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52화
13. Cherry Bomb(1)
‘추리소설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네.’
나는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생각이나 하며 차분히 엄지손가락 끝으로 손바닥을 쓸었다. 끈적하다.
나무 재질의 테이블이라 색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얼룩은 희미한 주황색에 원이 중간에 끊긴 듯 ‘C’ 모양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냄새를 맡을 수는 없으니 시각 정보에만 기대어 대략적으로 연상해 보자면…….
‘오렌지 주스인가.’
오늘 저녁 후식 메뉴로 나왔다. ‘생생 과즙 듬뿍 담은 오렌지 주스’.
자판기나 매점에서도 파는 상표인데, 테이블에 남은 원 크기는 자판기 및 매점 판매용보다는 작은 듯했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던 물건은 ‘저녁으로 나온 오렌지 주스 병’이라고 추측해 봐도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더 확인해 보기 위해, 옆에 놓인 물티슈를 뽑아 손바닥과 테이블 위를 닦는 척 문지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 가까이에 다가갔다는 소리다. 증거품 확인을 위해서.
‘역시 안승준이었어.’
시선을 내리자 문가에 놓인 쓰레기통 안쪽에 고이 들어 있는, 빈 오렌지 주스 병이 보였다. 뚜껑 색은 보라색.
일반적으로 병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의 습기가 아니라 끈끈한 느낌이라서 설마 했는데 정답이었던 것 같다.
‘후식 메뉴로 나온 주스가 애초에 두 종류였거든.’
생생 과즙 듬뿍 담은 오렌지 주스와 같은 시리즈의 포도 주스.
그리고 방금 저녁 시간에 있었던 일. 안승준이 주스 병을 팔꿈치로 쳐서 병뚜껑이 바닥에 떨어지고, 주스 내용물이 약간 넘쳤다.
‘으아아, 휴지 좀!’
‘가지가지 하는구나…….’
옷과 식탁에 흘린 액체는 휴지로 닦고, 떨어뜨린 병뚜껑은 그사이에 누가 밟고 지나가서 그냥 버렸다.
그리고 내가 다 먹고 남은 포도 주스 병뚜껑을 쓰라고 줬다. 포도 향기는 나겠지만, 일단 뚜껑 용도로는 쓸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저 표면이 끈적끈적하고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오렌지 주스 병은 안승준이 먹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케이, 정리한다.’
지금 〈데프아〉 제작진은 내 자진 하차를 이끌어내기 위해 나에게 협박 반 합의 반 제안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한테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안승준에게는 이미 말했고, 어쩌면 김지상에게도 했거나 할 예정으로 보인다.
다른 데뷔 경력이 있는 연습생들도 따로 불러냈을 수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남의 집 사정이 아니고…….
‘위험한 점은 불이익이 아니라, 제안 자체야.’
과연 안승준에게도 나와 같은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같거나 비슷한 제안이라고 가정하면, 애 마음이 흔들려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 제안을 셋 중 누구라도 긍정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우리 사이에는 균열이 생길 것이다.
설마 제작진이 관계의 붕괴를 위해 머리를 썼을 것 같지는 않지만(그렇게 악의가 있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KMC 방송 출연 불이익 정도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진정한 위험 요소란 다름 아닌 제안으로 인한 분열이었다.
‘흠……. 다른 생각은 나중에 한다. 5분 끝.’
처음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명백했으니까.
“윤아 작가님.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응.”
“우선 제 생각해서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해요.”
아, 이건 이제까지 작가님이 ‘나쁜 것은 윗선이고 나는 너를 위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셔서 붙인 말이다.
당연히 작가님도 윗선과 말하고 날 부르셨을 테지만, 이건 지적하면 서로 민망해질 뿐이니 감사할 것은 그냥 감사하기로 하자. 적어도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방식에서는 작가님의 정성이 느껴지니까…….
내 대답을 벌써 예감했는지 작가님의 안색이 차분해졌다.
“그런데 역시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대답은 달리 외칠 만한 좋은 말도 없어서 그저 자아 없는 연습생 전략으로 진행했다.
“합숙이 끝나면 제가 회사에 얘기를…….”
“아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 불편한 주제로 불러내서 미안해.”
“네, 그렇게 해요. 저야말로 좋은 답 들려드리지 못해 죄송하죠.”
작가님은 설득을 길게 이어나가지 않고 바로 끊어냈다. 말다툼이나 분위기가 나빠질 것까지 각오했는데 의외로.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이야기한 걸지도 모르겠다. ‘거절했으니까 네 탓이야’로 몰아가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그나저나 이거, 회사에는 뭐라고 보고하냐.’
매니저팀에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대화에 결론도 없고 증거도 없어서 영 애매하다.
나는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고민하면서, 겉으로는 꾸벅 인사하고 회의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회사에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더라도 멤버들 하고는 대화를 해야 할 듯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
그런데 그때. 시야 저 끄트머리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심쩍은 기분에 고개를 휙 돌려보았다. 그리고.
‘헉.’
눈이 마주쳤다. 계단 끝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류희재, 김지상의 라이벌이었던 그 녀석과.
* * *
“윤아야, 잘됐어?”
“말 걸지 마세요. 지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안승준 다음 정의헌 다음 김지상.
세 사람이 방문하고 떠난 회의실, 〈데프아〉의 현장 연출 담당 PD 김미진이 빼꼼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껏 걱정하는 마음에 보러 왔건만, 방송작가 허윤아는 까칠하게 대답한 뒤 회의실 테이블에 볼을 대고 엎어지기나 했다.
“어휴, 너도 고생이 많다.”
“솔직히 너무 고생이죠, 저! 어떻게 이런 일까지 시키냐고요……. 내가 쪽팔려서 진짜…….”
위에서 지시하지만 않았다면 허 작가도 이런 일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흉은 치프 프로듀서와 방송국 관계자 일동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데프아〉는 실패한 아이돌을 재발굴하는 게 아니라, 신선하지만 소속사 파워가 약한 아이돌 연습생을 키우는 기획이다.
이렇게 활동 경력 있는 아이돌이 호평을 받으면 프로그램 이미지가 곤란해진다.
꼼수로 성공한 놈들은 할 수만 있으면 싹 다 퇴출해 버리고 싶다.
옛날부터 어나더뮤직과 엮이면 좋은 일이 없다, 등등등.
그러면서 연습생들을 섭외한 허 작가를 들들 볶는데, 허 작가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간판이 될 만한 연습생이 부족하다’고 했을 때 활동 중인 아이돌도 잘 찾아서 섭외하라고 시켜댄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불평이라니.
치프 프로듀서, 줄여서 CP는 더 늦기 전에 ‘어나더즈’로 묶이는 세 명을 잘라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애들 없었으면 시청률 이렇게까지 안 뛰었을 텐데.’
그러나 허 작가는 생각이 달랐다. 소재도 신선하고, 본인 캐릭터 잘 살리고, 실력도 좋지 않은가.
이튜브 프로모션, MC 및 트레이너 라인업 공개, 언론 홍보가 1차로 지나간 뒤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는 매 순간이 도박이었다.
연습생 프로필 공개, 시그널 송 단체 동영상 공개, 시그널 송 개인 직캠 공개……. 여기까지는 사실 기대한 만큼의 반응이 오지 않았다.
스테리나인 〈데프아〉 출연 기사로 팬덤이 들썩이고, ‘출연 취소 총공’을 벌인 일? 엄밀히 말해 이는 팬들 사이에서나 화제였다…….
‘그러다가 〈뮤직 채널〉 방송이 대박 친 거잖아.’
정의헌과 김지상, 채호원, 김병석 외 여섯 명이 한 팀으로 촬영한 〈라이브 뮤직 채널〉 특별 편성 무대 말이다.
실력 좋고 퍼포먼스 좋고, 비주얼까지 좋고.
시작은 방송 당일 한 네티즌이 SNS에 김지상이 백덤블링을 돌고 웃는 장면을 짧게 잘라 쇼트 클립으로 올린 글이었다.
– 방금 백플립 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왕자님 얼굴...
그리고 그 글이 SNS에서 1만 번 넘게 공유되며 방송이 입소문을 탄 것이다.
정의헌 팀의 〈뮤직 채널〉 출연 영상은 그렇게 몇백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데프아〉의 시작에 돛을 달아주었다.
‘실제로 1차 데스 매치 투표 참여자 수가 사전투표 참여자 수보다 거의 열 배는 많았어.’
사전투표가 〈뮤직 채널〉 방송 당일 종료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1차 투표는 사실상 〈뮤직 채널〉 이후의 성과였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눈도장을 찍고 시작한 김지상이나 정의헌, 채호원 같은 연습생은 아이돌 경력으로 인기를 얻은 게 아니었다.
방송 자체의 화제성을 높일 만큼 무대를 잘해서였을 뿐.
‘승준이는 그룹으로 묶여서 팬덤이 생긴 것 같기도 한데, 화제가 안 된 것도 아니니까.’
바로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쓰니 기준 폭풍 성장 원탑인 데프아 출연진.jpg’ 게시물이었다.
그저 〈틴에이지 스타〉 파이널 회차 방송 캡처와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공식 프로필 이미지를 나열해 둔 글이었지만, 〈틴스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반가움에 댓글을 남겼다. 게다가 안승준이 좋은 의미로 역변한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 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틴스타때 엄청 애기였다
– 1위였던 예희는 요즘 뭐하지?
– ㅠㅠㅠㅠ 너무너무 잘컸다 키랑 피지컬도 핵존잘 ㅠㅠ 오빠... 승준오빠... ㅠㅠㅠㅠ
– 우와 볼살이 쪽빠졌네 ㅋㅋㅋㅋㅋ 진짜 미남 됐다... 근데 뭐 어디 나오는 거야? 또 서바이벌?
하여간 허 작가는 이제 ‘어나더즈’를 그만 견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미지도 방송 관계자들 보기에나 신선함이 없지, 대중들은 이런 그룹 멤버들 다 처음 본다며 환영하고 있구만.
그보다 소속사가 직접 짜깁기식 편집을 자제해 달라고 연락할 정도면 눈치라도 보는 게 맞지 않나.
다시금 강조하지만, CP가 나서서 지시하지 않았다면 허 작가도 연습생을 따로 불러낼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돼요? 애한테 어떻게 그래요?’
‘허 작가가 연습생들이랑 친하잖아. 말이라도 해보라는 거지.’
그러니까 정의헌의 추측은 사 분의 일 정도는 틀린 셈이었다.
‘거절했으니까 네 탓이다’라고 몰아가려는 의도: 맞다. 이건 치프 프로듀서의 의도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제안한 것: 맞는데, 기대가 없어서 대화를 빨리 마무리한 것은 아니다.
“진짜 일 분만 더 대화했으면 너무 낯부끄러워서 그 양반들이 저한테 뭘 시켰는지까지 다 말했을지도 몰라요, 저.”
단지 정의헌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그리고 이것은 본래 쉽게 무시되고는 한다. 〈데프아〉의 치프 프로듀서 역시 간과한 요소니까).
……다름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과 논리 없는 주장을 버티지 못한 허 작가의 양심.
“꽉 막힌 새끼들이, 어휴. 지들이 방송은 또 얼마나 잘 안다고 갑질이야. 쓰레기 같은 놈들.”
김 PD가 허 작가 대신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으며 방금까지 정의헌이 앉아 있었던 의자에 툭 걸터앉았다.
“PD님 노조 만들면 저도 끼워주세요.”
“그렇지만 너는 이 회사 노동자가 아니잖아…….”
* 토막 상식: 방송작가는 대개 특수고용 근로종사자다.
이 말은 즉 허 작가는 방송국에 소속되지 않고 일 단위로 계약한 프리랜서라는 뜻.
냉소적인 농담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김 PD는 우울한 기운이 풀풀 날리는 주제를 옆으로 환기했다
“애들이 뭐라고 대답했는데?”
김 PD가 그렇게 질문하자, 책상에 엎드려 있던 허 작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싫대요.”
“셋 다?”
“네, 셋 다 싫대요.”
“……오.”
김 PD가 한쪽 눈썹을 올려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예상 밖의 결과였다. 김 PD, 허 작가, 그리고 CP를 포함한 윗선 누구도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고민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셋 다 ‘No’ 대답을 돌려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