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49화 (49/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49화

12. Rush Hour(3)

“걱정이다.”

안승준이 제법 담백하게 말했다. 그런데 얘한테는 진짜 걱정이 될 만한 문제였다.

애초에 안승준이 지난 경연에서 〈속삭여〉를 하게 된 것도 팀원 연령대가 낮고, 다들 대체로 연습 기간이 짧아서가 아니던가. 일부러 다른 팀원들의 스타일에 맞춰 연습 난이도가 높지도 않고 청량한 곡으로 무대를 꾸린 것이다.

하지만 〈속삭여〉 같은 청량 콘셉트가 안승준 개인에게 어울리냐고 하면, 글쎄.

‘절대 아니지.’

아무리 승준이가 귀엽고 어리게 생긴 인상이라고 해도, 얘 본업은 스테리나인 래퍼다.

그룹 활동에서는 스타일이 덜 드러나긴 하지만……. 원래 특기는 때려 박는 발성을 주 무기로 하는 타이트한 붐뱁.

메인래퍼인 강주찬이 충실한 기본기와 저음으로 묵직하게 받쳐주는 래퍼라면 리드래퍼 안승준은 현란하고 그루비한 스킬을 구사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승준이는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힙합을 좋아해서 랩을 하는 녀석이다.

과거 〈틴에이지 스타〉 방송에서도 어린 나이에 올드스쿨 힙합을 좋아하는 특징으로 캐릭터를 얻었을 정도니까.

‘더 늦기 전에 어울리는 장르를 하긴 해야 돼.’

세 번 있는 경연인데 멜로디컬한 청량 콘셉트를 두 번 하기에는 래퍼 안승준이라는 소스가 너무 아깝다.

안승준이 잘하는 것은 힙합 비트에 퍼포먼스가 주가 되는 노래와 스포티하게 무대에서 뛰어노는 콘셉트다. 상큼하고 귀여운 것보다는.

‘그리고 따지자면 나도 퍼포먼스 빡센 곡이 좋다.’

그편이 재미있고, 잘할 수 있으니까.

“잠깐 생각 좀.”

승준이한테는 그렇게 말해주고, 버스가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지금 우리 팀 리더가 된 함경우라는 연습생은 내가 본 〈데프아〉에서는 리더를 맡은 적이 없다. 소속사 심사나 사전 투표 때에도 아슬아슬하게 순위권에 못 들었고, 2차 경연 랜덤 선정에서도 리더가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없었던 내가 제비를 뽑아서인지, 나비효과인지……. 자세한 메커니즘은 모르겠지만, 변화가 생긴 것이다.

‘다른 팀 구성도 변했으니까. 류희재가 바다 콘셉트를 하게 된 일처럼.’

기존에는 김지상과 같은 콘셉트를 하게 되어 지상이를 괴롭혔다고 하니까, 류희재가 지상이랑 멀어지고 나랑 가까워진 건 좋은 일이다. 이쪽은 아직 무슨 일을 일으킨 건 아니니까 당분간은 대기 모드로 지켜보기로 하고.

아무튼 지금은 하나하나 디테일을 과거와 대조해 볼 때가 아니라 아는 정보를 끌어올릴 때다.

‘일단 2차 경연의 선곡 방식.’

‘공간적 배경’에 어울리는 곡은 제작진이 미리 다섯 개씩 골라 목록을 만들었으니, 각 팀은 겹치지 않게 한 곡씩 고르면 된다.

겹치면 가위바위보였나 달리기 같은 미니게임으로 승자를 가린다. 팀 뽑아놓은 것을 보면 함경우가 경쟁력 높은 곡을 원할 것 같지는 않지만.

‘무슨 곡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자.’

브라스 사운드로 시작하는 팝 댄스곡, 바운시한 느낌에 반복을 강조한 후크송, 하우스 기반의 보컬 위주 팝 등등.

콘셉트는 모두 청량인데 그 안에서 조금씩 다른 점은 있다. ‘바다에서 놀자!’와 ‘연인과 걷는 해변’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일렉트로닉에 힙합 비트가 강조된 노래가 있다면……. 보이그룹 ‘어퍼스트릿’의 〈일일구〉 정도 아닐까.

‘……아니, 그런데 이 노래는.’

유명한 노래긴 하다. 무려 2009년 연간 음원 차트 6위라는, 현시대 보이그룹은 꿈꿀 수조차 없는 순위를 기록했으니까.

당시 시대적 배경 자체가 나름의 아이돌 전성기긴 했지만, 이 노래로 어퍼스트릿이라는 그룹은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팬덤 크기를 비약적으로 키웠다.

노래가 성공한 이유는 당시 시청률 황금기를 기록하던 일요 저녁 예능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뭐였더라……. 판타스틱 썸머가요 특집.’

2009년 여름, 예능의 고정 멤버들은 두 달에 걸쳐 대중가요를 프로듀싱하는 특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물론 맨땅에 헤딩 수준은 아니고 그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고생했겠지만.

방송 출연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아이돌, 밴드, 발라드 가수, 트로트 가수 등 다양한 장르의 가수를 섭외해 노래를 만들었고, 콘서트 개최까지 성황리에 방송에 담았다.

‘그때 섭외된 보이그룹 아이돌이 어퍼스트릿이었다.’

프로그램의 화제성은 훌륭하게 그해 여름을 통으로 불태웠고, 음원 차트는 ‘판타스틱 썸머가요’의 진열장이 되었다.

방송으로 유명해진 노래가 차트를 점령해도 되는지 논란이야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유명한 건 좋아. 음악적 완성도가 낮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안승준이 1차 경연에서 했던 〈속삭여〉와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확실히 정석 아이돌 청량과는 거리가 먼 곡이므로.

내가 염려하는 것은 두 가지 포인트였다.

‘첫째, 노래가 코믹하다.’

노래 가사 내용이 이렇다.

‘한여름에는 이성을 꼬셔야지, 나도 연애를 시작하고 싶어서 바다에 갔다, 긴 생머리 뒷모습이 섹시한 그녀가 비키니를 입고 살랑살랑 걸어간다, 나는 그 굴곡진 뒤태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까 으악! 너무 못생겼잖아! 누가 119를 불러주세요!’

그래서 제목이 〈일일구〉…….

‘두 번째 걱정 요소, 그 코믹이 지나치게 구시대적이다…….’

나의 미래에서 온 인간 자아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고 있고, 당연하지만 올해의 시청자들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점점 많은 사람이 〈데프아〉를 보고 있다고 해도 기둥이 되는 것은 10대나 20대 여성에서의 인기인데, 이런 노래 골랐다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2009년이라서 대중이 겨우 눈감아준 가사인 셈이다.

‘우리 집 고딩이 들으면 KMC 본사 건물에 폭탄 심을 듯.’

하지만 〈일일구〉가 아니라면 달리 함경우가 고를 것 같은 노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다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1. 〈속삭여〉와는 콘셉트가 중복되겠지만, 함경우한테 ‘아이돌스러운 거’ 하자고 하기.

2. 〈일일구〉 선곡하고 가사와 콘셉트를 포함해 모든 것을 갈아엎기.

1번은 어쩐지 아쉽고 2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진다. 싹 다 고치자고 해도 다른 팀원들이 받아들여 줄지도 문제고.

‘음……. 여기서부터는 혼자 고민하는 것도 의미 없나.’

그래서 안승준한테 물어봤다.

“팀 리더가 힙합을 하고 싶어 할 것 같아.”

“그런 것 같긴 한데……. 바다 테마에 힙합 가능한 곡이 없지 않나?”

“모르는 거고. 난 퍼포먼스 센 곡을 하고 싶긴 하거든?”

“어, 그거 나도.”

다행히 우리 둘의 지향점은 비슷한 것 같고.

“어느 쪽이 우선인지 지금 정해봐. 안전하게 청량 가거나, 나랑 좀 구르면서 다른 콘셉트 하거나.”

“잠깐……. 구른다는 건?”

“다른 팀원들이랑 의견 충돌 있을 수 있고, 창작해야 될 거 많고, 아이디어 많이 내야 돼.”

“뭐~ 그 정도는 당연히 하지.”

겁을 준 게 아니라 진짜 찾아올 미래인데, 안승준은 몹시 가볍게도 대답했다.

나중에 이런 일 있으면 계약 사항 잘 읽고 사인하기를 바란다, 승준아.

“합의했다. 무르기 없기.”

그렇게 나는 안승준과 악수하고 동맹을 체결했다.

아자. 노예 하나 얻었다.

* * *

“저는 〈일일구〉 싫은데요.”

이럴 줄 알았다. 선곡 과정에서부터 곧 싸움이라도 날 듯 분위기가 험악하다.

함경우가 손수 뽑아온 ‘래퍼’ 포지션 연습생 중 하나가 눈을 부릅뜨고 〈일일구〉를 결사반대하는 상황.

그러나 함경우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얘는 곡 목록에서 〈일일구〉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제대로 꽂힌 것 같다.

“래퍼잖아요. 힙합 스타일이 좋지 않아요?”

“하고 싶긴 하죠. 그런데 다른 할 만한 곡 많잖아요.”

‘다섯 중에서 퍼포먼스가 제일 힘든 곡을 왜 일부러 고르냐’고 주장했다. 진짜 다른 곡에 욕심이 나는 것은 아니고.

춤이 어렵기는 하다. 목록에 있는 다른 곡들처럼 몇 주 활동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고, 한 번의 무대를 위해 만든 곡이니까.

‘차별화를 해야 돼! 다들 노래 너무 잘해! 대신 우리는 뭘 잘하냐! 댄스 위주로 간다! 제일 춤 잘 추는 사람! 앞에 서!’

이런 프로듀싱 의도 덕분에 후렴구도 메인댄서가 가운데에 서서 부르고, 전체적인 댄스 난이도가 은근히 높다.

그러나 함경우는 애초에 저는 〈일일구〉 같은 노래를 하려고 팀원들을 고른 것이라고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밀고 나갔다.

‘중재 좀 하자.’

규칙 자체가 함경우의 편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극하는 것보다는 협의하는 척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게 낫다.

중재도 중재지만, 당장의 목적은 함경우에게 한 가지 확인을 받아내는 것.

“〈일일구〉 한다면 창작 범위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어, 음? 창작은 당연히 한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저는 이번에 편곡이나 창작을 어느 정도 넣고 싶어서요. 그리고 가사도. 지금 9월이고 방송도 가을인데 너무 여름 분위기니까.”

“아! 그런 건 해야죠.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하하!”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힌 함경우는 내 제안을 지지라고 생각한 건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 하나는 좋구나.

‘수정’, ‘편곡’, ‘창작’ 키워드를 꺼내 들자 다른 팀원들도 결국 함경우의 고집에 포기하거나, 한 수 양보하는 그림이 나왔다.

“저희가 선곡한 곡은 어퍼스트릿 선배님들의 〈일일구〉입니다.”

그렇게 곡이 확정되고, 함경우가 제작진이 만들어둔 판넬에 ‘어퍼스트릿 - 일일구’ 글씨가 적힌 우드락 조각을 붙였다.

안승준은 파스텔톤으로 알록달록한 소품들에 적힌 글씨를 눈으로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세 팀이 분위기가 겹치지는 않겠네.”

최종적으로 판넬에 붙은 곡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레일록 - Blue Wave’, ‘칸타빌레 - 휘파람(Whistle)’, 그리고 ‘어퍼스트릿 - 일일구’.

〈일일구〉를 제외하면 다 청량 콘셉트다. 건강한 여름, 연인과의 바다 산책, 그냥 소방차. 제목만 봐도 딱 노선이 다른 게 느껴진다.

“그러면 이제 파트 분배를 해야 할 텐데…….”

함경우가 돌아와서 제작진에게 받은 가사지를 팀원들에게 한 부씩 건네주었다.

보컬 셋, 래퍼 넷, 킬링파트 따로. 고음 애드리브 없는 힙합 곡이라 보컬에는 ‘메인보컬’ 포지션이 없지만, 래퍼는 ‘메인래퍼’가 따로 있다. 보컬이든 래퍼든 큰 숫자로 갈수록 파트가 적어지는 것 같고.

더불어 킬링파트는 후렴구인데 보너스 점수에 가까워서 다른 파트를 하나 맡고 중복해서 맡아야 한다. 지금까지 규칙도 그랬다.

“킬링파트는 의헌이 형이 해주는 게 맞는 것 같고.”

“아, 네. 그러면 제가 보컬3이나 래퍼3으로 들어갈게요.”

“랩도 할 줄 알아요?”

“노래가 더 낫긴 해요. 보컬3 할까?”

파트는 준다고 해서 그냥 바로 주워 먹었다. 원래 보컬1이나 보컬2 정도를 생각했는데 후렴구를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킬링파트는 보컬이나 래퍼 순번이 뒤로 밀리긴 하지만, 그쯤은 누구나 당연하게 지키는 불문율이니까 이상하지도 않았다.

‘후렴 춤 난이도가 특히 높아서 나한테 넘긴 것 같기도 한데.’

대신 구절 자체가 춤을 추며 부르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으니까 각자 장단이 있는 셈이 아닐까.

‘좋게 생각하지, 뭐. 신난다.’

까다롭고 어려운 업무를 억지로 떠맡은 느낌도 없지 않지만, 멋있게 나오면 아무튼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안심하기 무섭게 래퍼 파트 분배에서 이놈들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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