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61화
14. 에너제틱(4)
흠, 대단한 다짐이나 계획을 한 건 아니고.
여러 사건이 선형적이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니 중간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말하자면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전략을 짜는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하나. 시간제한이 있는 일.’
이번 경연, ‘3차 데스 매치’다.
일요일에 무대가 있으니 그전까지는 준비를 끝내야 하고, 절대적 다수의 기억에는 이 결과물이 제일 오래 남을 테다.
이 과제를 잘 풀어나가는 방법은 철저히 연습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게다가 ‘3차 데스 매치’는 사실상 마지막 경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다음은 파이널 생방송인데, 파이널 무대는 승패도 따지지 않고 베네핏도 따로 없어서 ‘데스 매치’라는 이름도 붙지 않는다. 무대 구성 자체가 일종의 축하 공연 같은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자면 이번 승리 베네핏은 투표 수와 영상 조회 수, 좋아요 수의 합산을 비율로 따져서 그만큼 득표수에 가산점을 준다는 것 같다.
‘전체 투표자가 10명이고 2명에게 표를 받았다면 득표 수를 1.2배로 계산해 주는 느낌?’
정확히 저런 계산은 아니고 복잡하게 따지겠지만, 어쨌든 뉘앙스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요약하자면 경연 점수가 다른 팀보다 높을수록, 개인 투표를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은 득을 누릴 수 있다. 잘하자.
‘그리고 둘,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
제작진과 얽힌 트러블이 이 문제에 해당된다.
뭐 이런……. 일개 아이돌이 제작진과 싸워야 하나 싶지만, 이렇게 주먹구구에 막장이니까 오래 못 가고 망했겠거니 싶다.
아직까지는 방송이 진행 중이니까 이 문제는 우선은 방어적으로 대처하자는 게 내 입장이다.
‘반격에 나서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위협이 닥치면 빠져나갈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하기, 나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증거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기, 증인이 되어줄 사람 내 편으로 만들기……. 이 정도가 내가 지금 행동할 수 있는 방어적 대처 방안의 예 되시겠다.
방송에 어떻게 나올지 조심하는 것은 할 만큼 했다.
제작진은 아무런 소스 없이도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 수 있으며 이 악의적인 각오는 지난 방송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둘의 연장선으로, 애들도 틈틈이 신경을 써야 된다.’
안승준은 혼자 다른 팀으로 떨어져 있어서 걱정이고, 김지상은 가족이 엮인 일이 아직 봉합되지 않아 마치 폭풍전야처럼 위태롭다.
음…… 그래도 안승준은 김지상보다 멘탈도, 체력도 튼튼해서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삶에서도 그 고생을 겪고도 결국 다시 그룹으로 돌아왔으니까. 그것만 봐도.’
승준이는 틈틈이 확인하고 김지상부터 집중 마크하기로 하자.
두 번째 문제도 정리 끝.
‘이제 마지막은……. 류희재.’
앞의 둘과 비교하면 이쪽은 스케일이 보너스 수준이긴 하다.
신경을 써도 되고, 적당히 무시해도 되는 사안.
‘……음.’
괜히 계륵을 헤집어서 스트레스받고 싶지는 않은데.
크게 피해 주는 일이 없다면 류희재와 이야기하는 것은 잠시 보류해 두도록 할까.
그렇게 각 위험 요소에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나는 막 재시작되는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리더는 희재 형이 계시니까, 형이 해주시는 게 어때요.”
“…….”
“의헌이 형도 리더 잘하잖아요. 투표하면 안 돼요?”
“헐! 투표해요. 민주사회의 규칙입니다.”
결과는 4대 0. 정원 6명에 당사자 2명을 제외하고 투표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0표 받은 류희재가 침묵했다.
“…….”
이러려고 제안한 게 아니었는데, 사람 기만한 것 같은 투표 비율이다.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엄마……. 엄마 아들 집 나와서 눈칫밥 먹고 살아.
“……그래, 그러면 리더는 내가 할게. 이제 킬링파트 정할까요?”
고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킬링파트’마저 지상이로 정해진 탓이었다.
이 노래의 킬링파트는 가창이 거의 없고 표정 연기와 제스처가 주였는데, 얼굴 잘 쓰는 건 한마디로 김지상의 특기였다.
류희재는 킬링파트에 도전해 보지도 않았고 별다른 이의 제기도 없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카메라 앞이다 보니 표정 관리는 하고 있지만, 딱 피부로 느껴지는 눈치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 뉘앙스가 썩 좋지 못했다.
‘알아, 나도……. 우리가 독주 중이라는 거.’
팬덤도 크고, 맡은 역할도 많고. 내가 제작진이어도 견제하고 싶겠다……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싫은 티 너무 내는 거 아니냐?’
아무리 싫은 사람이어도 적어도 앞에서는 웃으며 친근하게 대해야 하는 게 방송 아니냐고.
나라고 해서 류희재랑 무슨 평생지기 영혼의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닌데. 억울하다.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니 끊임없이 투덜거리게 되는 것 같아서 나는 머릿속으로 아까 세운 공식을 되새겨 보았다.
* 피해 주는 일이 없다면 이야기하려고 들지 않기.
* 잘 넘어갈 수 있는 일 헤집어서 스트레스받지 않기.
이에 더해 내 인생을 지탱하는 좌우명 하나도.
‘세 번은 참자…….’
참고를 위해 짚어보면 이번이 세 번째다.
〈데프아〉 첫 촬영 때 한 번, 저번 MT 때 두 번, 이번 일로 세 번.
그리고 결심이 무색하게 네 번째는 바로 며칠 후 찾아왔다.
* * *
결말 스포일러부터 선수 치자면, 안 참았다.
그렇지만 나도 성격이 그렇게 야무진 건 아니라서……. 통쾌한 느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그냥 대화를 했다. 전에 류희재에게 꼭 다시 보자고 눈도장을 찍고 갔던 일의 후속편처럼.
“형, 저랑 친해질 생각 없어요?”
합숙 나흘 차, 합숙 종료를 하루 앞둔 저녁. 나는 류희재에게 대놓고 물었다.
단체 연습 도중은 아니고, 연습실에 우리 둘만 남아서 동작을 맞춰보던 때였다.
‘음. 먼저 나흘 동안 있었던 일.’
팀원들이랑 편곡에 관해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노래는 콘셉트를 건드릴 것이 많이 없었다.
심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슈도 편곡보다는 녹음과 믹싱이었으므로 합숙은 전과 다른 의미로 바삐 진행되었다.
어쨌든 합숙 나흘째 되는 날이면, 전체적인 안무를 외우는 과정은 끝났고 단체 연습 위주로 동작의 디테일을 맞추는 게 일이었다.
그 와중에 단체로 연습하지 않고 둘만 남게 된 이유는……. 〈TOUCH〉에 중간 삽입되는 ‘페어 안무’가 원인이었다.
‘둘이라서 페어. 세 명부터는 유닛 안무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페어 안무는 단어 그대로 무대에서 두 명이 주축이 되어서 하는 안무다.
가볍게는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주먹을 부딪친다거나……. 한 명의 고난도 동작을 남이 옆에서 받쳐주는 것도 페어 안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룹 멤버들이 다 무대에서 빠졌을 때 둘만 남아 춤을 추는 것도, 포인트 동작을 두 명만 추는 것도 일단은 다 같은 개념이다.
〈데프아〉는 직캠 촬영이나 이런저런 형평성을 고려해서 원칙적으로 곡 도중에 팀원이 옆으로 빠지지를 않는다(1차 경연 이후 생긴 규칙이다. 〈늑대의 시간〉 독무는 위반 아님. 그런데 나 때문에 새로 생긴 규칙일 수는 있다……).
이번에는 한 팀당 인원이 얼마 없어서 솔로 무대처럼 빠졌다가 들어갔다가 해도 괜찮게 잘 나올 것 같은데, 고집이 있는 모양이다. 백업 댄서를 쓰지 않는다거나 무대 세트 규모 제한 등도 그 고집의 일환일 테고.
‘하여튼.’
지금 하는 페어 안무는 2절 초반 포인트가 되는 춤을 둘이서만 같이 추는 것이다. 다른 팀원들은 일시적으로 백업이 되고.
똑같은 동작을 가까운 거리에서 거울처럼 마주 보고 하는 안무라서, 팀원들과는 대충 ‘거울 안무’라고 부르고 있다.
앞뒤 동작의 이음새에 필요한 시간까지 다 더하면 십 초에서 십오 초쯤 걸릴까.
I Mean 예민한 이 감각을
Touch More 네 손길로 깨워줘
그런데도 똑같은 가사, 똑같은 멜로디가 지금 몇십 분이나 연습실에 반복 재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대 위에서는 금방 지나갈 움직임이건만 합이 도저히 맞지 않았다.
내 기준이 높은 것도 있지만, 진전 없이 반복만 하다 보니 집중력도 서서히 흩어지고…….
그러다가 특단의 조치로서 카메라가 돌든 말든 거리끼지 않고 물어본 것이 저 질문이다.
나랑 친해지고 싶은 생각 없냐고.
‘나 진짜 오래 참았다.’
류희재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들으면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
“친해질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요. 저희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같은 팀 되어본 적도 한 번도 없었잖아요.”
“무슨 소리야?”
“서로 거리가 있어서 지금 호흡이 안 맞는 게 아닐까…… 라든가, 그렇게 안 느껴요?”
필터링을 최소화한 채로 말을 붙이자 류희재가 당황한 심경이 십분 느껴지는 얼굴로 내 뒤를 살폈다.
카메라를 찾나 보다. 물론 촬영 스태프까지 붙어서 절찬리에 돌아가는 중이다.
폭탄 같은 의제를 흩뿌려 놓으니 류희재는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해서 나를 비난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데…….
‘음?’
이거 좀 재미있는 것 같다. 갑자기 뇌에 도파민 돈다.
그래도 너무 곤란하게 만들어서도 안 되겠지? 나는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 같이 저녁 먹고 와서 다시 해요.”
그리고 즉시 웃으며 류희재를 식당으로 끌고 내려갔다.
‘아니, 웃기잖아.’
너그럽게 마음을 먹고 보니까 툭 건드리면 화들짝 반응하는 게 은근히 즐거웠다.
바쁘고 정신없는, 합숙이라고 쓰고 유배라고 읽는 생활에 이런 한 줄기 자극이라……. 놓칠 수 없지.
류희재는 카메라 때문인지 싫다고 막 거부하지도 못하고 나를 따라오더니, 식당에 내려와서도 안심하지 못한 눈치였다.
배식을 받아와 류희재 앞에 앉는데, 녀석의 긴장은 풀릴 줄을 몰랐다.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 식당에 원래 카메라 없어요.”
근처에 앉으려는 애들을 손짓으로 슬 물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마이크도 없고. 너무 시끄러워서 첫 합숙 중간에 떼어냈대요.”
“너 왜 이래? 왜 이상하게 굴어?”
순식간에 류희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금방이라도 밥상을 얹을 것처럼 노기 띤 목소리였지만……. 나는 알감자조림을 먹으며 대답했다.
“뭐가 이상해요. 팀원끼리 친하게 지내는 거, 저는 전혀 안 이상한 것 같은데.”
류희재는 젓가락을 손에 쥐고 굳었다.
조금 더 압박해 보자.
“같이 데뷔할 수도 있잖아요.”
〈데프아〉 방송 프로그램의 규칙, ‘파이널 상위 10명은 팀으로 데뷔한다’는 보상.
이 말은 왠지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웬만하면 안 꺼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이보다 나은 카드가 없을 것 같았다.
“한 팀으로 데뷔해도 저 이렇게 모르는 척하고 살 거예요?”
“…….”
“저한테 문제가 있는 거면 고치겠다고 전 말했어요. 기회 놓치지 말고 지금 얘기해요.”
류희재가 말없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상추 겉절이에 떡갈비까지 냠냠 집어먹었다.
“형 요거트 딸기 말고 블루베리 맛으로 먹고 싶은 생각 없죠…….”
“손대지 마.”
그리고 후식으로 나온 블루베리 맛 요거트도 퍼먹는데, 상대는 여전히 밥 한술 뜨지 못하는 중.
‘싸울 깡도 없으면서 왜 덤볐냐고요.’
분명 지금까지 당한 건 나일 텐데…….
이렇게 되니까 아무리 봐도 내가 괴롭히는 그림이다.
웃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요거트용 플라스틱 숟가락을 꽉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