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60화
14. 에너제틱(3)
섹시 콘셉트를 싫어하냐고 하면……. 아니,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닐 거다.
민망하고 콘셉트와 낯도 가리지만 하라는 지시를 거부할 만큼 싫지는 않다. 딱히 기를 쓰고 피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지금까지 우연이 겹쳐 경연에서 보여줄 일이 없었을 뿐, 그렇게 섹시 콘셉트가 부담스럽지는……. 아, 생각이 왜 이렇게 길어지냐.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으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고 일단 할 일부터 하자.
“어나더뮤직 정의헌 후보생, 카드를 받고 ‘스크린 룸’으로 이동해 주세요.”
초중반 순서로 MC에게 카드를 받고, 나는 복도 세트를 지나 좁은 방으로 이동했다.
복도 끝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는데 눈짓으로 여쭈어보자 제작진은 어디로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신호해 주었다.
어둡고 면적이 좁고 천장이 낮은 방.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이따금 만들어 놓는 전시 상영 공간 같았다.
얇은 벽걸이 TV가 벽면에, 카메라가 구석 몇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TV 아래 태블릿 PC는 전면 카메라가 켜진 상태였다. 네모난 실선이 태블릿 PC 화면 중앙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QR 코드를 인식하는 용도인 듯했다.
‘QR 코드……. 이건가.’
아까 받은 카드 뒷면 구석에 그려진 QR 코드를 태블릿 PC에 대고 스캔하자, TV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우선 암전된 화면에 흰 자막부터 페이드 인.
[해당 영상은 정의헌 후보생의 후원자가 직접 보내주신, ‘후원자의 선택’ 영상입니다.]
오……. 이거 뭐였는지 기억 난다.
화면에 흰 조명이 들어오고 핸드폰 셀프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영상이 불쑥 시작되었다.
뒷배경은 가정집 스타일의 흰 벽지로, 화면 중앙에 선 사람은 할로윈에나 쓸 것 같은 유령 가면으로 얼굴과 목을 가리고 있었다.
섬세하게 묘사되어 공포스럽게 생긴 유령 얼굴과 달리 높고 명랑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어, 음. 의헌 오빠! 안녕하세요. 제가 추천하는 노래는 〈TOUCH〉입니다! 이유는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유령 가면을 쓴 사람은 이 말로 영상을 마무리했다.
- 저 진짜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꼭 데뷔해 주세요!
느리게 페이드 아웃, 그리고 새 영상이 페이드 인.
구도는 첫 번째 영상과 비슷했는데, 배경이 되는 벽에 브로마이드나 슬로건 같은 굿즈가 잔뜩 붙어 있었다.
스테리나인으로 활동했을 때 발매한 공식 굿즈와 공식이 아닌 사진들이 섞인 채였으나, 사진의 주인공은 모두 나였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영상 속에서 외쳤다.
- 의헌아, 네 덕분에 매주 금요일이 너무너무 기다려져. 내 인생에 와줘서 고마워! 3차 경연 〈TOUCH〉하고 데뷔까지 가 보자!
그리고 비슷한 내용이 담긴 짧은 영상이 열 개 정도 이어졌다.
- 제가 생각하는 정의헌 연습생, 아니, 정의헌 후보생에게 어울리는 신곡은 〈TOUCH〉입니다. 어, 저는. 그러니까 의헌이가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해서…….
- 꼭 〈TOUCH〉 해줘! 사랑해, 늘 응원할게!
- 헌이 오빠! 지금까지 열심히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 신곡 〈TOUCH〉하고 파이널까지 살아남아서 데뷔하자!
- 〈두드려〉도 좋지만 제 선택은 〈TOUCH〉요! 의헌이 목소리로 이 노래를 하는 게 듣고 싶어요!
우와……. 알고 있었던 구성도 직접 경험하니까 꽤 감동적인데.
영상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이해한다), 드문드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잠시 정신을 빼놓고 영상에 집중하고 있는데, 곧 마지막 사람까지 끝나고 암전된 화면에 자막이 떴다.
[정의헌 후보생의 후원자들이 선택한 신곡은 〈TOUCH〉, 포지션은 ‘보컬2’입니다.]
그리고 이튜브에 시청자 대상으로 이미 공개한 바 있는, 〈TOUCH〉라는 노래에 대한 설명이 마지막으로 잇대어졌다.
노래 제목은 〈TOUCH〉. 다양한 악기와 이국적인 리듬, 짙은 리드 사운드가 결합된 팝 댄스곡.
넘보아서는 안 될 상대를 사랑하게 된 남성의 본능과 고뇌를 담은, 관능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노래.
‘진짜 나는 뭐 이런……. 짐승 같은 콘셉트만…….’
늑대 다음 상어 다음으로 파렴치한 남자라니 이게 맞나 싶다.
……아무튼, ‘3차 데스 매치’는 유명 프로듀서들이 〈데프아〉 연습생들만을 위해 제작한 오리지널 신곡으로 경연하는 규칙이다.
KMC에서 거액의 투자를 통해 만들었을 신곡은 무려 여섯 곡으로, 생존자가 서른여섯이니 여섯 명씩 여섯 조에 배정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 경연의 키워드 ‘Answer’에 맞게 〈데프아〉는 신곡 샘플을 온라인에 공개해 시청자들에게 설문 투표를 받았다.
‘이 신곡 및 콘셉트와 어울리는 팀원 6명과 그 팀원들의 포지션을 골라주세요.’
설문은 탈락자 발표 전에 시작되고 끝났는데, 넉넉하게 뽑으라고 하지 않고 그냥 6명 맞춰 고르라고 하더라. 다양한 표본 수집을 포기하고 설문 참여자 물량으로 승부하는 전략 같았다.
덧붙여 〈TOUCH〉의 경우 메인보컬, 보컬1, 보컬2, 보컬3, 래퍼1, 래퍼2로 포지션이 나뉜다.
다만 ‘리더’와 ‘킬링파트’는 시청자가 아니라 연습생들이 직접 고른다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회의하는 모습은 촬영해야 할 테니까.
‘힘내자!!’
이미 엎어진 물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열심히나 하기로 했다.
반전 없이 섹시 콘셉트 곡을 받고 뒷 번호 촬영을 위해 대기한 뒤, 나는 본격 회의와 연습을 위해 모두와 합숙 촬영지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말을 맞춰보니 김지상은 나랑 같은 팀이고, 안승준•채호원•송수민이 같은 곡을 받았단다.
조합이 좀 신기하다. 이 친구들이 받은 곡은 〈두드려〉라는 제목의 심플한 비트로 이루어진 미니멀한 구성의 어반 팝 신곡이다.
“수민이 잘 지냈어?”
“네!”
얘는 이번 합숙에는 머리를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왔다. 쨍하게 밝은 컬러는 아니고 다소 톤다운된 분홍이다.
“우리 못난 동생 잘 부탁한다.”
“그렇게 못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채호원은 그렇게 대답했다.
“승준아……. 모셔라.”
“어! 우리 앞으로 형 뒷담하면서 친해질게.”
“이거 봐라. 내가 못났다고 했지?”
내가 채호원에게 일러바치자 안승준이 안광 없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또한 나는 〈TOUCH〉 팀원들과도 눈도장을 미리 찍어두기도 했다. 한 명씩 확인하고, 맨 마지막에는 버스 맨 앞 김지상 자리로.
“지상이 자냐~”
그렇게 질문하니까 등을 기대고 좌석에 파묻힌 김지상이 한쪽 눈만 뜨고 대답했다.
“카메라 없을 때 자두려고……. 말 걸지 마. 형 목소리 너무 커.”
“알겠습니다…….”
퇴짜 맞고 돌아오니까 승준이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내게 물었다.
“왜, 왜?”
“잔대. 피곤한가 봐.”
어깨를 으쓱이는 안승준과 나는 함께 물러났다.
……나도 승준이도 왜 지금 김지상의 태도가 날카로운지 모르지 않았다.
김지상은 지난 방송분에서 또 ‘악편’을 당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이번에는 전보다도 악의로 똘똘 뭉친 것이 ‘애를 완전히 보내버리겠다’는 각오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제작진은……. 지상이가 경연 준비를 하며 중간에 쉬는 장면들을 남들이 연습하느라 고생하는 장면 사이사이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본인 능력치를 믿고 남들이 연습할 때 쉬고, 남들 결과물에 훈수만 두는 것 같은 캐릭터’를 억지로 만든 것이다.
‘게으른 천재, 건방진 독종,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
……뭐, 만약 지상이가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면 그런 캐릭터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애가 아닌데.’
인터넷에서는 ‘실력이 좋으니 상관없다’는 주장과 ‘이런 놈이 데뷔하면 팀워크 망한다’는 주장이 서로 부딪히는 모양이다.
김지상의 연습 태도는 완벽히 ‘논란’으로 싸잡혀서 아수라장의 근원지가 되었다.
‘역바이럴이든 아니든, 머리를 잘 썼어.’
논제가 ‘인성이 엉망인 실력자’가 되니까, 사람들의 초점이 김지상의 실제 성격을 향하지 않는다.
그 인물상이 ‘방송에서 편집으로 만들어놓은 캐릭터일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그래도 무대가 잘 뽑혀서 다행이지.’
사람들이 더 자주 돌려보는 것은 방송분이 아니라 무대니까 말이다.
조회 수 심사에 포함되었던 〈일일구〉 경연 영상 풀버전은 공개한 지 열흘 남짓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삼천만 조회 수를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일일구〉는 내 개인 직캠 조회 수도 천만을 넘었다. 천만이 무슨 숫자냐면…….
‘스테리나인 뮤직비디오 천만 뷰가 넘은 적이 없다…….’
1차 경연 개인 직캠이 오백만 조회 수를 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방송 화제성이 좋은 것 같다~’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천만이라고 하니까 방송의 화제성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가끔 등골이 오싹하다.
일례로 요즘은 스테리나인 활동 중에 촬영한 자체 콘텐츠나 안무 영상, 활동 비하인드 영상 따위에도 신규 댓글이 활발히 추가되는 중이다.
- 정의헌은 어떻게 이런 컨셉도 어울리네 ㅠ 노래도 너무 좋은데 나는 얘들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 지상아 너 보러 나 여기까지 왔어... 너무 사랑해서 주글것같아 ૮(꒦ິཅ꒦ິ)ა
- 애들이 웃고 있으니까 괜히 내가 맴찢이다 ㅜㅜ 데프아 나오자고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ㅜㅜ 쭉쭉 잘돼서 어나더즈 데뷔까지 함께하자 ♥♥♥
- 데프아 보다가 스테리나인까지 입덕함... 빨리 못 알아봐서 미안해 ㅠㅠㅠ
- 이 영상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안승준 동생들 대하는거 치인다 치여...
음! 잘은 모르겠는데 마음이 묘하게 복잡해진다.
‘그래, 좋은 응원만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을 테니까. 갈 길이 멀다.
더불어 안승준의 개인 직캠 조회 수는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고, 지상이는 현재 주춤하는 추세지만 그래도 조회 수 순서로 정렬하면 10위 안에는 든다. 원래는 우리 셋 중에서는 김지상 인기가 제일 많고 승준이가 3위였는데……. 지난 방송을 계기로 뒤집힌 것 같다.
‘〈일일구〉는 추석 주에 방송되었고, 김지상이 한 〈Sweet〉는 한 주 밀려서 풀버전 영상만 미리 공개했으니까. 그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
하여간 시청자 반응은 좋았다.
그러니 제작진도 태도를 바꾸거나 반대로 더 나쁜 마음을 먹거나 할 성싶다.
‘손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지만.’
나도 이런저런 준비를 해오기는 했는데, 일 복잡해지면 피곤하니까 웬만하면 제작진이 생각을 우호적으로 틀어주면 좋겠다…….
그 무렵 버스가 멈추어 생각은 자연스레 흩어졌다.
“짐 놓고 점심 먹고 바로 강당으로 와주세요. 촬영 바로 있습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나는 터벅터벅 강당으로 향했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간 것은 아니고. 배정받은 방에 찾아가서 짐 풀고, 옷 갈아입고, 새 룸메이트와 인사하고, 점심도 먹은 뒤의 이동이었다.
강당, 〈TOUCH〉라고 적힌 팻말 아래에는 팀원이 반 넘게 모여 있었다. 인원은 아까 확인한지라 놀랍지 않았다.
유일하게 버스에서 인사를 못 건넨 사람, 류희재도 자리에 미리 도착한 채였다.
‘내가 불편한가?’
뭐 어때. 외나무다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본다.
같은 팀이니까 못된 행동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나도 한 번쯤은 류희재랑 같은 팀을 해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실력 있는 사람이랑 같이 작업하는 거 좋지.’
팀원들이 옆에 틈에 끼어 앉으며,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조금 해보았다.
아직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와 소품을 세팅 중인 듯하니 잠시 동안만.
‘사건 정리를 다시 하자.’
슬슬 점검할 때가 되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과 눈앞에 닥친 트러블의 규모 및 종류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