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6화
09. Left & Right(1)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프아〉 2회 방송은 소속사 심사 2부로 그 포문을 열었다.
예고편과 선공개 영상부터 우리 경연 클립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시작은 다른 소속사 연습생들부터였다.
애초에 지난 방송을 우리 순서가 되기 한참 전에 끊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실제로 30번째인데 20번까지만 하고 방송을 마무리해 놓고, 우리가 21번째로 들어오는 팀인 척 예고편을 뽑았다고 해야 하나.
예능에서 클리셰급으로 자주 쓰는 수법이니까 그러려니 하자.
아무튼 방송 초반은 예고편에 나오지 않았던 연습생들이 채웠다. 이따금 실수한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 보여주는 편집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음향 보정이 잘되어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이돌 ‘경력자’ 후보생들이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를 통해
데뷔에 다시 도전하는 이유]
첫 번째 중간 광고가 끝나고 재시작된 방송. 까만 화면에 냅다 저런 자막이 떴다.
그리고 앞 순서에 지나간, 채호원이나 다른 데뷔 경력을 지닌 연습생들의 인터뷰가 실렸다.
- 제가 2013년에 데뷔했거든요. 그런데 데뷔 동기들이 다 ‘선배님’ 같아요. 저는 활동한 결과물이 거의 없는 셈인데, 같은 해에 데뷔하신 분들은 다 너무 성공하셔 가지고.
- 죄송합니다. 저도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저도, 간절하니까…….
- 회사가 그러더라고요. 너희 그룹은 이제 활동을 안 할 거라고……. 저한테는 〈데프아〉가 마지막 기회예요.
내가 봤던 방송에서는 스테리나인도 저 인터뷰 인원에 끼어 있었는데, 우리는 따로 뺀 모양이다.
대신 그 자리에 채호원 및 스픽스 멤버들의 인터뷰가 들어갔고.
‘그나저나 채호원.’
그룹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마지막 기회?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왜 그렇게까지 본인 그룹을 비관적으로 말하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역시 얘를 무시하기에는 양심이 살살 아프다.’
인터뷰가 지나간 후에는 경력직 아이돌의 무대 하이라이트 장면과 점수가 빠르게 몇 개 편집되어 지나갔다.
마치 이런 인터뷰까지도 앞으로 다가올 ‘어나더뮤직 연습생 3인’ 무대의 밑밥인 것처럼.
[넥스트레코드, TN엔터테인먼트, 메인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의 무대
무편집 Full Ver.은 ‘Play:P’ 어플 및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 〈데프아〉와 KMC 방송국, 산하 매니지먼트 회사는 다 망해도 플레이피는 날개 돋친 듯 잘 나가게 된다.
KMC가 털리면서 같이 조사받았다가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냥 사방 곳곳에 플랫폼 광고를 끼워 넣는 그들을 보면 진정한 기회는 기회주의자에게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우리 나온다.”
안승준이 배달시킨 오리 구이를 본인 앞접시에 두 조각 담아가며 중얼거렸다.
TV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우리가 무대에 올라오고, 우리 셋을 설명하는 영상이 방송되고 있었다.
- 아……. 스테리나인 분들이시네.
- 진짜 잘하는 분들이신데, 왜 여기 나왔지?
맨 처음 우리가 스튜디오에 입장하는 장면을 1화에서 안 보여주더니, 이 대목에 가져와서 교묘하게 연결시켰다.
연습생들이 놀라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스테리나인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오디션 출연’ 등의 기사가 캡처가 화면에 나온다.
하하……. 우리 그룹 이름은 여기서 나오고 앞으로 마지막 화까지 안 나올 테니 이 기회에 많이 봐두자.
- 아이돌 활동을 했었네요?
그 뒤에는 우리가 트레이너들과 주고받은 문답과 다른 연습생들이 우리를 견제하는 인터뷰가 교차로 편집되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인지, 일단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편집이다. 이어 우리의 사전 인터뷰가 나왔다.
[어떻게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인터뷰는 지상이의 답변 위주로 방송을 탔다. 분위기 자체는 앞에 나온 경력직 연습생 인터뷰들이랑 비슷했던 것 같다.
같은 얘기 왜 굳이 두 번 하나 싶은데……. 클립 따서 이튜브 채널에 올리고 싶어서 그런가?
- 자, 스탠바이.
- 트램펄린?
- 이 노래 좋아하는 노래예요!
- ……긴장 풀고.
짧은 순간 세 개의 장면이 한 컷씩 들어갔다. MC의 목소리, 트레이너들의 멘트, 그리고 무대 위에서 내가 멤버들에게 사인 준 것까지.
내 목소리까지 같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엄청 멋있는 저음으로 삽입되었다. 이런 거 살짝 민망한 듯…….
[♬ 트램펄린 (Fallin’)
원곡: 레일록
노래: 어나더뮤직(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디지털 음원 서비스 사이트, ‘뮤즈션’의 로고와 함께 곡 정보가 자막으로 떴다.
무대 자체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만스러운 수준은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고.
편집에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자 우리도 슬슬 긴장을 풀며 TV를 봤고, 한 시간쯤 지나자 저녁 겸 야식도 거의 다 먹었다.
“나 가야겠다.”
“어디 가?”
“11시에 회의 있어서. ‘메이코드’로 하는 거.”
“그거 영상통화 하는 앱 아니야? 너 뭐 작업하냐?”
“어. 내 거는 아니고, 아는 형 곡 피드백.”
그리고 깨작깨작 밥 먹으며 방송을 보던 강주찬이 먼저 일어났다. 원래 이 시기는 강주찬이 여기저기 소개받아 가며 작곡과 프로듀싱을 공부하던 때라, ‘아는 형’도 그 지인들인 듯했다.
다들 놀라서 묻든 말든 개인주의자는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가고(본인 방은 2층인데 시끄럽다면서 노트북 들고 떠났다), 남은 인원 네 명.
방송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소속사 심사가 끝나고 시그널 송 경연 막이 오를 때.
“강주찬 가자마자 내용이 왜 이러지.”
“이거 약간 그런 느낌이네? 폐가에 부적 붙은 거 모르고 떼어냈더니 귀신들 날뛰는 거…….”
“야, 이거 진짜다. 내려가서 다시 데려오자.”
안승준이 투덜거리자 서난영이 난데없는 비유를 들었고, 내가 과장된 맞장구를 쳤다. 김지상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나마 농담이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김지상은 별로 그럴 기분조차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벌써 한 달 넘게 지나서 우리 모두 잊고 살던, 그놈의 백덤블링이 문제였다.
[KMC 〈라이브 뮤직 채널〉에서 최초 공개한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의 시그널 송 〈승전가〉 무대]
우리 팀의 연습 파트는 시그널 송 영상 클립으로 시작되었다.
열 명이 오른 무대, 김지상이 중앙에 나와 백덤블링을 하는 하이라이트 장면과 인터넷의 긍정적인 댓글들 캡처.
저 자막은 〈뮤직 채널〉 출연이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100인 버전 무대는 이튜브 광고도 하고 KMC 방송 하나 끝날 때마다 예고편과 함께 때려 넣어서 사실 100인 무대가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노출이 잘 되었다. 최초라고 해도 한 40분 최초였나?
[화제의 무대를 꾸린 연습생 자체 투표 1위
‘튜토리얼 2조’의 연습 현장은?]
우리 팀이 1위인 것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따지자면 기대를 모으는 좋은 전략인 쪽일까.
- 아이디어 말해봐요.
- 저 하이라이트 파트에 백덤블링이요!
우선 회의 앞부분, 내가 제작진이 심어둔 함정을 짚어내는 장면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이거 트레이너 선생님들한테 칭찬도 들은 부분인데 말이다.
대신……. 김병석이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낸 것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 예,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별명이 도른자였죠.
김병석의 실패한 개그는 제작진과의 인터뷰로 재녹음되어 들어갔다. 학교 이야기 양심 있냐?
- 저도 할 줄 알아서요, 백덤블링.
- 백덤블링 저도 도전해 보고 싶은데요.
그리고 긴장감을 주는 효과음과 함께, 채호원과 김지상이 앞으로 나왔다.
음……. 과장을 조금 보태면, 김병석의 주장을 방해하는 것 같은 연출이었다.
우리가 매트를 깔고 지원자 한 명씩 뛰어보게 한 진행은 방송에 안 나왔다. 내가 중재하던 것이나 세 사람의 포즈 차이는 모두 생략되고, 화면에는 그저 표정이 좋지 않은 지상이와 헛웃음을 짓는 김병석이 잡혔을 뿐이다.
-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제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이 장면에서 자막은 친절히 김지상 이름 위에 ‘경력직’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아이돌 경력직
김지상 후보생과 김병석 후보생의 갈등 발생]
편집이 주체적으로 ‘김병석 VS 김지상’ 구도를 설정한 거다.
- 저는 처음이잖아요. 기회 한 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되나요.
본래 이 말을 들었을 때 지상이는 당황해서 주변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실 방송에서 화면을 채운 것은, 김지상의 정색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나와 채호원의 클로즈업 쇼트가 한 컷씩 스쳐 지나갔다. 언제 찍혔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둘 다 이 순간에 지은 표정은 아니었다. 약점 찔려서 불쾌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많은 부담이 있지만
성공 시 이목을 확실히 끌 수 있는 백덤블링 퍼포먼스]
우리가 강주찬을 도로 데려오느니 마느니 떠드는 사이에도 방송은 점점 진행되었고, 자막과 함께 백덤블링이 들어간 무대가 몇 개 등장했다. 출처 〈라이브 뮤직 채널〉.
김병석, 김지상의 개별 인터뷰가 매끄럽게 다음 장면으로 나왔다.
- 그 형들이 왜 짠해요? 저는 앨범도 못 냈고, 무대도 못 서봤고, 팬덤도 없어요. 저도 진짜……. 열심히 했는데. 제가 더 불쌍한 거 아니에요?
이놈도 이거 저 타이밍에 인터뷰한 내용 아닌 것 같은데.
지이잉–.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 김병석, 메시지 한 통.
[데프아 김병석: 의헌이형 ㅠㅠ 저거 저 인터뷰 훨씬 전에 한 건데 ㅠㅠ 오해입니다!! 억울 ㅠㅠ]
왜 지상이가 아니라 나한테 보낸 건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 본문을 지상이에게 보여주었다.
“빨리 ‘어쩌라고’라고 답 보내줘.”
“어쩌라고 싶은 톡이긴 하지…….”
답장은 정성을 많이 들이지 않는 선에서 대충 보냈다. 그래도 지상이가 원한 답과는 거리가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자, 안승준이 쇠젓가락을 딱딱 소리 나게 맞부딪히며 말했다.
“형이 만만한가.”
“그 반대 아니야?”
그리고 툭 던진 말을 반문으로 되돌려준 게 서난영. 느긋한 말투에, 미소를 지어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비대칭으로 가르마를 탄 갈색 앞머리가 고개를 기울이는 타이밍에 맞춰 눈썹 위로 흔들렸다.
김병석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닐 텐데 이런 반응이라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원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서난영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장난 같기도 했다.
“의헌이 형한테는 좀 잘 보이고 싶은가 봐.”
으음, 넘어가자. 지금은 따져 물을 때가 아니니까.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아마 난영이가 생각한 대로가 맞을 거다.
김지상과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벌써 몇 분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 톡 보내는 것만 봐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고,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김병석의 인터뷰 뒤로 이어서 방송을 탄 김지상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