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9화
09. Left & Right(4)
첫 방송에서는 예고편에나 겨우 나오더니만, 추진력을 얻기 위해 굽힌 것처럼 그는 2회 방송에서 포텐셜을 터뜨렸다.
소속사 심사는 냅다 깡패처럼 잘했고 이어지는 ‘튜토리얼’ 경기에서도 1위를 거두지 않나, 사전 투표도 10위 안에 들어 첫 경연부터 리더라니. 솔직히 방송 분량이 5분밖에 안 나왔다는 게 원통할 정도로 두드러지는 성과였다.
솔직히 눈에 낀 콩깍지를 빼고(뺄 수 있을 리가 없음) 따지면, 정의헌은 활약에 비해 분량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배부른 놈이 불평한다고 욕먹을 게 뻔하기에 밀월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니야, 차라리 분량 없는 게 사전 투표 순위 높다고 어그로 끌리는 것보다 나아.’
냉정하게 따져서 스테리나인이 진짜 인기가 있었다면 이런 방송, 연습생 신분으로 안 나왔다.
하지만 다른 데뷔한 아이돌들 팬덤과 비교하면 스테리나인 팬덤 규모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소속사도 나름 체계가 있는 편이었고…….
밀월도 그런 점은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임라인에 기존 팬이 어쩌고 말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먹금 무대응의 원칙을 지켰다. 물론 손으로는 핸드폰의 측면 버튼과 음량 버튼을 동시에 누르고는 했지만.
‘진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견제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 누가 몰라?’
언젠가 날 잡아서 공론화할 것이다. 스크린샷이 밀월의 핸드폰 폴더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그는 개인적으로 정의헌•김지상•안승준 ‘어나더즈’의 인기 비결을 얼굴이라고 추리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응원하는 애들이 실력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 역시 뿌듯할 뿐이었다.
따지자면 견제도 애들이 인기가 많으니까 들끓는 것 아니겠는가.
- TOP2 자리의 주인공이 바뀝니다!
밀월은 턱을 괴고 영상에서 나오는 MC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장면이 넘어가고, 튜토리얼 경기 파트가 시작되었다. 밀월이 화면을 탭해 슥슥 넘겼다.
이 지점은 김지상이 편집으로 물을 먹은 딱 거기인데, 이튜브에 영상을 게시한 사람이 변별 없이 정의헌이 안 좋게 나온 부분까지 그대로 영상에 포함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빼놓고 올리기도 애매하긴 한데…….
‘지금 보면 열불 나니까 패스할래!!’
영상이 40초 정도 넘어가고, 이제 ‘전화 통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한국 리얼리티 방송의 세 가지 요소, 갈등•감동•웃음 중 감동 그리고 겸사겸사 웃음을 잡기 위해 연습 장면 중간에 삽입된 기획이었다. 내용 자체는 연습생이 합숙 첫날 제출한 핸드폰을 돌려받고 가족이나 친지에게 연락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어린 연습생들이 울먹이면서 부모님께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짠하긴 했다. 냉소와 밈에 사고가 절여진 그녀조차도 과몰입하는 콘텐츠의 신파 앞에서는 또 무력했던 것이다.
-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물론 밀월의 최애 정의헌은……. 갈등도 감동도 아닌 웃음을 잡았다.
가족들의 전화 반응은 부재중 혹은 거절. 정의헌이 카메라에 대고 메시지 답장을 받은 화면을 보여주었다.
- 봐요, 이 사람들. 아무도 안 받아요. 저 집에 저 빼고 사람 네 명이나 되는데.
녹화 화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작진이 손수 스크린샷을 캡처해 자막 옆에 띄워주었다.
각각 [수업중이다,.], [머임 전화하지마], [나 학교야].
캡처는 프로필 사진도 빈 사진이고 이름도 ‘아버지’, ‘큰동생’, ‘작은동생’이라고 나왔지만, 밀월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정의헌이 언젠가 다른 이야기를 하며 스테리나인 공식 카페에 카톡 캡처를 본인이 업로드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아부지], [은하공주], [막내].
사실 정의헌이 공카에 게시한 캡처에는 동생 이름이 가려져 있었지만, 지금 밀월의 방 책장에 꽂힌 스테리나인 아무 앨범이나 열어서 마지막 ‘Thanks to’ 페이지 확인하면 그 이름도 다 나온다. 정의헌, 정은하, 정해나. 그렇게 삼 남매.
‘존나 판타지……. 동생이 어떻게 공주?’
그리고 밀월의 비공식 입장은 ‘불신’과 ‘기가 참’, ‘귀여움’, ‘뭔가 좋음’이 다 섞인 어디쯤이었다.
- 저 전화 연결되자마자 울 테니까 한 번만 기회 다시 주시면 안 될까요?
영상 속 정의헌은 제작진과 교섭을 시도했다(라고 쓰고 싹싹 빌었다고 읽는다).
[그렇게 받은 두 번째 기회]
두 번째 시도에서 전화가 연결되었다. 카메라에 [마덜♥]이라는 이름이 비쳤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목소리와 함께 들리는 소리가 상당히 비범했다.
- ……엄마 노래방이야?
- 어~ 아들~
요란한 탬버린 소리와 웅웅 울리는 마이크. 정의헌이 핸드폰을 잡고 허무하게 웃었다.
- 나 전화 받으면 바로 울기로 했다고…….
- 미안해~ 방송 중이야?
- 응. 아들한테 감동적인 말 좀 해주면 안 돼?
- 엄마 아까 〈내 사람〉 불러서 100점 나왔다?
- 아니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의헌이 어머니와 무슨 대화를 더 했는지는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런 자막과 함께 통화 분량은 마무리되었다.
[미션 실패!]
그리고 놀랍게도 이 30초가량은 정의헌의 2회차 분량 중 〈트램펄린〉 무대를 뛰어넘어 가장 화제가 되었다.
밀월이 영상 클립과 함께 툿투에 올린 ‘아이돌 유전자는 실존한다’ 한 줄이 대형 연예 커뮤니티에까지 퍼진 것이다.
[스크랩] [데프아] 아이돌 유전자는 실존한다.toot
[툿투 링크 공유]
쓰니 생각: 내사람이 엄청 높고 어려운 곡이라 한 말인듯 ㅋㅋㅋㅋ
댓글 252개
21플# 그렇게 안 생겼는데 말투 엄청 애교스럽다 헐 신기... 가족 앞이라 그런가?? ㅋㅋㅋㅋㅋ
38플# 이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되게 능청맞네 제작진이랑 딜하는 것만 봐도 ㅋㅋㅋㅋㅋㅋ
43플# 어머님이랑 사이 좋은가보네 ㅋㅋㅋ 근데 요즘 세상에 엄청 대가족이다 5명이면 ㄷㄷ
66플# 아니... 노래방 100점은 목소리만 크면 누구나 나오잖아. ㅠㅠ 나였으면 엄마가 말 안들어주고 자기 얘기만 하면 너무 속상했을 것 같은데... 저 연생이 착하게 반응해준 듯
70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머님 계신 곳이 너무 시끄러워요
85플# 서로 장난 텐션인데 댓글 진지하네 ㅎ 가족끼리 사이 좋아보인다 귀엽네
91플# 듬직한 리더 재질인 줄 알았는데 이미지 확 깨짐 이때 ㅋㅋㅋㅋㅋㅋㅋ (좋은 뜻으로)
112플# 이런 상황에서 웃으면서 전화받으면 효자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33플# 그런데 이거 특정 연생한테만 기회 두번줘도 되는거야? 막 웃기에는 맘에 걸리네...
148플# 정의헌 부모님 직업이 뭔데 저 시간에 노래방이셔? 오후에 촬영한 거 아냐?
159플# [[148플]] 이거 어머님 음식점 일하시고 아버님 선생님이었나? 그렇다고 들음
댓글을 읽던 밀월은 그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식점 일…… 은 아니시지 않나?’
댓글은 주방 일하는 아주머니 같은 뉘앙스로 적어놓았는데, 밀월이 알기로 정의헌 어머님은 요식업 사장님에 가까웠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댓글이 그 후 반응 없이 적당히 묻혀서 밀월은 그냥 넘어갔다. 따지고 보면 100% 틀린 말은 아니었고 밀월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가 귀여우니까 됐어…….’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최애의 매력 포인트가 알려지게 되었으니 밀월은 만족했다.
빈 그릇을 싱크대에 집어넣고 수돗물을 담아놓으며 그는 다음 주 방송 내용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에 방청 가서 본 것을 고려하면……. 1차 경연 무대를 실력으로 압살했으니 웬만하면 방송도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를 것 같긴 한데, 김지상 케이스를 보면 어딘가 불안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주에 하려나? 아니면 다다음 주?’
매일 표를 받는 방식이면 일찍 방송에 나오는 게 당연히 유리하지만, 〈데프아〉 투표 방법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하루하루 스트리밍 노동으로 투표권을 벌고 단 며칠에 몰아서 투표하는 방식. 비교적 순서의 중요성이 덜했다.
‘그런데 경연 승리 베네핏도 되게 센 것 같단 말이지?’
정확한 규칙은 다음 방송에 나올 듯했지만, ‘데스 매치’라는 명칭만 보고도 사람들은 온갖 상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중 제일 그럴싸하다고 떠도는 추측은 ‘승리 조는 n+m명 생존, 패배 조는 n명 생존’이었다.
경연 승리가 투표만큼 중요하고, 만약 시청자 스트리밍 점수를 ‘방송 후 24시간 조회 수 집계’ 같은 방식으로 매긴다면 나중에 나오는 편이 유리할 것 같았다. 밀월은 혼자서 계산을 해보려다가 곧 때려치웠다.
‘몰라! 그래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빨리 보고 싶으니까.
툿투에서 어그로 끄는 인간들을 보면 빡이 쳤고, 지난 주말 게릴라 버스킹 스케줄에서 김지상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졌으며, 잘못 찍어서 보정을 있는 힘껏 때려 부어야 하는 사진을 보면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피곤했지만, 이렇게 정의헌 영상 하나만 보면 또 웃음이 나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삶에 대한 애정이 땅끝까지 떨어졌다가 우주까지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그였다.
밀월 ˚₊•—̳͟͞͞♡ @H0N3YM01N
얘들아 내가 밥먹으면서 잠깐 생각해 봤는데
정의헌 사실 04년생아닐까??
아니... 영상하나봤는데 이남자가 04년생으로 보여
기분에 취해 핸드폰으로 툿투 어플을 켜서 글을 하나 올렸더니 30초 만에 이런 답글이 달렸다.
강석이 @ilovemalrang___
밀월아...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뭐, 그렇다. 아무튼 밀월은 괜찮았다.
+ + +
왜 이렇게 바쁘지?
〈데프아〉 방송 3회를 하루 앞둔 지금. 나는 바쁘다.
지난 일주일 내내 바빴다.
금요일, 스테리나인 숙소 가서 방송 같이 보고 외박.
토요일, 〈데프아〉 홍대•신촌•대학로 게릴라 버스킹.
일요일, 〈데프아〉 부산•대구•광주 게릴라 버스킹. 미친 일정 덕분에 외박도 함.
월요일, 회사 가서 매니저팀 면담.
화요일, 회사 가서 연습.
수요일, 약속 나갔다가 외박.
목요일, 약속.
…….
그 와중에 서난영 관련 일도 찾아보고, 회사 오가던 날에는 지상이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밥도 먹였다.
서난영은 이번 주중에 본가로 가 증거 자료로 쓸 만한 고등학생 때 물건들을 찾아본다고 했다. 벌써 주말을 앞두었긴 하지만……. 내가 재촉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조금 기다리는 중이다.
‘체력 달린다.’
주말 이틀에 버스킹 장소 여섯 곳 잡아서 연습생 백 명과 스태프들을 끌고 다니기로 계획한 놈은 부디 조만간 적당한 불행을 겪기를 바란다.
게릴라(라고는 하지만, 공연 며칠 전에 시간도 장소도 다 공지했다) 버스킹 스케줄표를 처음 받았을 때 경악했던 게 지금도 생각난다.
‘이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 같은데. 수정되지 않을까?’
그렇게 방심하고 있던 게 무색하게 모든 일은 스케줄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세부적인 시간 지연이라면 많이 되었지만, 이틀 안에 여섯 장소를 다 돌았다는 소리다.
일요일 저녁쯤 되니 카메라 들고 스케줄 같이 돌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를 넘어 죄송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업계에 이상한 관행 생기지만 않기를…….’
하여간 내 간절한 바람은 바람이고, 핵심은 오늘도 내가 밖이라는 점에 있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잠실 근처 파티룸. 아는 형 생일이라서 이른 저녁 약속이 잡혔다.
예전에 어나더뮤직에서 연습생 하던 형인데……. 현직 아이돌은 아니고 음악 관련 일은 한다.
‘이 형이 언제 그만뒀더라. 2010년 가을? 겨울?’
스테리나인 데뷔는 2014년. 조금 오래 지났다.
따라서 오늘 이곳에 초대받아 온 스나 멤버는 둘밖에 없다.
……나, 그리고 이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