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53화
13. Cherry Bomb(2)
이 방에 찾아온 순서대로 안승준, 정의헌, 김지상. 허 작가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멘트로 떡밥을 던졌다.
합숙과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연습생들의 성격을 요리조리 분석해 보고, 각자가 가장 흔들릴 만한 말을 미리 정해 그대로 제안한 것이다.
허 작가가 그렇게 공들여 질문을 만든 것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조건을 맞춰주는 척, 원하는 것을 베풀어주는 척 포장하지 않으면 너무 협박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방송에서 이미지는 좋게 맞춰줄게.’
예컨대 안승준에게는 그런 말을 건넸다.
그리고 몇 분의 정적 끝에 안승준은 대답했다.
‘으음……. 죄송합니다. TV에 어떻게 나오는지보다는 준비하고 공연하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요즘은.’
‘…….’
‘작가님이 예전에 저보고 말씀해 주신 거 있잖아요. 그……. 주눅 들지 말고 열심히 해보라고요. 저 그 얘기 기억하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저 지금은 되게 괜찮게……. 지내고 있어서요. 대단하지는 않아도. 아, 이런 이야기 왜 하고 있지. 죄송해요. 녹화 안 되고 있는 거 맞죠?’
‘아, 응……. 그렇지. 안 하고 있어.’
‘지금 아니면 말씀 못 드릴 것 같아서, 말이 그냥 튀어나왔나 봐요. 네. 저 열심히 해볼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횡설수설했지만, 속뜻을 파악해 보면 꽤나 정중한 거절이었다.
‘옛날에 한 말이 그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
허 작가는 생각했다. 당시 허 작가가 안승준에게 해주었던 조언은 정말 사소했기 때문이다.
다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그러하듯 〈틴에이지 스타〉도 스태프가 참가자에게 최대한 관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불문율처럼.
하지만 막 입봉한 신입 작가라도 끼어들어야 할 것처럼, 안승준도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다.
〈틴스타〉 방송 초중반 안승준이 심사에서 가사 실수를 하고 심사위원의 ‘패자부활 찬스’로 겨우 살아남았을 때였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안승준에게 그 찬스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토론을 벌였고,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과격해지던 시기.
여기서 그만둘지 고민하고 있다던 중학생 안승준에게 허 작가는 조언해 주었다.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해보라고.
‘그때는 하차하지 말라고 하고, 이제는 하차하라고 하고……. 엄청 이상한 사람 같겠다.’
허 작가는 씁쓸하게 자조하며 자신이 정의헌과 김지상에게 제시한 내용도 회상해 보았다.
지금까지 좋은 캐릭터로만 방송에 나온 안승준에게는 ‘지금 그만두면 이미지만은 지켜주겠다’, 잔정이 많아 보이는 정의헌에게는 ‘멤버들을 위해 그만두어라’.
반면 김지상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하게 데뷔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같이 온 멤버들을 설득해 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너는 살려줄 테니 멤버들을 버려라’였다.
김지상은 낯도 가리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것 같기도 했고, 다른 두 사람에 비해서는 정이 없는 성격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김지상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오히려 세 사람 중 가장 오래 시간을 끈 것이 정의헌인 수준이었다(허 작가가 그 시간 동안 정의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비교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 봐.’
김지상에게 그렇게 요청하고, 허 작가는 치프 프로듀서에게 연락을 넣었다.
CP가 앞서 ‘김지상을 맨 나중에 놓고, 세 사람 다 잘 안 되면 김지상을 내보내지 말고 전화해라’라고 허 작가에게 직접 주문했기 때문이다.
허 작가는 CP가 시키는 대로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종환 형님 아들이라고 들었는데.’
‘…….’
‘고집부려서 일이 틀어져봤자 네 아버님만 슬퍼하시지 않겠냐. 말 들어.’
대충 그렇게 말하는 치프 프로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허 작가는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는지, 만화였다면 안경이 쨍그랑 깨졌을 것이다.
‘미친 새끼! 쓰레기!’
어떻게 아들뻘한테 그런 협박을 하는 거지? 그것도 부모를 운운하면서. 허 작가는 황급히 끼어들어 인사를 드리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겪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지상의 아버지가 다른 방송국의 고위 관계자라는 이야기는 언뜻언뜻 주워들었지만, 소문으로만 여겨왔을 뿐더러 이런 타이밍에 언급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김지상은 대답하지 않았고, CP의 수위 높은 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결국 허 작가의 몫이었다.
‘미안해, 정말. 제안 같은 거 다 잊어줘. 최대한 불이익 없도록 내가 이야기 잘 드려볼게.’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김지상까지 보내준 허윤아 작가가 자괴감과 절망에 빠진 것이 지금.
열심히 자신은 중간직일 뿐이라고 정당화하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호러블한 행동을 보았더니 그 충격으로 도덕심이 돌아온 것이다.
“PD님 오랜만에 TV 방송하신다고 해서 계약한 건데, 여기 회사가 너무 거지발싸개 같아요…….”
“그런 비하인드가 있는 줄은 몰랐네. 알았으면 내가 도망가라고 삐삐 쳐줬을 텐데.”
다시 두 여자의 대화로 돌아와서. 허 작가가 중얼거렸다.
“애들이 믿는 구석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건 부럽기도 하더라고요.”
“오. ‘믿는 구석’이라는 표현, 되게 악당 같다. 쓰레기 따까리 하루로 이 정도면 재능이 있는 거야.”
“으으……. 싫거든요. 저 진짜 오늘 나쁜 짓 너무 많이 해서 멘탈 다 깎였어요.”
휴우우. 허 작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떻게 세 명만 딱 골라서……. 왜 저럴까요?”
“회사에서 서포트하는 게 눈에 너무 잘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지. 견제라고 해야 되나. 회사 간의 갈등?”
“그래도 나름 규모 있는 기업인데, 그렇게 쪼잔하게 일을 처리…….”
……할 수도 있나? 허 작가는 말하는 도중에 생각해 보았다.
회상에 돌입하기 무섭게 사전 준비 기간 포함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경험하고 수습해 온 사건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회사라면 할 듯. 허윤아 작가가 결론지었다.
“……처리할지도요. 회사가 크면 뭐해, 일을 다 주먹구구로 하는데.”
열변을 토하니 순식간에 힘이 쭉 빠졌다. 허 작가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김 PD가 가져온 (아마도 저녁 후식이었을) 생생 과즙 듬뿍 담은 포도 주스를 마시며 허 작가는 흥분을 추슬렀다.
짧은 시간 동안 허 작가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반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허망함이었고 나머지 반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한 구상이었다. 아이디어 정리를 마친 허 작가가 김 PD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PD님, 애들 살릴 방법 정말 없을까요?”
“왜, 애들한테 미안해?”
“에이, 저 그렇게 감정적으로 일하는 사람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제가 좋다고 저 애들 캐스팅 섭외하고 추진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니까 살짝 열이 받는다고나 할까…….”
“열받음이야 말로 진또배기 감정 아닌가??”
“빨리 생각해 봐요, 빨리.”
“아, 알았다. 흠…….”
허 작가에 이어 김 PD도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흠’ 하는 두 사람의 콧소리가 좁은 방 안에 공명했다.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미진 PD의 직책은 사실 ‘현장 연출자’였다.
방송 일을 ‘사전 제작, 촬영, 후반 작업’ 세 도막으로 나눈다면 중간의 ‘촬영’ 파트 담당.
그러나 수십 대의 카메라로 방대한 양을 촬영하고 원하는 그림만 쏙쏙 뽑아 편집하는 〈데프아〉의 특징 탓에, 김미진 PD는 이 방송 내에서 좀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의도해 찍어도 저렇게 편집한 완성본이 TV에 나왔고, 카메라를 여기에 두고 찍어도 저기에 있는 카메라 화면을 확대해서 방송에 썼다.
즉 말만 연출자로, 까놓고 보면 김 PD의 실제 업무는 카메라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김 PD가 의도한 대로 영상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경연 무대. 무대를 잘하면 돼.”
현장 관객도 있고, 시간 제한이 있는 무대의 경우 김 PD가 비교적 영향력 있게 판을 주무를 수 있었다.
나아가 경연 현장 순서를 조정하거나 어떤 카메라로 누군가를 잡을지 결정하는 것 역시 김 PD의 권한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무대가 퀄리티 높게 나온다면, 다음 단계도 배짱 좋게 도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과물이 좋으면 딜을 걸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쪽이 과연 들어줄까요?”
“뭐,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거니까.”
“제가 보기에는 세 명 다 살리는 건 불가능인데……. 그 사람들, 한 명은 무조건 물귀신처럼 잡고 내려갈 거예요.”
현실적이지만 부정적인 소리만 이어나가는 허 작가에 김 PD는 입만 쩝 다셨다.
돌아오는 싱거운 반응에 자신이 너무 투덜거렸다는 것을 깨달은 허 작가가, 슬쩍 말을 돌렸다.
“이번 무대가 잘 나오긴 해야겠네요.”
“맞아. 무대가 잘 나와도 도박이지만, 그것도 안 되면 판돈조차 없는 거야.”
“음, 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고 보니 나한테 돌아올 이득이 없는데 도박이라고 했구나.”
김 PD의 허무한 말에 허 작가는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저희가 발굴한 사람이 유명해지면 기분은 좋잖아요. 애들이 그만큼 잘될 수 있을지~ PD님 보시기에는 어떠냐는 거죠.”
“사람 보는 눈은 나보다는 윤아 네가 더 좋을 것 같은데.”
“뭐어, 의헌이나 지상이 정도면 괜찮게 잘되지 않을까요?”
김 PD는 차근차근 세 인물을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부귀영화라든가, 성공이라거나……. 김미진 PD에게 아직 그런 성취의 개념은 모호했으나.
“글쎄, 어쩌면 셋 다…….”
세 사람 모두 눈에 띄었다. 으레 즐기는 사람은 아무리 주변이 어두워도 잘 보이기 마련이니까.
“셋 다 뜰 수도 있지 않나.”
김 PD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허 작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어도 김미진 PD가 그들에게서 ‘걸어볼 가치’를 발견한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그것도 꽤 선명하게.
* * *
류희재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물론 당황해서 말을 횡설수설하게 한 내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류희재가 다 보거나 들었을 것이라 판단한 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류희재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 뭐 보셨나요.’
‘아뇨.’
‘아, 넵.’
……잠시 떠올려 봤는데 처음에는 내가 더 이상했던 것 같다. 놀라서 그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장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지 않다 못해 진짜 수상했다. 작가님이 내가 방을 나설 때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말해줘’라고 덧붙인 통에 더 그랬다.
그리고 정말 다 보고 들었는지 류희재는 나에게 풀 스윙에 가까운 독설을 던졌다.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까요.’
류희재가 말하는데 나는 조금 멍했다. 단정한 오대오 가르마 앞머리,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 아래에 까만 점을 보며 목소리를 들었다.
‘어디 말은 안 할게요.’
음~ 어쩌지. 제대로 대화해 본 건 처음인데 첫인상 상당히 나쁘게 박혔을 것 같다.
그러나 말마따나 증거가 없기도 하고, 류희재가 나를 덩그러니 두고 그냥 가버려서 일단 놓아주었다.
‘소문나면……. 아니, 이거 내 잘못은 없지 않나?’
남들이 알아도 나랑 류희재랑 사이나 좀 나빠지고 말겠지. 애초에 이미 딱히 사이가 좋지도 않다.
마음이 찝찝했지만 지금은 해결을 미뤄두기로 했다.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긴급 회의다.”
그날 밤, 나는 안승준과 김지상을 불러모았다.
이 사건이 지난 인생의 ‘김지상 탈퇴 사건’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의혹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