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38화 (38/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8화

09. Left & Right(3)

그렇게까지 무게 잡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진짜 진지한 말이었다면 누워서 안 했어…….’

나는 그저 서난영이 이 사건을 그렇게 괴롭거나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실제로는 꽤 우울한 사건이더라도.

물기가 어려 반들반들한 눈동자가 비스듬한 각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깜빡깜빡. 시선이 마주친다.

“형이 하고 싶은 게 있나 봐.”

“있긴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네 의사지.”

“어려운 걸 맡기네…….”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서난영으로, 녀석은 자세를 바꾸어 벽에 등을 기댄 뒤 턱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안다. 건드리기 쉽지 않은 주제라는 것도, 사건을 대중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현시점 〈데프아〉는 날이 갈수록 점점 화제가 되어가고 있다. 안 그래도 방송 전부터 관심 가지는 사람이 많았는데, 방송이 시작하자 연예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이튜브나 SNS에서도 언급이 쏟아졌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처음 녹화할 때 소속사 심사 곡을 레일록의 〈트램펄린〉으로 고르며 첫 회 방송은 케이팝 팬들 위주로 볼 거라고 예상했던 게……. 사실상 틀렸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우리 분량이 2회차로 밀려서 말이다.

아까 찾아봤더니 ‘트램펄린’ 네 글자가 툿투의 실시간 검색어 같은 시스템, ‘대한민국의 실시간 트렌드’에도 올라갔다고 한다. 온 동네 한국인들이 갑자기 점프하고 싶어서 말 꺼낸 건 아닐 테니 분명 〈데프아〉 때문이다.

‘문제가 제기되면 온갖 곳에서 이야기가 나올 거다.’

물론 대다수는 시비를 구분하겠지만, 비난의 화살을 난영이에게 돌리는 인간도 분명 존재할 테다. 원래 절대적인 머릿수가 많다는 건 언제 어디서 이상한 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소리다.

게다가 김병석은 방송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고(시청자들이 받아들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하필 서난영이 스테리나인 멤버라서……. 순위 상승을 위해 전략적으로 견제한다는 루머까지 나오면 곤란해진다.

‘아니, 견제는 맞긴 하지만. 나 좋으라고 하는 건 또 아니니까.’

그러면 채호원 좋으라고 하는 일인가? 그것도 이 시점에서는 더는 아니지 않나.

걔는 그냥 계기다. 그냥 학교폭력 가해자를 잡아내겠다는 아이디어의 발단. 누가 서바이벌에서 떨어지고 살아남고,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기고 싶어서 짓밟으려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양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알아서가 아니라, 진실을 알아서.

채호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난영을 위해서.

여기서 조금 더 부풀리자면 김병석한테 피해 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난영이가 베개 하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어떻게’가 아니라 ‘하는’에 들어간 강세.

서난영은 자신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내게 묻고 있었다.

“잊고 살고 싶기도 하고……. 저 새끼 엿 먹는 건 보고 싶기도 하고…….”

“말 좀 예쁘게 해라. 너 아이돌이야…….”

“필터링 이미 한 번 한 건데? 어쩌고 새끼 삐리리 됐으면 좋겠다.”

무슨 말을 필터링한 건지 대충 알 것 같아서 더 뭐라고 할 마음도 안 생기는구나.

“난영아.”

“으응.”

서난영은 긴장이 풀리면 곧잘 애교스러운 말투가 된다. 언제부터 든 버릇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네가 이번에 용기를 내줬으면 좋겠어.”

“…….”

“네 의사가 더 중요하다는 말 빈말 아니야. 그냥 이건 형으로서 바라는 거.”

다시 말하자면……. 이 일로 누가 이득을 보고 안 보고, 이런 문제도 슬슬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나는 이쯤 왔으면 김병석이 TV에 그만 나오는 게 맞다고 본다.

아이돌 이미지에 안 맞는다거나 인물이 위험하다든가, 그런 까닭도 아니다.

‘팔려서 사람들에게 예쁨받으면 안 되는 인물도 있는 거다.’

이 친구가 잘되면 난영이를 포함해 그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서난영이 전학을 갔다고 해서 효명고에 따돌림이 없어졌을까?

‘아니, 난영이를 대신할 새로운 대상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같은 가해자가 중학생 때나 그전에도 문제를 일으켰을 확률 또한 있고.

면밀히 따져보면 피해자가 한 명일 가능성은 몹시 적어진다.

이제야 ‘가해자 잡기’를 실행에 옮기는 게 조금 반성이 될 정도다.

“걔 그 정도로 막 살았으면 너 아니어도 누가 터뜨리거든? 진짜, 백 프로.”

안승준이 기억하는, 김병석 소속사에 메일을 보낸 사람이 서난영일 가능성은 작다.

서난영은 아예 행동이 없으면 없었지, 방송이 다 끝나고 데뷔조가 짜였는데 이의를 제기할 녀석은 아니다. 심지어 데뷔조에 친구가 둘이나 있지 않나. 김지상과 안승준.

내가 아는 서난영이라면 그 상황에서 데뷔 시기를 늦출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즉 당장 행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의미다. 행동이 빠를수록 좋은 것과는 별개로.

하지만 그 결론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동기부여도 될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너도 해도 된다고.”

해도 되고, 할 수 있다. 다른 누군가도 하는 일이라면.

서난영은 천장을 봤다가 바닥을 봤다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의헌이 형.”

“어.”

“아……. 그게.”

입은 웃고 있는데, 웃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걔 아직 무섭다?”

난영이가 제 입술을 윗니로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TV에서 저러는 거 보니까 토할 것 같아.”

서난영이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가 숨을 한 번 깊게 내쉬더니, 얼굴을 들었다.

“형이 말하는 대로 용기…… 를 내서 내가 이기면.”

“…….”

“무서운 것도 없어질지 모르잖아……. 그렇지?”

난영아……. 나는 너 인제 괜찮은 줄 알고 부탁한 거다. 그건 의사한테 말해라.

분위기 깨는 마음의 소리를 마음에 잘 묻어주고, 나는 손을 뻗어 서난영이 끼고 있는 베개를 뺏어왔다.

길쭉한 베개 커버에 귀여운 양이 뛰어다니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팬이 준 선물인가 보다.

등 뒤에 베개를 끼워 넣고 천장을 보며 말을 고르는데, 서난영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일단 목표는 걔 방송 하차로 두고.”

“그래, 일단은.”

“과거를 폭로해야 되는데……. 그건 어떻게?”

“방법이야 많지. 인터넷에 익명으로 공론화할 수도 있고, 소속사에 연락할 수도 있고, 하다못해 방송국에 다이렉트로 찌르는 것도 방법이니까. 아직 딱 이거다, 하고 생각한 건 없긴 해.”

어떤 수단도 리스크가 있고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내가 위하고 싶은 사람은, 결국 서난영이기에…….

“네 정보가 최대한 노출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자.”

중요한 것은 단죄나 엄벌보다 난영이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이 우선순위는 절대적이다.

더불어 서난영이 혼자 책임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책임감을 홀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

좁게 보면 〈데프아〉라는 전쟁터에 내가 서난영을 끌어들인 셈이다.

그러니 책임감을 나누자.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 * *

그 순간…… 은 아니고, 그로부터 며칠 뒤.

스테리나인 정의헌의 팬 계정 ‘????????????????????????????????????’의 운영자 밀월여행, 통칭 ‘밀월’은 핸드폰을 보며 늦은 저녁밥을 먹는 중이었다.

넓적한 그릇에 카레와 밥을 말았는지 비볐는지 대충 담아 반찬 없이 퍼먹던 그의,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밀월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절전 모드로 전원을 유지 중이던 컴퓨터 화면을 켰다. 이건 핸드폰 작은 화면과 가상 터치 키패드의 타자 속도로 해결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 컴퓨터 켜게 하네.’

그렇다. 밀월은 지금 야마가 돌았다.

그는 빠른 속도로 마우스를 조작해 화면을 채우고 있던 사진 보정 프로그램 창을 최소화하고, 인터넷을 틀고, 북마크 목록에 저장된 익명 질문 서비스 플랫폼 ‘퀴즈폼’ 사이트를 불러왔다.

퀴즈폼 홈페이지는 툿투 계정과 연동되어 자동 로그인이 된 채였다. 어젯밤에 한 번에 몰아 답했음에도 답변을 기다리는 새 질문이 수십 개가 쌓여 있었고, 밀월은 그중 4개를 골라 캡처 도구 프로그램의 커서를 끌어당겨 캡처했다.

- 근데 밀월아 이번 방송보고도 지상이 품어? 걔 쎄하던데…

- 방송 보고도 눈막귀막 김지상 좋아하는 사람들 진짜 대단하네

- 이야 김지상은 좋겠다 나도 다음생에는 아이돌 하고 이런 호구들 돈 빨아먹어야지 ㅋㅋㅋ

- 정의헌 김지상 친하지도 않아 보이던데 님 굳이 이렇게까지 같이 얘기하는 이유가 뭐임?

그리고 툿투 홈페이지를 열어 분당 400타가 넘는 빠른 속도로 새 글을 작성했다.

밀월 ˚₊•—̳͟͞͞♡ @H0N3YM01N

ㅋㅋㅋ 퀴즈폼에 이런 질문 자꾸 남기지 마세용 익명이라고 고소 안대는거 아님이당 ^.^

이번에 어나더 고소공지 올라왔던데 다들 조심하시길 이 회사는 진짜 고소장 날리니까 ㅋㅋㅋㅋ

아 물론 저도 고소할 수 있다는 거~ 전 어나더보다 시간도 많고 선처도 안하니까 적당히 하세요~

사진 네 장 알차게 첨부해서 공지성 글을 게시하고, 밀월은 그 뒤에 사담을 하나 추가했다.

밀월 ˚₊•—̳͟͞͞♡ @H0N3YM01N

아니 내가 스나 올팬이고 데프아도 어나더즈 only라고 계정 닳도록 말했다 말할때마다 100원씩 받았으면 벌써 등록금 갚았어 미친레이디들아

그리고 나 김지상 아니고 정의헌 최애라고 ㅠ ㅠ 팔로워 많은 계정이니까 걍 만만하게 보고 시비터는 거잖아 ~ ㅅㅂ 어떤남자 얘기할 시간도 부족하니까 진짜 제발 꺼져주라 plz

허용 글자 수를 꽉 채워 글을 올려도 기분이 충분히 풀리지 않아서, 밀월은 계정을 전환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앞으로 하게 될 한탄은 어디에 눈과 귀와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공개 계정에서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껏 망신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은 데에는 이런 판단력과 순발력이 늘 한몫하고 있었다.

화가 많은 미친 여성 ???? @juhbapmura

아니 생각할수록 존나억울하네? 너희 tq 악편이라고 모르냐? 악편이요 악.마.의.편.집. 어? 아쿠마-노-에딧-또-!!!!!

아진심 혈압올라 ㅈㄴ 김지상 개착한거 애 2년동안 본 제가 더 잘알겟나요 꼴랑 방송2번보신 님들이 잘아시겟나요 ㅋㅋ

그리고 어 애들 존나친해~ 정의헌 과보호랭킹 1위멤버 (특: 8위까지 과보호함) 김지상을 니네가몰라서그래 ㅠ 아진심 개.억.울

사실 비공개 계정에서 타인을 저격하듯이 말을 해봤자, 들을 사람은 못 듣고 안 봐도 되는 사람들만 본 뒤 피로감을 느끼게 되지만……. 남이 화를 내는 모습은 얼핏 보면 웃기기도 했기에 그녀의 친구들은 화가 많은 미친 여성을 보통은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글을 다섯 개 정도 더 쏟아낸 밀월은 너무 많은 사람이 보기 전에 투잇을 일괄 삭제한 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진짜 욕을 빼고 글을 쓸 수가 없다…….’

미지근해진 카레를 오로지 연명을 위해 씹으며 밀월은 그래도 고소 공지가 제때, 아니, 즉시라고 해도 될 만큼 빠르게 올라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지에 적힌 ‘아티스트 권익 보호’라는 단어에 경건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밥그릇은 금방 바닥을 보였지만, 밀월은 그래도 이튜브로 새 영상을 틀었다. 이미 본 내용이었지만 또 봐도 새로웠다.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 2회 정의헌 cut (소속사 심사, 튜토리얼, 전화통화, 훈련경기)]

무려 5분 20초나 되는 영상. 조회 수가 벌써 만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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