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50화
12. Rush Hour(4)
보컬 파트는 보컬이 된다는 연습생들에게 바로 넘겨 버리고(나는 결국 보컬3이 되었다), 남은 것은 메인래퍼와 래퍼 1, 2, 3을 정하는 과정.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리더가 꼭 메인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싸비도 아니고 메인래퍼인데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 경우 형이 잘한다는 건 알겠는데. 제가 래퍼3인 건 말이 안 되죠.”
“그러면 내가 메인 아닌 건 말이 되고? 솔직히 내가 여기서 랩 스킬이 제일 좋은데도?”
함경우는 어그로를 잘 끄는 건지, 어그로에 잘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또 다른 연습생과 말싸움이 났다.
다툼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보고 있던 팀원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섰다.
“형, 그만해요.”
“스톱, 스톱. 흥분했다.”
“싸우겠다. 다들 진정 좀 해봐.”
조금만 더 과열되었다면 정말 주먹질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팀원 전원이 합심해 물리적으로 떨어뜨려 놓자 겨우 두 녀석은 정신을 차렸다. 애들은 지금 카메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걸까.
한편 모두가 숨을 고르는 그때, 안승준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같이 노래 한 번만 다시 들어봐요. 곡에 어울리게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형식적인 제안일 수 있어도 이 상황에서는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 제안에 동의했고, 주섬주섬 바닥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팀원 중 하나가 블루투스 스피커와 태블릿PC를 연결하자, 그 시절 유행이었던 하드한 EDM 전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아 있는데 노래가 너무 신나서 부담스럽군…….
Upper-Street with Tae Soo Moon
We are back in 2009 Summer
난데없는 ‘태수 문’은 사람 이름이다. 이 노래 프로듀싱하신 분, 문태수 선배님.
Oh 2009, 벌써 여름이 왔어 준비 완료
쌔끈한 예쁜이 다 내게 Come on
아 기다리고 기다린 헌팅 시즌
섹시한 아가씨 나 왔어 까꿍
여기는 한 글자도 남김없이 다 바꿔야 할 것 같고, 더 들어보자.
그녀가 돌아본다 심장 떨리게
그녀가 다가온다 점점 빠르게
말도 안 돼 다시 봐 눈을 의심해
바다 괴물이 나타났다 긴장해
……흠. 이건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이쯤 되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오랜만에 들어보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하며 충격받은 얼굴이다.
경고 경고 일일구 일일구
떠나라 전화해 일일구
삐뽀 삐뽀 위험해 위험해
도망가 여기는 위험해
이 무렵 전국적으로 분 후크송 열풍 덕분에 후렴구 가사와 멜로디는 상당히 심플하다.
포인트 동작도 의외로 따라 하기 쉽고 간단하다. 수화기를 손에 쥔 듯 주먹을 쥐고, 손등 방향을 앞으로 해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는 안무.
그에 비해서 발동작이 무척 빨라 전체적으로는 어려운 편이지만, 그게 오히려 사람들에게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켜 따라 하려는 애들이 많았다.
당장 나만 해도 이 노래가 나왔을 때 중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이 춤 엄청 추고 다녔다.
‘아, 그러네. 조건을 하나 더 달아야 할 것 같다.’
이 노래는 후렴구를 바꾸면 곡의 너무 많은 부분이 파괴된다. 가사든 춤이든.
‘판타스틱 썸머가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퍼스트릿의 〈일일구〉라는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림이 있을 테니까.
‘쉽지 않겠는데.’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경연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그 조절을 잘해야 한다.
노래가 끝나자 침묵에 휩싸인 일곱 명을 다시 회의 한복판으로 끌고 온 것은 안승준의 한마디였다.
“저희 가사도 다시 쓰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가사는 쓴 사람이 제일 이해도가 높을 거고요.”
아……. 얘 노렸다. 애초에 이 얘기 꺼내려고 완곡을 들어보자고 한 거구나.
안 그런 척 능청스럽게 굴면서 화제를 이끄는, 안승준의 수법을 내가 모를 수가 없다.
“각자 랩메이킹을 해보고, 제일 잘한 사람이 메인래퍼 맡고 디렉팅하는 건 어떨까요.”
안승준이 승부수를 던졌다. ‘래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프라이드를 노골적으로 건드리며.
건방진 도발을 거는, 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 * *
“안 도와주면 사람 아님.”
“싫어, 인마.”
“제발! 형 사람이잖아!”
멋있게 말해서 합의까지 이끌어내더니, 내가 무슨 너의 장사 밑천 비법 양념장이라도 되냐?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나는 안승준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현 위치는 지하 식당. 밤까지 개인 연습을 하며 안무를 다듬다가 뭐라도 마시려고 내려와 봤다.
“어디까지 했어.”
“거의 원점인데용.”
“일단 한 데까지 보여줘 봐.”
안승준이 수기로 채우고 있는 연습일지를 가져와서 읽어보았다. 낙서도 많고, 글씨도 흘림체로 삐뚤빼뚤 난리가 났다.
‘아직 아이디어 스케치 중인가.’
겨우겨우 해독해 봤건만 내용은 본인 말대로 아직 원점. 이 노래의 특징이나 편곡 포인트는 잘 잡은 것 같은데 다듬어 나온 작업물이 없었다.
가사는 내일 오전에 맞춰보기로 했으니 이 정도면 진도가 상당히 느리다고 볼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겠구나.
나는 노트를 돌려주며 말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내기 제안을 다 하셨대.”
“비꼬지 마. 나 지금 예민해서 더 그러면 운다.”
“미안하다……. 도와줄 테니까, 새 페이지 좀.”
안승준이 연습 노트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브레인스토밍을 한번 해볼까.
“일단 메모해 둔 건 나도 다 동의하거든? 시즌 안 맞는 여름 느낌은 최대한 빼고, 후렴 가사랑 리듬은 살리고.”
“BPM도 웬만하면 안 조정하려고. 그 신나는 분위기는 그대로 가고 싶어서.”
“그것도 오케이. 기술은 그 정도만 해두고……. 콘셉트를 잡아보자.”
내가 옆에 놓인 태블릿PC를 끌어와 이튜브 어플을 켜서 안승준에게 건넸다.
여기서 안승준의 놀라운 능력이 펼쳐진다.
“연도는 상관없고, 바다 콘셉트 보이그룹 노래 중에서 힙합 스타일인 거.”
내가 검색어를 넣었다.
“너무 포괄적인데? 그렇게 대충 말하면 생각 안 나지.”
“아, 그러면 바다 키워드랑 청량 빼고. 우리 데뷔 이후 7월부터 9월까지 보이그룹 신곡 중에 네가 좋아한 거 하나만 보여줘.”
“우리 노래는 빼고?”
“어……. 우리 건 지금 상황에 참고할 게 없으니까, 빼고 가자.”
그렇게 주문하자, 안승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튜브로 음악방송 무대 영상을 하나 틀었다.
영상 날짜는 2015년 8월 8일. 이 무대는 아예 의상이 수트라서 우리가 하고 싶은 콘셉트와는 차이가 있지만, 내가 리퀘스트한 사항만 놓고 보면 대단한 적중률이다.
더 대단한 점이 무엇이냐면, 이 영상의 조회 수는 단지 6천 회라는 것.
비교해 줄 세울 의도는 아니지만……. 스테리나인 무대 영상도 보통 몇만 조회 수고, 유명한 아이돌은 몇십에서 몇백만 조회 수는 찍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마이너한 무대까지도 다 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안승준은 보이그룹 데이터베이스, 즉 레퍼런스의 뇌내 저장량이 엄청나게 많다.
승준이는 유명한 그룹은 당연하고 인지도가 높지 않은 아이돌의 노래까지도 다 듣는다. 뮤직비디오도 보고, 무대도 보고, 수록곡도 한두 번씩은 듣는단다.
케이팝에 조예가 깊기로는 우리 그룹 안에서 이영하와 양대산맥이다. 이영하가 히트곡 위주로 좁고 깊게 판다면 안승준은 정확히 그 반대다만.
두 사람 다 만만치 않게 아이돌 꿈을 오래 꾸고, 연습생 생활을 길게 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연구한 양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추정하기로는.
‘덧붙이자면, 나는 그 나이에는 댄서 될 줄 알았으니까……. 외국 노래 위주로 듣고 외웠지.’
아무튼 영상은 계속 재생되었고, 안승준은 영상의 재생 바가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동안 곡과 콘셉트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역시 아는 게 많다. 백과사전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인지라 지식이 바로바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쯤은 같이 마인드맵을 그리면 되니까.
“이 선배님들 이 곡 말고 다른 곡 중에 여름 콘셉트 있어?”
“있긴 있는데 이건 더 청량이라서. 이거.”
안승준이 툭툭 화면을 몇 번 더 두드리자 2013년 7월 중순 발매된 곡이 나온다.
우리가 피하려고 했던 그 분위기의 청량이다. 여기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보자.
“이 노래랑 활동 겹쳤던 노래 중에 반응 좋았던 거 알려줘.”
“그 노래가 옆 팀에서 하는 〈Blue Wave〉인데. 아, 이 노래도 있다.”
2013년 7월 말 발매된 디지털 싱글. 신나는 곡이지만 뛰어놀기보다는 차분한 느낌이 든다.
가사에 ‘여름’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오늘처럼 좋은 날 밤에는 너와 함께하고 싶어’ 전체적인 뉘앙스가 이렇다.
여기서 한 걸음만 옆으로 빠져볼까. 얘는 고급 검색도 되거든.
“크락션 선배님들 중에도 전에 이런 헤어스타일 하셨던 분 계시지 않나?”
“그건 〈기다리나 봐〉 때라서 겨울이야. 어……. 여름 곡으로 파란 머리…….”
안승준이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2012년 9월에 나온 노래를 하나 틀었다.
‘크락션’은 아니고 다른 그룹인데, 말마따나 한 멤버 머리카락이 파란 염색이다. 헤어스타일도 무대 검색이 된다는 게 안승준의 진가다.
“……이 무대 되게 의상 느낌이 괜찮은데.”
“완전히 여름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래. 이때 그, 선배님 중에 한 분이 부친상을 당하셔서 컴백이 다 준비된 채로 3주 밀렸대. 그래서 곡은 여름인데 의상이 가을 삘이잖아.”
안승준이 묻기도 전에 정보를 탈탈 털어냈다. 이 영상은 확실히 팀원들이나 편곡 도와주시는 쌤들에게도 공유할 수 있겠다.
교차 편집된 영상으로 의상을 보며 귀로는 음악을 들었다. 가사 내용은 ‘너와 이 새벽을 달리고 싶어, 너를 좋아해’.
지금까지 검색 결과로 나온 노래와 〈일일구〉, 〈Blue Wave〉, 〈휘파람〉의 공통점이 문득 생각났다.
“왠지 지금까지 나온 노래가 다 사랑 노래네.”
“나는 조금씩 다르다고 보지만? 이성을 주제로 다루고 있긴 하지.”
“그러면 여기서부터 들어가 보자. 너, 사랑 노래는 쓸 수 있겠어?”
잠시 머릿속으로 내가 알던 이 시절 노래를 훑어보았다. 이 시절 아이돌 히트곡은 다수가 ‘너’를 어떻게 하겠다는 가사다.
흠……. 아이돌 노래의 트렌드가 변한 것은 이 뒤의 미래, 나아가 2020년대의 일이긴 하니까.
“지금까지 생각한 건 ‘그렇게 위험한 너라도 쟁취하겠다’ 같은 느낌인데.”
“아예 ‘너’를 빼버리는 건 어때.”
“에엥…….”
“노래하는 ‘나’에 집중하는 거지. 어차피 오디션에서는 ‘나’를 표현해야 되잖아.”
안승준은 연습노트 중앙에 ‘나’라고 글자를 크게 적어넣으면서도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감이 오지 않아서 레퍼런스를 떠올리는 표정이다, 이건. 로맨틱하지 않은 노래가 없지는 않을 텐데 검색 오류로군.
“아이돌 노래 말고, 힙합 생각해 봐. 힙합.”
“아~ 오. 아아, 알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게 주목해라’ 이렇게?”
“그렇지. 어……. 〈Lady Monster〉나 〈으리으리〉 같은 느낌으로.”
힙합의 경우 안승준은 외국 노래를 더 많이 듣지만, 그래도 국내 유행은 꾸준히 체크하는 녀석이므로 예시를 들어주었다.
승준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트에 무언가 적는 사이 나는 옆에 반 접혀 구겨져 있는 〈일일구〉의 가사지를 꺼내 들었다.
경고 경고 일일구 일일구
떠나라 전화해 일일구
글자를 읽는데 멜로디가 머릿속으로 자동 재생된다. 이 가사를 살리고 랩메이킹으로 ‘나’를 첨가한다면.
“이렇게 되겠네. 위험한 ‘나’의 등장, 모두 119를 불러라.”
내가 말하자, 안승준이 펜을 움직이던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내가 가사 속에서 위험 요소로 나오는 거야?”
“브릿지 파트 가사부터 변형 적게 간다면 그렇게 되겠지.”
“바다의 위험한……. 아, 해적?”
안승준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재미있는 키워드를 던졌다.
그러네. 이 과정에서 아예 콘셉트를 정해둬도 나쁘지 않겠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하나 문제가 있어.”
그 전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소한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