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51화
12. Rush Hour(5)
나는 태블릿PC의 홈 버튼을 눌러 바탕화면으로 나와, 새 어플을 로딩했다.
어플의 정체는 바로 ‘기본 캘린더’.
“오늘이 이 날이고.”
내가 손끝으로 9월 두 번째 주 오늘 날짜를 가리켰다. 이번 주에 첫 번째 탈락자 발표식과 전에 촬영해 두었던 트레이너 직업 체험인지 뭔지(체리본 쌤 댄스 스튜디오 가서 새벽에 채호원과 지지고 볶았던 그 촬영 얘기다)……. 그런 콘텐츠가 같이 방송을 탈 거다.
“아마 2차 경연은 이렇게 두 주 방송하겠지?”
9월 셋째 주, 넷째 주. 아직 이해가 안 되는지 안승준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 이렇게 다 보여주고 있는데도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냐.
“봐, 중간에 추석 있잖아.”
그렇다. 9월 셋째 주가 명절이다. 그것도 목요일이 추석이라서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총 닷새를 쉬는 황금 연휴 일정.
지금 〈데프아〉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고, 제작진은 이게 더욱 대중을 잡은 방송이 될 수 있도록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분명하다.
‘승부할 포인트는 본방송이 아니라 바로 재방송.’
간만에 대작을 잡은 KMC는 수요일과 목요일에도 1회부터 재방송 및 스페셜 방송분을 보여주고, 금요일 6회차 방송 이후로 주말 동안에도 경연 분량을 미친 듯이 재방송을 돌릴 것이다.
이 무렵 나는 외국에 있었으니까 직접 본 것은 아닌데, 다시 보기 플랫폼에까지 ‘추석 스페셜 〈데프아〉 무대 몰아보기’ 같은 회차가 따로 있었으니까. 시청률이 더 높아진 현재, 더 가열차게 특집을 준비하면 했지 느슨하게 시간 가게 둘 것 같지는 않다.
“되도록 셋째 주에 방송에 나가야 돼.”
“사람들에게 노출이 많이 되니까?”
“그렇지, 그거지.”
그렇다면 어떤 무대가 먼저 방송에 나가게 될까.
저번 경연은 방송 순서가 순 제멋대로였다. 현장 순서는 현장 감독 마음이고, 방송 순서는 편집한 감독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현장에 몇 번째로 하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고……. 중요한 것은 ‘편집자 마음에 들 수 있는가’였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데뷔한 사람이 둘이나 있는 이 팀이 곱게 보이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방송에 따르면, 어떻게든 나나 안승준, 김지상의 이미지를 깎거나 분량을 죽여놓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스테리나인 멤버들이 실력 있다는 것은 알아.’
그래서 1차 경연에서도 김지상과 내 무대를 앞 회차로 빼고, 안승준 팀의 준비 과정과 무대를 4회 방송의 하이라이트로 배치한 거다.
다시 말해……. 방송의 흥망이 결정되는 중요한 타이밍에 시청률 및 화제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우리 무대를 사용했다는 의미다.
보아하니 경력직 연습생을 고까워하는 마음과 우리 실력에의 평가는 별개다.
아무튼 퀄리티 높은 무대로 시청률은 높여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가 순서 배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앞에 방송하는 무대 특징을 알면 기획에 참고할 수는 있지.”
“형이 생각하는 그 조건이 뭔데.”
“논란 요소 없고, 실력 좋고,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을 것.”
안승준이 짧게 생각하며 자기 노트에 찡그린 눈과 아래로 내려간 입을 그렸다.
“형 말은 그러니까, 해적은 너무 대중성이 없다는 거지…….”
“안 된다고는 안 했다. 매니악하게 빠질 가능성이 높으니 신경 쓰라고.”
‘코스튬에 가까운 무대의상에 진한 화장은 가족들 다 있는 추석에 틀어놓기에 부적절하다’ 정도가 내 의견이었다.
안승준은 어떤 면에서는 아까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복잡해진 얼굴로 메모가 가득한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힌트는 다 줬다.’
뭐, 나머지는 이제 얘가 생각할 몫이겠지. 본인이 직접 찾아야 하는 답도 있는 법이다.
+ + +
연습은 잘 진행되었다.
비록 안승준이 메인래퍼를 가져간 뒤 함경우가 사사건건 안승준에게 눈치를 주고 있지만.
비록 함경우를 유독 예뻐하는 랩 트레이너 원키드가 승준이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며 만날 때마다 독설을 날리지만.
비록 중간 평가 당일 결국 원키드 트레이너의 편애에 질린 체리본 쌤이 카메라 다 있는 앞에서 원키드의 태도를 지적했지만.
그렇게 우리 팀워크에도 금이 가고 트레이너들 사이의 분위기도 바닥에 처박혔지만, 아무튼 나는 괜찮다.
‘팀에 함경우 연습생도 있는데 왜 안승준 연습생이 메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실력 차이가 있기는 있잖아.’
‘원키드 트레이너님,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안승준 연습생은 춤이 안정적이잖아요. 라이브 중요하다는 거 아시면서 왜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아니, 체리본 트레이너님. 라이브 실력으로 따지면 함경우 연습생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그냥 부른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퍼포먼스가 중요하다고요, 원키드 트레이너님.’
‘함경우 연습생, 지금 한번 해봐. 안승준 연습생 파트 춤 추면서. 할 수 있지?’
‘……네? 지금 해요?’
당연히 함경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이건 못 외우는 게 보편적인 거고, 갑자기 남의 파트를 시키는 사람이 문제다. 편집하는 책임자가 과연 앞뒤 사정과 각자의 잘잘못을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어 매 경연을 하드 모드로 겪고 있는 안승준은, 중간 평가 촬영이 끝난 시점 내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나는 진짜 내 분량이 없을 줄 알았어.’
‘이번에도 화려하게 나오겠다, 야.’
‘아, 좋네! 올해 추석의 주인공이 되어보자!’
한 사람이 스트레스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내가 마음이 참 좋지 않다.
안승준은 이대로 무시당하고 살 수는 없다며 맹연습에 돌입했고 나도 내 나름의 힘든 시기를 보냈다.
랩은 잘하는데 춤이 안 되는 친구들이 많아서 자세 봐주고, 안무 외우는 거 도와주고, 내 파트는 내 파트대로 연습하고.
그러다가 틈이 날 때마다 안승준이나 김지상, 채호원 같은 애들이랑 놀기도 하면서.
‘의외로 채호원이랑 꽤 친해졌어…….’
승준이나 지상이가 가깝고 친밀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생들이라서 동갑과는 느낌이 또 다르단 말이지.
‘경쟁의 불안 요인도 많지 않다.’
안승준이 새벽을 꼬박 새워 기획해 가져온 컨셉은 내 마음에도 들었고 팀원들도 좋아하고, 트레이너 호평도 받았다.
내 마음도 초조하지 않았다.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제멋대로 방송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편집을 의식하며 마음 졸이는 것도 꽤 줄었기 때문에.
하여간 그리하여 나는 정말 이것저것 다 괜찮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세 번째 합숙 일자를 넘기고 있었다.
정말 무난하게 이번 경연을 잘 끝낼 수 있을 것처럼 기세가 좋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먹고 왔습니다.”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요. 그런데 전달할 게 있어서.”
……이런 일만 없었다면.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합숙 종료를 하루 남긴 저녁.
내일은 합숙이 끝나고 모레에는 리허설, 그다음 날에는 경연이라는 바쁘기 그지없는 타이밍에 이게 무슨 꼴인지.
이곳은 스태프들이 사용하는 층,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회의실이다.
조명조차 어두운 공간에 단둘이 마주 앉은 주인공은 나와 이 프로그램의 스태프 한 분. 허윤아라는 이름의 방송작가님이시다.
‘남들이 봤으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주의에 주의를 가하며 계단을 올라오긴 했지만, 나는 왜 여기 왔으며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시선을 올려서 카메라가 있을 법한 위치를 쳐다보았다. CCTV는 있지만 제작진이 설치한 것은 아니다.
마이크도 없는 것 같고, 스태프가 숨어 있을 만한 공간도 없어 보이고. 깜짝 카메라일 가능성……. 정말 없나?
“카메라 없고, 촬영도 아니에요. 영 그러면 자리를 옮길까요?”
“아, 아닙니다. 안 그러셔도 될 것 같아요.”
작가님의 제안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침착하게 행동하는 게 우선이다.
‘나 뭐 잘못했나?’
안 했다.
그런데 왜.
“우선 이게 공식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음……. 의헌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지? 그것도 사람 없는 외딴곳에 혼자 불러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는 안승준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아니, 이 정도 일이면 겪고도 말을 안 했을지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으스스한 기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리가 방송을 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게, 음. 방송에는 되게 신경 써야 할 게 많거든. 많은 사람이 참여하니까.”
“예…….”
“그러니까, 총괄 프로듀서님이랑……. 다른 분들이 생각하시기에, 네가……. 으음, 이미지가 부적절한 느낌이 있다나 봐.”
헉헉헉. 잠시만.
말을 너무 조심조심 살펴가며 하셔서 듣는 내가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그래도 꾹 참고 말씀을 들은 결과, 나는 작가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요점을 짧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주제라면 촬영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네…….’
같은 소속사, 같은 그룹으로 데뷔한 멤버가 셋이나 남아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방송 취지 면에서 좋지 않다.
둘도 많은데 셋은 너무 많다. 이 방송을 기획한 사람들은 새로운, 발굴되지 않은, 신선한 인재를 원한다.
그래서 방송국 윗선에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편집을 악의적으로 하거나, 우리에게 불이익을 줄지도 모른다.
“내 말은, 의헌이가 생각을 조금 해준다면……. 두 명까지는 어떻게 올려달라고 내가 말씀을 드려볼게.”
“……아.”
용건은 한 줄로 요약하자면, ‘무슨 핑계를 대든 좋으니 방송 자진 하차를 해라’. 그렇게 하면 동생들은 살려주겠다.
흉흉한 메시지에 비해 태도는 강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내 눈치를 살피는 태도지, 이건.
“제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 회사랑 이야기를…….”
“다음 회차가 방송되기 전에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해서 그래.”
아니, 방송 내일 밤이잖아.
우리가 무슨 문제가 주어지든 재깍재깍 회사를 끼고 입장을 내니까 일부러 합숙 도중에 불러냈나 보다.
“……잠시 5분만요.”
작가님께 그렇게 말하고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여기서 내가 괜히 허세 부리며 세게 나가봤자 작가님도 중간에 끼었을 뿐이라 입장이 곤란하실 거다.
‘으, 골치 아프다.’
자진 하차는……. 할 마음 없다. 방송국에서 독기 품고 투표수 조작해서 떨어뜨린다면 그때 떨어지겠다.
그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내가 이 제안에 ‘No’를 돌려줄 때 나에게 찾아올 불이익은 과연 무엇인가.
‘악편’은 이미 했고(또 할 수야 있겠지만), 진짜 투표수에 손대지 않는 이상 직접적으로 내게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계속 투표수 조작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거 불가능하다. 십여 년 전에 실제 어떤 오디션 서바이벌 방송이 돈 받고 투표수를 멋대로 집계했다가 방통위 징계받고 책임자 잡혀가고, 그 이후로 법적으로 이런저런 시스템이 개편되어서 말이다.
‘가능성이 깔끔하게 제로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겠지. 이렇게 나 불러서 말하는 것만 봐도.’
그러면 방송국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나중에 그룹 활동할 때 방송을 못 나가게 한다든가?’
그런데 이건 방송국이 곧 망할 가능성이 높아서 내가 멋대로 개겨도 이렇다 할 리스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이익이라는 화제는 일단 옆으로 미뤄두자. 다른 방향으로 관점을 바꿔보자고.
‘내가 오기 전에 이 자리에 누가 왔다 갔었는지.’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을 슬쩍 뒤집었다. 손바닥 아래로 둥그런 자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