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46화
11. WONDERLAND(4)
서난영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서 오가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웬만한 일 처리는 법무법인에서 나온 변호사와 매니저팀 팀장, 임정인이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서난영이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서류를 읽어본 뒤 사인을 하는 것 정도.
실제로 법정 공방에 들어간 일도 아니고,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합의를 확실히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합의문에는 양측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예컨대 서난영은 이 일이 끝나면 TV나 라디오, 방송 등에서 학교폭력 이야기를 최대한 자제해야 하고, 김병석은 〈데프아〉를 하차해야 하며, 김병석 개인이나 UIT 엔터테인먼트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단은 그런 명목이다) 이 사건의 폭로자가 ‘스테리나인 난영’임을 알리면 안 된다.
문서에 사인하기 위해 서난영은 몇 번이나 펜을 들었다.
“이 페이지는 갑과 을, 두 분께서 대화를 마치고 서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변호사가 서난영에게 질문했다. 서류에 적힌 합의문에서 ‘갑’은 서난영, ‘을’은 김병석이었다. 문서 위 글자에 불과했지만, 서난영으로서 이 관계의 갑이 되는 것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김병석은 인사만 하고 회의 내내 바깥에서 대기 중이니, 모든 결정권은 서난영에게 있었다.
“서명 뒤에 변경 사항이 생기면 절차가 복잡해져서요.”
서난영이 망설이는 듯하자 변호사가 부연했다.
쉽게 말하면……. 상대보다 우위를 점한 지금, 대화부터 하고 오라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난영은 이번 제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조건을 붙이면서.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난영아.”
“전 괜찮아요. 무슨 일 생기면 안에서 문 두드릴게요.”
임정인 팀장의 염려에도 서난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게 결심한 듯 목소리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서난영이 단호하게 나오자 임정인 팀장이 먼저 그 뜻대로 하게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UIT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도 순순히 수긍했다. 서난영은 사무실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저 ‘어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지 상상했다.
‘저희도 악의가 있어서 연락을 드린 것은 아니고요. 저희 입장에서도 아티스트 보호가 우선이다 보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저희야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의도는 오해하지 않았으니까요. 저희도 앞으로 연습생 관리에 더욱 신경을 쏟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은 단발성 사건이고, 이로 인해 어나더뮤직과 UIT엔터테인먼트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그런 의도를 담은, 입에 발린 말일 거다. 임정인 팀장과 UIT 관계자의 요령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물론 그 정도 겉치레도 없이 분위기가 냉랭하게 끝날 수도 있겠지만, 서난영은 아무래도 좋았으니 무난한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음.’
되짚어 보면 이렇게 좋게 좋게 생각하는 버릇은 성인이 되고 나서 든 것 같았다.
성격 역시 많이 밝아졌다.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 즉 효명고등학교 재학 시절과 비교하자면.
그리고 서난영은 무엇이 자신을 변화하게끔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조금 닮게 된 건가.’
주변 사람들을.
‘솔직히 의헌이 형처럼 사람 덜컥덜컥 쉽게 믿는 건 아직도 못 하겠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드는 법은 알게 되었다.
멤버 형들이나, 친구들, 동생들, 이에 더해 팬들이라든가. 멤버가 아닌 다른 지인도 조금 생겼고.
하지만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서난영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스테리나인 멤버들은 모른다. 팬들도 모른다. 회사 직원들을 포함해 그 지인들은 모두 다 모른다.
“병석이 오랜만이네.”
“너, 이…….”
“반성한다면서, 안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 서난영은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행동한다.
무르지도 않고 당연히 애교도 없고, 주변의 걱정만큼 허술하지도 않다.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어느 쪽이 실제고 어느 쪽이 위선이거나 위악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다만 온도 차는 확실한 편이었다.
쏘아붙이듯 빈정대자 김병석은 반문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눈 밑이 거뭇했고, 실내인데도 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차림이었다.
그러나 서난영은 그다지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앉아.”
서난영이 맞은편 의자를 발로 툭 밀어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튀어나왔고, 김병석은 눈치를 보더니 주섬주섬 자리에 앉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이글거렸지만 할 수 있는 말 따위 없으리라.
“내가, 씨……. 설마설마했는데. 너일 것 같았는데.”
“아……. 어떻게 알았지? 아쉽게.”
진심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비꼬는 말이었다. 아쉬울 건 없었으니까.
“네가 터뜨렸다는 거 다 폭로한다?”
“해보든가. ‘멤버들과 김병석 연습생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상처받은 과거가 정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인터뷰는 나도 할 수 있어.”
“윽…….”
물증이 너무 확실했다. 그러니 서난영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도 김병석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테다. 오히려 익명으로 제보한 행위를 높이 평가해준다면 모를까.
물론 이러려고 모아놓은 증거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 김병석이 아이돌 연습생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시에는 학폭위를 열어 가해자들을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수집한 자료였으니……. 이건 말하자면 재활용이었다.
한 번 제출했던 정보를 다시 꺼내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까닭은 단순히 서난영이 시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문제가 가장 적절할 때 터지도록.’
그 무렵 〈데프아〉의 화제성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높아지고 있었고, 서난영이 판단하기에 〈데프아〉 제작진은 김지상에게 그랬듯 정의헌이나 안승준에게도 마수를 뻗을 것만 같았다.
속셈을 정의헌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정의헌으로서는 ‘시기를 맞추어 논란을 진압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할 게 분명했다.
그는 본인에게 돌아올 이득보다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형이 그 성격이라 나도 덕을 본 거지.’
다정함을 이용한 셈이다. 며칠이나 서난영이 고집을 부리고 버티는데도 정의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난영은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정의헌에게 도움을 받았다.
“네가 의헌이 형한테 먼저 나 안다고 했다면서.”
“……그건, 야. 나도 취해 가지고…….”
“양심도 없다. 날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이름도 바꾸고, 키도 크고, 체형부터 얼굴에 표정까지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변했다.
그런데도 김병석은 ‘서난영’을 알아보았다. ‘서난영’이라고 바꾼 이름을 언급했다.
‘친한 척 굴어대는 거. 그런 모습이 제일 혐오스럽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겠지.’
사실 이렇게 김병석이 말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면, 김병석이 연예인이 되든 말든 서난영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귀찮은 것도 있었고, 이제 그만 엮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주변인이 끼어들게 된 이상 서난영은 감수하기로 했다. 귀찮음도, 과거를 드러내는 일도.
“참.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
“너는 그 형이, 나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모를 것 같았어?”
술 마시고 나온 헛소리라고 했나……. 서난영은 더 뜸 들이지 않고 진실을 말해주었다.
“나 효명 다닐 때 계속 데리러 온 게 그 형이야.”
“……뭐?”
“너 그 형 방송에서 처음 보는 거 아니라고.”
김병석이 인상을 찌푸렸고, 서난영은 과거를 느긋하게 회상해 보았다.
……연습생 시절, 정의헌은 꽤나 엄격했다.
그 무렵 정의헌에게서는 항상 강박과 결벽 사이의 어떤 차가움이 느껴지고는 했다.
‘대충 봐주는 것도 없고, 화를 안 내는데도 괜히 무섭고.’
바로 그 면모 덕분에 선생님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연습생 후배나 동생들은 대개 그를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했다.
그러나 서난영은 그때부터 정의헌의 본성은 사실 따뜻하리라고 믿어왔다.
‘연습생으로 회사에 들어가고……. 한두 달 정도 지나서였나.’
서난영이 춤을 시작한 계기는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엇이라도 몰두할 게 필요한 시기였다. 그렇게 일찍 오디션에 붙어 연습생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 형, 그때부터 눈치 하나는 진짜 빨라.’
힘든 시기였지만, 서난영은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고 낯선 또래들에게 마음을 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정의헌은 서난영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무려 여름부터 겨울까지 두 개 계절 동안 매일같이 효명고등학교로 찾아왔다. 방학을 제외하고 며칠 못 온 날을 제외하더라도 삼 개월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는 서난영에게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가해자들을 겁박하지도 않았다.
‘그러지 않고, 그냥…….’
그냥 정의헌은 모자를 눌러쓰고 교문 앞에 가만히 서서 서난영이 하교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서난영이 교문을 나오면, 같은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다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이 회사에 출근했다.
그는 보란 듯이 행동했다.
가끔은 다른 연습생들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또 가끔 배고프지 않냐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간식거리를 사주기도 했다.
자주 말을 걸었다.
좋아하는 가수나 유행하는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면 드물게 웃었다.
영화를 주제로 대화한 다음 날에는 영화관에 데려가서 영화를 보여주었다. 서너 번 정도. 대개 코미디나 액션 영화였다. 외국 영화보다는 한국 영화를 더 좋아한단다.
서난영은 그때 처음으로,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두 번 보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형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것도 몰랐다.
위로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곁에 있었다.
들었고, 말했고, 사람을 두고 가지 않았다. 매뉴얼이 입력된 로봇 같기도 했고, 벽돌담이나 가로수처럼 사물 같기도 했으며, 가끔은 친구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자 변화가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서난영을 사사건건 쫓아다니던 고질적인 불안감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두 달, 석 달이 지나자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하굣길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자…….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게 고마운 일인 줄도 모를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서난영은 차근차근 회복했다. 이는 매일 찾아오는 시각적인 위협에 김병석과 그 친구들이 주춤한 덕분이기도 했다.
피부에 남은 상처가 얼추 아물었을 때쯤, 서난영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학 한 달 전, 학폭위를 연 것이다.
“……사촌 형이라면서? 둘이 사촌이라고?”
“그걸 믿냐.”
덧붙여. 서난영이 정의헌이 다니던 학교에 관해 알게 된 것은 계화연기예술고등학교로 전학한 뒤였다. 즉 정의헌의 고등학교 졸업 시즌.
그전까지만 해도 서난영은 정의헌이 학교를 마치고 회사 가는 길에 겸사겸사 저를 픽업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니, 거의 반대 방향이었어.’
일부러 돌고 돌아서. 그런데도 번거로운 티 하나 내지 않고.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서난영은 뒤늦게 조금 울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면 그 덕분에.
“찌그러져서 살아, 병석아. 사과 확실히 하고.”
서난영은 이제 이런 말쯤은 떨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둘만 있으면 여전히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지만, 언젠가는 이 증상도 괜찮아질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까닭은 그 형의 공인지, 그 형이 권한 정신과(와 처방받은 약)의 효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는, 한심한 폭력배의 정수리를 응시하며 속으로 웃음 지었다.
용기를 냈다. 이겼다.
그러므로 더는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