠지, 박 부장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김미진 PD는 두 가지 계획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자신이 굴하면 안 된다고도.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발표 좀 해도 될까요.”
김 PD는 허락을 구한 뒤(그러나 답도 듣지 않고), 뚜벅뚜벅 스크린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그다음 스크린에 연결된 컴퓨터에 준비한 USB를 꽂고 파일 폴더를 열었다.
아침에 소집한 긴급 회의라 프레젠테이션을 만들 시간까지는 없었으나, 그래도 자료쯤은 구할 수 있었다.
먼저 김 PD는 수위가 낮은 캡처부터 차근차근 동료들에게 공개해 주었다.
“SNS에 〈데프아〉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가 지금 이렇고요, 이건 우리 시청자 의견 게시판입니다.”
당연히 욕설 일색이었다. 이 정도로 욕을 들어먹으면 박 부장은 최소 몇 세기는 장수할 듯했다.
삭제나 이미지 수정 없이 펼쳐진 원색적인 험담에 박 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음은 방송통신위원회 민원 참여 게시판, 아고라 서명입니다. 보세요.”
캡처 속, 수많은 사람이 게시판을 도배하듯이 〈데프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KMC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제작진의 징계를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이 수십 개였다.
〈데프아〉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버렸기 때문에 나쁜 소문이 지나치게 빨리 퍼진 듯했다.
말을 얹는 데 참여하고 지켜보는 사람 수가 어마어마해서, ‘일부 팬덤 의견’이라고 뭉뚱그릴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튜브 검색 결과도 보여드릴까요? 요즘 이슈 이튜버들 엄청 빠르던데.”
박 부장은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김 PD도 보여줄 생각 없이 비꼰 것뿐이었다.
김 PD는 이어 익명 커뮤니티와 SNS 게시물 캡처로 팬덤 반응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사람들 사과하라고 다 난리예요. 악편 얘기도 계속 나오고, 다 같이 징계받을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피해를 입은 연습생의 소속사, 어나더뮤직으로부터 들어온 공문도 벌써 한 더미였다.
사과 및 정정 방송 요청, 가학성 해명 요청, 전일 사건에 대한 상황 설명 요청, 협박 건의 내용 증명까지…….
김 PD의 손짓에 따라 마우스 커서가 스크린에서 크게 빙글 돌았다.
“이쪽 소속사는 일을 다 법인 끼고 나오더라고요. 저희 고소당하면 질 확률이……. 80퍼 정도?”
김미진 PD가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자, 동료 PD들이 ‘오……’ 하는 눈으로 김 PD를 쳐다보았다.
솔직한 감탄. 이 정도로 김 PD가 칼을 갈았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박 부장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김 PD는 망설이지 않고 더 파괴적인 수를 띄웠다.
“그리고 녹음 있어요.”
김 PD가 폴더 속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뒤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선후배 PD가 함께하는 회의 현장에서도 인간 김미진은 참지 않았다.
허윤아 작가가 연습생에게서 받아 온 녹음 파일이 회의실에 조용히 울렸다.
- 둘은 여기서 기다려. 넉넉하게 잡아서 한 시간 뒤에 올 테니까.
- 경연 준비 다 하고, 방송도 녹화 중인데요……. 경연 끝날 때까지 감금되는 거잖아요.
그 음성에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둥 마는 둥 휘날려 적고 있던 후배 PD 한 명이 굽히고 있던 목을 쭉 뻗었다.
김미진 PD의 바로 위 선배 PD도 당황하여 발표 중간을 뚝 끊어내고 물었다.
“미안한데, 미진아. 음성이 뭔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아~ 이거 말이에요. 할 말 많죠. 다시 들어볼까요?”
김 PD가 능글맞게 말끝을 올리며 마우스 커서를 재생 버튼 위로 옮기는 그때.
드디어 박 부장이 폭발했다.
“김미진 PD만 남고 다 나가 봐.”
자리에서 덜컹 일어나며 손을 휘두르는 박 부장을 보고도 김 PD는 물러서지 않았다.
“우현 씨랑 윤이 씨 남겨주세요.”
“……알았으니까 셋만 남고 빨리 나가.”
김 PD는 건장한 남자 후배 두 명을 지목했고, 빠져나가는 동료들과 반대로 움직여 박 부장과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라’의 배짱과 ‘그래도 지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준비 자세였다.
“부장님이 전화 거셨던 것도 녹음 있어요.”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하려면 김 PD에게도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으니까.
엄밀히 말해 그 통화는 허윤아 작가가 걸고 박 부장은 받는 쪽이었지만, 그런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까지가 신경만 슥슥 긁는 잽 펀치였다면 박 부장이 직접 나선 ‘협박’은 박 부장의 약점이었다.
약점을 노린 풀 스윙.
무거워지는 것 같은 분위기에 김 PD도 표정을 굳혔다. 입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들려드릴까요?”
“아니, 그건 됐고. 미진 씨. 그래서 미진 씨가 원하는 게 뭔데.”
박 부장이 다시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보는 눈이 있어서 부글거리는 감정을 다스린 성싶었다.
김 PD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기 전부터 그가 하던 이야기는 정해져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입 밖에 낸 이야기인데도 다시금 공론에 올리려니 괜스레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어나더 애들 살립시다.”
그의 주장은 몇 주째 일관적이었다.
그래서 김미진 PD는 자신의 말에 이제야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들뜬 기분도 없지 않았다.
이제야 염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서.
“솔직히 셋 다 부족한 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데뷔할 수 있게 두자고요.”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그는.
총력을 다해 데뷔 그룹 멤버에, 최소한 파이널 스무 명 명단에 세 명의 이름을 올릴 셈이었다.
“그러니까 자회사랑 이야기가…….”
“매니지먼트 말씀하시는 거죠, 부장님.”
끄응 소리를 내며 말끝을 흐리는 박 부장에 김 PD가 웃어 보였다.
김 PD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 한 장을 스크린에 새로 띄웠다.
SNS에서 몇 시간 만에 3만 회 넘게 공유된 게시글과 그 글에 첨부된 사진 한 장.
내용은 KMC의 매니지먼트 자회사 K14엔터테인먼트의 범법 행위 의혹을 담고 있었다.
“그 자회사가 사기꾼 회사여도 편먹을 거예요?”
게시자, ‘@H0N3YM01N’.
계정 프로필 사진……. 정의헌.
김 PD는 의기양양하게 박 부장의 표정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