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67화 (67/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67화

15. Tamed-Dashed(4)

최소한의 예고로 들어오는 직구에 허윤아 작가는 당황했다.

그러니까 ‘통화’라는 것은 그 얘기였다. 김지상과 허 작가가 단둘이 면담했을 때, 치프 프로듀서에게서 걸려왔던 전화.

당시 전화 연결은 허 작가의 핸드폰으로 이루어졌고 스피커폰으로 틀어놓았으므로 김지상과 허 작가, CP의 목소리가 모두 섞였다.

‘남에게 말한 적 없는데?’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누구에게도 –한배를 탄 김 PD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았지만, 허 작가에게는 통화 녹음 파일이 있었다.

맹세코 일부러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니었고.

다만 사람을 자주 만나고 통화 인터뷰가 잦은 직업 특성상 허 작가는 녹취를 자주 활용하는 편이었다. 음성이 다 자료가 되었으므로.

그래서 그는 언젠가 핸드폰에 ‘전화 자동 녹음’ 어플을 설치했다. 수동 녹음은 귀찮기도 하고, 잘못하면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지상이가 전에 어깨너머로 봤다고 해서요.”

정의헌이 짧은 덧붙임으로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물론 김지상은 옆에서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당황한 허 작가는 그 반응까지는 보지 못했다.

“상황 증명해 주실 수 있는 분 여러 명 계시고, 증거도 다 있어요.”

돌발적인 트러블을 몇 개나 겪고도 정의헌은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저는 공론화할 의사까지도 있지만, 그전에 협의가 가능하다면 하고 싶거든요. 그래도 저희가 다치지 않고 잘 나왔으니까.”

“…….”

“지상이는 또 다른 의견일 수도 있지만?”

그가 농담하는 어조로 진담을 던졌을 때쯤, 막내 작가가 세 사람에게 시간이 다 되었다며 손짓했다.

정의헌은 다가오는 막내 작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손을 다시 등 뒤로 가져가 마이크팩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여유 되시면 저희 편 한 번만 들어주세요.”

딸깍. 연결선이 다시 마이크팩에 꽂혔다. 그의 은근한 미소와 함께.

공손한 인사와 함께 대화가 마무리되고 두 사람은 막내 작가를 따라 자리를 떴다.

반면 허윤아 작가는 몇 초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각이 많았다.

‘부탁이라고 했어.’

정의헌은 협박도 안 했고, 강압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들으며 민망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멸감은 없었다.

‘돕는다, 돕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도 주었고.

‘일부러 부탁하는 척 말한 거겠지.’

그리고 허 작가는 자신이 배려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 정성을 모를 만큼 서투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정의헌은 제작진 측이 대응을 논의할 수 있게 자신의 스탠스를 담백하게 귀띔해 주었을 뿐이고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니 허 작가는 제작진이 모여 대책을 회의할 때 ‘애들은 협의가 잘되면 공론화할 생각은 없대요’라고 말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허 작가는 그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알 것 같았다.

‘사과할 것을 사과하고, 지난 방송분을 해명하고, 악의적인 편집을 그만두기.’

이에 더해 어쩌면 금전적 보상까지. 이 건을 협상대에 올리면 그 정도 요구가 등장할 성싶었다.

애초에 정의헌의 말 자체가 제작진의 태도를 보고 적당히 눈을 감아주겠다는 뉘앙스였다.

허 작가는 ‘협의’라는 단어에서부터 느껴지는 용서의 여지를 기민하게 읽어내었다.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야.’

정의헌은 유순하게 표현했으나, 꼬아 들으면 결국 그런 의미.

허 작가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오는 팔뚝을 문질렀다.

‘한번 보자……. 어떻게 수습하고 자연스럽게 띄울 수 있을지.’

어차피 협의에 성공한다면 방송을 통해서도 이미지를 복구해 주어야만 하니까.

무대에 올라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허윤아 작가는 무전기를 통해 김 PD에게 속삭였다.

“PD님, 저 자리 좀 옮기려고요. 대신 민영 씨 그쪽으로 보낼게요.”

허 작가는 그렇게 동료들과 외떨어지면서도 연습생들과 가까운 위치인 무대 바로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근처 보조 작가 한 명을 김 PD가 있는 모니터 공간으로 보내며 허 작가는 안경을 고쳐 썼다.

무대 위는 환하고, 아래는 더없이 어두웠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미고’ 팀 후보생들, 인사 먼저 하겠습니다!”

MC 남소리가 활기차게 외쳤다. 촬영이 몇 시간 째 진행되며 지칠 법도 한데 그는 변함없이 씩씩했다.

리더의 선창에 맞추어 ‘아미고’ 팀 여섯 명이 조금은 유치한 단체 인사를 건네었다.

팀 이름은 스페인어로 ‘친구’라는 뜻. 〈TOUCH〉라는 노래가 팝에 라틴 스타일을 결합한 음악이라서 그렇게 지었단다.

‘노래 좋지.’

허 작가가 생각했다. 〈TOUCH〉는 따지자면 신곡 여섯 곡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노래다.

안승준이나 채호원이 참여하게 된 〈두드려〉도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TOUCH〉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도 팬들이 그 짧은 며칠 사이에 연합을 만들어 ‘팀 결성 투표 품앗이’ 캠페인을 벌였을 정도니까.

〈TOUCH〉는 그만큼 퀄리티가 좋은 노래였다.

달콤하면서도 관능적이지만, 노래 속도가 제법 빨라 경쾌하고 신나는 느낌도 없지 않다.

‘호불호를 별로 안 타는 느낌?’

그 밸런스 유지를 위해서인지 의상도 블랙 앤 화이트에 세로 스트라이프 무늬를 포인트로 두고 있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정열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흑백 의상으로 시각적인 채도를 조정한 셈이다.

정의헌의 경우 흰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이너로 입었는데, 그 위에 걸친 스트라이프 디자인의 재킷은 밑단을 크롭해 몸통이 짧았다. 그리고 슬랙스 바지와 가죽 재질의 검은 구두까지. 다만 재킷과 바지는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명도가 높아 몸이 무겁지 않아 보였다.

〈늑대의 시간〉에서는 고글, 〈일일구〉에서는 장갑을 소품으로 착용했던 것에 비해 얌전한 코디였다. 악세서리도 손가락의 반지 여러 개가 전부였고.

같은 멤버인 김지상은 더블버튼 재킷을 단추를 끝까지 채워 입어 아예 속에 입은 티셔츠를 노출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에 더해 김지상의 스타일에는 상하의 모두에 들어가는 스트라이프 무늬라든지, 어깨에 붙은 은색 장식, 마이크와 닿지 않는 방향으로 착용한 롱 귀걸이 등 ‘킬링파트’스러운 포인트가 많았다(귀걸이는 엄밀히 말해 귀찌지만).

그 외에 흰 셔츠에 앞으로 여미는 –코르셋 같은 디자인의– 와이드 벨트를 채운 류희재, 맨몸에 재킷을 입은 팀원 등도 콘셉트를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발 잘해라…….’

허 작가는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이 무대가 잘 나와야 프로그램이 뒷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잘될 수 있다’, 제작 실무진들의 의견에 허 작가도 동의하는 바였다.

무대 위 정의헌과 김지상은 언제 진지했고 언제 아팠냐는 듯 표정을 바꾸고 카메라와 객석을 보고 있었다.

프로의식 때문인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을 마주해 엉클어진 마음이 자연스레 풀린 것 같기도 했다.

“정의헌 후보생은 오늘의 무대 포인트가 뭐라고 생각해요?”

곡 소개와 개인 인사는 돌아가며 이미 한 번씩 했고, 조금 더 시간을 끌자는 스태프의 사인에 맞춰 MC가 추가 질문을 던졌다.

“아, 이거 엄청 개인적인 건데……. 말해도 되나요?”

“말이 나왔으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죠~ 뭘까요!”

“저 오늘 메이크업 쌤이 여기 눈 아래에 점 그려주셨어요. 예쁘죠?”

정의헌이 자신의 눈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객석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웃음 섞인 환호가 터졌다.

카메라 감독은 때를 놓치지 않고 줌을 당겼고, 옆면 모니터에 그 얼굴이 크게 담기자 기쁜 목소리가 한 번 더 범람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애교가 은근히 많아…….’

적절한 시간 끌기라고 생각하면서도 허윤아 작가는 냉정하게 평했다.

그리고 그때쯤 무대 밑에서 FD가 이제 넘어가도 좋다는 사인을 MC에게 보냈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 후보생들 무대 준비 위해서 뒤로 이동할게요!”

MC가 무대에서 내려가고, 조명이 미세하게 조정된 뒤.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다듬은 팀원들이 무대에 다시 올라섰다.

‘후우…….’

허윤아 작가도 그 틈을 타서 안경알을 닦았다. 연습생들이 자세를 홀드하고, 모니터에 VCR이 돌았다.

세로로 긴 VCR은 팀원들이 각자 후렴 안무를 추는 20초 내외의 짧은 ‘챌린지’를 여섯 개 자르고 이어붙인 영상이었다.

한 명씩 영상 속 주인공이 변할 때마다 객석이 파도를 타듯 함성을 내질렀다. 누가 더하고 덜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고루 열광적이었다.

번쩍.

조명이 켜지고, ‘동동동’ 하고 둥근 소리가 울리는 전자피아노 사운드가 가장 먼저 무대에 깔렸다.

소리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맨 앞에 서 있던 김지상이 고개를 들고 옆으로 이동하며 세로 일자 대형을 가로로 퍼뜨렸다.

반주 위로 전자 기타가 끼어들어 리듬과 사운드가 풍성해지고, 마라카스와 우드블럭 따위의 이국적인 악기 소리가 쌓였다.

그리고 몇 초 정도 유명 안무가가 제작한 군무가 이어진다.

도입은 보컬 1, 정의헌.

있잖아 바보 같지 네게 빠진 내 모습

애쓰는 꼴에 넌 또 웃음 짓네

네 뒤를 난 쫓고 넌 쉽게 도망쳐

하지만 가창이 아니었다. 싱잉랩도 아닌, 속삭여 말하는 듯한 래핑.

도입부에 구성된 보컬 파트를 랩으로 변경한 것은 정의헌의 아이디어였다.

이후 부르는 사람도 바꾸네 마네 우여곡절 끝에 그냥 원래 파트 주인이었던 정의헌이 랩을 하기로 결론이 지어져서…….

정의헌은 아무튼 오늘, 〈데프아〉에서는 처음으로 랩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 작가는 파트 변경 분량 녹화 다음에 따로 진행했던 인터뷰 내용을 문득 떠올렸다.

‘랩을 하게 되었다면서요, 소감이 어때요?’

‘저 그런데 지금 회사도 랩으로 들어갔어요.’

웃으며 ‘당시에는 랩을 더 잘했거든요’라고 대답하던(허 작가는 발언을 들으며 ‘그냥 노래 열심히 연습해서 잘하게 되었다는 말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 그 느슨한 목소리는 래핑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다.

래핑은……. 선명했다. 낮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하는 투가 노래를 다소 농염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가 무릎을 굽혀 앉으며 하강하는 지미집 카메라를 삐딱하게 보았다.

I’ve never been like this

But I don’t care

‘이런 곤경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어, 하지만 상관없어’라고 이야기하는 가사.

정의헌은 카메라와 비슷하지만 다른 속도로, 본인의 느낌대로 박자를 살려 몸을 일으켰다.

‘처음 받은 가이드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허 작가는 생각했다. 고작 도입 몇 마디 만에 드는 의문이었다.

‘원래는 더 거칠고 야성적인 느낌이었잖아.’

정의헌이 〈데프아〉에서 보여준 경연 무대는 이제까지 늘상 활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본디 스테리나인이라는 그룹의 색깔도……. 허 작가가 알기로는 폭발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런 걸 잘하니까, 그 분위기를 살릴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 정의헌은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서겠다’는 도전적인 가사를 부르면서도 감정을 터뜨리지 않았다.

허 작가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그녀는 〈TOUCH〉 프로듀서 미팅에는 참석했지만, 이후 편곡 파트에서는 이 ‘아미고’ 팀을 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곡의 비하인드도 일부만 알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퍼즐 조각 몇 개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왜 달라졌을까?’

그는 벌써부터 자신이 현재 무대 밑에 남은 사유도 잊은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주변을 잊는다는 것, 다시 말해…….

몰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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