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48화
12. Rush Hour(2)
에어리어. 사전적 의미는 ‘구역’ 혹은 ‘지역’이다.
이거 나름 괜찮다. 옛날에 방송 보면서도 은근히 세계관 설정을 재미있게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팟.
MC의 ‘키워드 소개’가 끝나자마자 천장에 달려있던 조명이 새까맣게 꺼졌다.
“어어?”
“헉!”
깜짝 놀란 연습생들이 허둥대는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리고 무언가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펄럭펄럭 들리더니, 암순응이 다 되었을 때쯤 실내가 다시 밝아졌다.
스튜디오 한가운데 있었던 MC는 옆으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스태프들이 있던 자리도 커다란 스크린으로 가려졌다. 카메라 감독들은 몇 명 구석으로 빠져서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지만,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야를 차단한 것 같았다.
“두 번째 ‘데스 매치’ 참가 후보생을 확인하겠습니다.”
또박또박한 MC의 목소리가 벽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멘트가 끝나게 무섭게 스튜디오 벽면에 영상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고 벽에 집중하기도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 영상이 돌아가며 재생되는 방식이었다.
영상의 소스는 도시의 야경,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 그리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오가는 학교 복도였다.
영상이 끝까지 재생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리플레이되자, 타이밍 맞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한 시간은 10초. 바닥의 사각형 공간에 21명씩 모여주십시오.”
그때 스튜디오 바닥에 서로 색이 다른 세 개의 직사각형이 생겼다. 천장 조명 장치가 쏟아낸 빛으로 만들어진 도형이었다.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째깍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습생들은 다급히 가까운 사각형에 발을 집어넣었다.
‘파란색이 뭐였더라?’
나도 그런 디테일까지는 기억이 안 나서 아무렇게나 행동했다. 제일 가까운 사각형이 파란색이어서 파란색으로 갔다는 얘기다.
초록색으로 가는 사람도 많았고, 김지상과 채호원은 빨간색으로 갔다. 파란 네모로 들어온 것은 나와 안승준……. 류희재도 있군. 이쪽으로 왔구나.
“21명씩 3그룹, 확인 완료했습니다. 세트 이동하겠습니다.”
본인 이름을 한 명씩 부르게 해서 인원과 사람 수를 확인하는 과정이 끝나자, 제작진은 우리에게 옆 세트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옆 세트에는 큼직한 컨테이너 박스가 세 개 놓여 있었다. 문에는 ‘Red’, ‘Green’, ‘Blue’라고 글씨 적힌 종이가 붙어 있고.
PD가 ‘바로 이동한 것처럼 편집할 거예요’라고 귀띔하며 한 방에 그룹 단위로 들어가도록 인원을 나눠주었다.
21명이 모두 컨테이너에 들어오자 컨테이너 조명이 한 번 꺼졌다가 켜졌다.
‘헐.’
꺼진 조명은 천장 전구고, 사위가 밝아진 것은 벽면의 영상 재생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영상이……. 조금 전의 세 가지 영상 중 바닷가 모습만 재생되는 것 아닌가.
‘바다…… 구나?’
아, 그러게. 파란색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컨테이너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로 MC의 목소리가 울렸다.
“63명의 생존자는 새로운 스테이지에서 눈을 뜹니다.”
그렇다. 이번 경연의 키워드는 ‘Area’, 콘셉트의 공간적 배경이 제시된다.
“지금 보이는 장소가 여러분의 현 위치입니다. Red 그룹은 도시, Green 그룹은 학교, 그리고 Blue 그룹은 바다지요. 보이시나요?”
뭐……. 전부 케이팝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키워드긴 하다.
데뷔 때 학교 콘셉트 하고, 두세 번째 활동에 바다 가고, 대여섯 번째 활동부터는 도시 가서 섹시 콘셉트로 컴백하는 게 나름 정석이므로. 도시는 소재가 다양하고 학교는 참고할 레퍼런스가 많다. 이렇게 되면 제일 빈약한 건 ‘바다’가 될 수도 있겠다.
‘청량 콘셉트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바다’ 이미지에 기대하는 건 그런 것들이다 보니.
시원한 여름, 파도 거품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모래밭, 트로피컬한 음료수와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휴양지의 아침.
실제로 내가 보았던 방송에서도 바다 콘셉트 그룹 무대는 전부 청량한 느낌으로 구성되었다.
‘잠깐, 고민 스톱. 이거 나중에 생각한다.’
그쯤 끊어냈다. 우선 팀 구성부터 기다려 보자.
나는 눈을 깜빡이고 MC의 드라마틱한 외침에 집중했다.
“두 번째 데스 매치의 슬로건은 ‘낯선 장소에서 생존하라’!”
MC가 이번 경연 서바이벌의 규칙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 63명을 21명씩 세 그룹으로 나누고, 21명은 7명씩 세 팀으로 나눈다.
* 이번 경연은 같은 그룹 내 7대 7대 7, 3자 경쟁.
* 각 그룹에서 1위 팀은 전원 생존, 2위 팀부터는 생존 명수에 차등 있음.
* 2위 팀과 3위 팀의 생존자는 시청자 투표로 결정. 패자부활 투표 없음.
그러니까 이번 경연에서 내 경쟁 대상은 파란 네모에 들어와 ‘바다’ 배경 콘셉트를 하게 된 연습생들이다.
MC가 설명한 내용은 아니지만, 정보를 덧붙이자면 2위 팀은 7명 중 3명이 살고 3위 팀은 2명이 살아남게 될 거다.
한 그룹 12명씩 생존해서, 다음 라운드로 올라가는 것은 총 36명.
‘이왕이면 목표는 높이 잡는 게 좋겠지. 1위 말고는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이번의 목표. 그룹 경쟁에서 1위를 달성해서 같은 팀 7명 전원 생존하는 것.
MC는 이어서 7명 팀을 구성하는 규칙을 알려주었다.
“우선 팀 리더를 임의로 선정합니다. 대표가 쪽지를 한 장 뽑아주세요.”
MC의 말이 끝나자 빼꼼 열린 컨테이너 문 사이로 바퀴 달린 수레가 돌돌돌 굴러 들어왔다.
수레 위에 놓인 연필꽂이에는 세로로 접힌 종이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누가 내 등을 뒤에서 꾹꾹 밀어준 덕분에 내가 대표가 되어 연필꽂이에서 쪽지를 뽑아 펼쳤다.
쪽지에 적힌 이름은 ‘함경우’로, 나는 MC가 시키는 대로 카메라를 보며 소리내어 글자를 읽어주었다.
“첫 번째 리더가 확정되었습니다. 호명된 리더는 자신을 제외한 여섯 명의 후보생을 지정해 주세요.”
앞으로 나와 내게서 마이크를 전해 받은 것은, 머리를 얼룩덜룩한 민트색으로 염색한 연습생이었다.
전에 봤을 때에는 머리가 검은색이었는데……. 이번 합숙을 맞아 염색한 듯했다. 약품을 직접 발랐는지 색이 조금 애매하긴 하다.
‘춤은 미숙한데 랩을 잘하니까. 랩 실력만으로 따지면 여기서 톱 쓰리 안에는 든다.’
같은 팀을 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 딱 맞춰서 함경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제일 먼저 불리고 그다음으로 안승준, 주태훈, 강성진, 어쩌고저쩌고……. 아니, 잠시만.
‘청량한 거 안 하게?’
멤버가 거의 다 20대인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미지가 다들 전체적으로 너무 강하지 않나?
당장 나만 해도 쌍꺼풀이 없고 턱 라인이 진해서 ‘부드러움’은 넘볼 수도 없고 스타일링으로 힘써도 ‘담백함’ 정도가 한계인 얼굴이다.
함경우가 뽑아놓은 다른 연습생들도 여름 느낌 나는 상큼한 콘셉트를 하기에는 스타일이 다들 한 끗씩 엇나가 있었다.
아, 물론 안승준은 귀엽게 생긴 편이지만……. 얘는 의외로 정통 스타일 래퍼인지라 포지션 보고 뽑은 것 같다.
‘……힙합…… 을 하고 싶은가 본데?’
나름 실력이 좋거나 팬덤이 큰 멤버를 쏙쏙 골라오긴 했다. 노래 잘하는 멤버도 하나 있고, 춤 외길인 나도 뽑혔으니.
하지만 그런 특별 채용을 제외하면 모두 랩 포지션이거나 힙합 스타일이 어울리는 멤버 구성이었다.
인기순 정렬하면 앞 순위일 류희재를 함경우가 뽑지 않은 것은 추정컨대 둘이서 저번 라운드 팀을 같이 해서인 것 같다. 이유까지는 짐작 가지 않지만, 두 번 연속해 팀을 하고 싶지 않을 수는 있으니까.
아무튼, 밀려오는 걱정에 안승준을 힐끔 보았는데, 얘는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그냥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웃는다.
‘좋단다,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라…….’
제작진이 이미 선정된 멤버 몫의 쪽지를 빼내 돌려준 쪽지 뭉치에서 함경우가 두 번째 리더를 뽑았고, 또 여섯 명의 이름이 불렸다.
마지막 팀은 남은 연습생들로 자동 확정되었다. 리더는 제비뽑기로 정해지긴 했지만.
“리더의 역할은 ‘첫 번째 데스 매치’와 유사합니다.”
MC가 그런 멘트로 팀 결정 촬영을 정리했다.
“리더는 선곡과 경연 콘셉트를 결정할 수 있고, 파트 분배 및 최종 결정 우선권을 가집니다.”
아무래도 랜덤 결정이라서 그런가, 이번에는 리더가 무조건 킬링파트를 맡으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권력을 많이 쥐여준다. ‘연대책임’ 키워드를 고려하면 이 편이 더 드라마 뽑기 좋으니까 이해한다.
그나저나 이렇게 하고 싶은 게 확실한 리더한테는 권력을 많이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큰일 났군.
“고생하셨습니다, 선곡과 파트 분배 촬영은 연습실 도착해서 이어가요! 버스로 이동하겠습니다!”
마무리용 자투리 촬영을 몇 분 추가로 한 뒤, 우리는 일시 휴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숙소로 장소를 옮겨서 짐 풀고 다음 촬영하고 저녁을 먹는 스케줄인가 보다.
같은 색 그룹끼리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기 때문에 김지상과는 헤어졌고(여담으로 김지상은 첫 합숙에 이어 두 번째로 채호원과 같은 팀이 되었다), 빈자리에 앉으려는데 안승준이 꾸물꾸물 다가와 새치기해 창가 쪽에 앉았다. 그리고 창틀에 턱을 떡하니 괴고 나를 노려보는 것 아닌가.
‘얘 뭐냐?’
팀 결정 때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삐졌다.
기분부터 달래줄 겸 나는 일단 가방 앞주머니에서 과자 봉지를 하나 꺼내서 승준이에게 건넸다.
“참깨 크래커…….”
“집 식탁에 놓여 있던 거.”
내 취향인 게 아니라고 말해두니까 더 비난할 수도 없는지 조용히 집어먹는다.
버스가 출발하고, 오전부터 시작한 촬영이 피곤했는지 몇몇 연습생들은 바로 잠이 들었고 또 누군가는 지치지도 않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버스 내부에는 카메라가 없어서인지 다들 언어가 자유분방하다.
안승준은 과자 작은 봉지 하나를 먹더니 그 이후로 쭉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다 해결해 줄 수는 없거든? 그래도 일단 말해봐.”
그래서 한번 찔러봤다. 난데없이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어깨가 크게 움찔 떨린다.
안승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주변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를 안 본다는 것을 확인하자 겨우 말하기를.
“화 안 낼 거지.”
“내가 데뷔하고 나서 너한테 화낸 적 있어? 빨리 말해.”
“진짜 개인적인 고민인데.”
내가 대답 없이 눈으로 재촉하자, 승준이는 슬금슬금 다가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니, 나 저번에도 비슷한 거 해서.”
……!
나는 소리 없이 놀랐다. 안승준이 옆으로 떨어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맞다, 이걸 왜 생각을 못 했지?’
1차 경연에서 안승준은 ‘VIK’라는 그룹의 〈속삭여〉라는 사랑스럽고 청량한 노래로 경연을 했다.
〈속삭여〉는 펑키한 베이스 리듬을 바탕으로 한 여름 분위기 곡으로, 안승준의 저번 경연 의상부터가 선원을 모티브로 한 마린룩이었다.
“바다가 겹치는구나.”
이거 조금 곤란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