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3화
08. DO or NOT(2)
그렇게 재개된 촬영. 현장 분위기도 좋고 체리본도 간만에 선생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단 하나 문제가 있었다.
연습생들도 체리본 트레이너도, 다들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말이 너무 길어진 것이다.
“이제 탈락자 발표하잖아요. 여기 스무 명 중 누구는 떨어지고, 올라가고, 또 누구는 데뷔까지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한참 체리본의 히스토리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불현듯 주제가 바뀌었다.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사람 얼굴 한번 봐요.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자신과 다른 것 같아요?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서 떨어진다고 해서 자신이 부족한 게 아니고, 성적이 좋다고 해서 남들을 깔봐도 된다는 거 아니에요.”
거기까지는 평범한 강연 같았다. 오히려 체리본의 높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 탓에 ‘신파를 연출하자’라는 제작진의 의도가 흐려질 정도였다.
“아, 물론 데뷔 중요한 거 맞아요. 목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맞아.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방송에서 이름 알리고, 인기 얻고, 연예인 되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그때, 그는 톤을 바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러나 저러나 체리본은 능숙한 방송인이었다.
“생각해 봐요. 지금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딱 백 명만 겪을 수 있는, 다른 곳에서는 못 해볼 경험을 하는 중이잖아요. 그것도 상황이나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 같이. 이런 친구들 또 어디서 사귀겠어요.”
목소리는 다정했다.
“방송은 책이나 영화, 만화 같은 것과는 달라요. 책은 다 읽고 덮으면 이야기가 끝나고, 영화는 러닝타임이 다 되면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죠. 그런데 방송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해피엔딩도 해피엔딩이 아니고, 새드엔딩도 ‘이렇게 끝났네, 너무 슬퍼!’ 하고 끝낼 수 없는 게 리얼리티예요. 〈데프아〉가 끝나고도 우리들은 계속 살아가야 돼요.”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연습생과 한 명씩 짧게 눈을 맞추었다.
“방송이 끝난 뒤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고요. 데뷔하면 좋겠지만, 데뷔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이어지니까…….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일까. 앞으로의 내 인생을 버티려면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가야 할까. 여러분도 그 고민을 계속해 주세요.”
체리본의 그 말과 함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대형 연습실 여기저기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본이 없기 때문에 페이스가 다소 루즈해지긴 했지만, 발언의 진정성은 반대로 대본이 없어서 빛을 발했다.
체리본은 서둘러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정리했다. 촬영 책임자는 PD였지만, 공간에 대한 권한은 그녀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카메라 및 촬영 장비 철거와 제작진의 퇴근이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연습생들과 체리본 사이에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이어트 도시락이야…….’
‘그러게, 식단이 너무 부실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치킨, 피자, 곱창, 햄버거, 삼겹살, 닭발, 보쌈…….’
‘이거 물어보면 백이면 백 치킨이랑 피자가 꼭 제일 먼저 나오더라. 그러면 이렇게 할래요?’
연습생들이 협찬 도시락으로 불평하는 것을 엿들은 체리본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한 가지 협상을 이끌어냈다.
그 내용이 바로 ‘촬영 끝나고 건물 청소 도와주면 회식 제공’이었다. 메뉴 및 양은 원하는 대로 선택 가능.
다만 시간이 늦어 체리본은 대여섯 명 정도 남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열댓 명이나 집에 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체리본이 판단하기에 반은 진짜 체력이 남아돌아 자원했고, 남은 반은 눈치를 봐서 남은 것 같았다.
‘이 나이는 연습생이어도 정말 많이 먹는구나…….’
체리본에게는 깨달음을, 그의 신용카드에는 깊은 상흔을 남긴 간이 회식은 한밤중에 종료되었다. 다들 어찌나 즐겁게 웃고 떠들었는지, ‘방송에 이런 장면이 나와야 재밌을 텐데’ 싶은 상황도 제법 연출될 정도였다.
연습실 벽걸이 시계의 짧은 바늘이 자정 근처를 가리킬 때.
비로소 촬영 딜레이와 길어진 뒤풀이가 낳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어떡하죠?”
고등학생 나이인 한 연습생이 핸드폰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다 찾아봤어요?”
“네, 없대요. 집 근처까지 가는 막차도 이미 지나갔고…….”
체리본이 초조하게 되묻자, 이번에는 처지가 비슷한 다른 연습생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차가 끊겼다.
서울에 살거나 직행 새벽 버스가 있는 연습생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지만, 지방 내지 경기도 외곽에 거주하는 연습생의 경우 이제 집에 가려면 텔레포트나 어마어마한 액수의 야간 할증 교통비가 필요했다.
체리본은 곤란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는 한편 속으로 생각했다.
‘시간 보고 청소 안 하고 돌아가거나, 뒤풀이 도중에라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직 청소년이니 그런 요령이나 눈치가 부족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나서서 체크해 주지 않은 그녀의 업보였다.
그래도 아주 어린 친구들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각자 부모님의 픽업으로 일찌감치 돌아갔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습생들이 동성만 되었어도 편하게 대하거나 저의 집에서나마 재워줬겠지만, 전부 남학생인 이상 그럴 수도 없어서 체리본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
‘하필 차를 어제 수리 맡겨서……. 어쩌지?’
그러나 인솔자가 되어서 어린 친구에게 막막한 티를 내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때 정의헌이 치고 나왔다.
“막차 끊긴 거 몇 명이야. 걸어가는 애들 아니면 지금 다 찾아보고 손들어봐.”
우물쭈물 거수한 세 명을 눈으로 세더니 그가 말하기를.
“뭘 그렇게 걱정하냐……. 여기 강남이라 호텔, 게스트하우스 엄청 많다.”
그리고 그는 제일 울상인 연습생을 옆에 끼고 핸드폰을 두드렸다. 말해놓고 바로 숙소를 찾아보는 듯했다.
강제로 옆구리에 끼인 연습생이 어깨너머로 정의헌의 화면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질문했다.
“……그런데 왜 네 명 예약이에요? 형 서울 살잖아요.”
“어, 수민아. 집에 수능 보는 애 있어서 나는 이 시간에 들어갈 바에는 안 들어가는 게 낫다.”
그 이상 설명은 없었다. 눈과 손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로 그가 덧붙였다.
“일단 너희 각자 보호자한테 연락부터 하고, 못 오신다고 하면 자고 간다고 말씀드려. 내 번호 알려드리고.”
“형 번호요?”
“누구랑 있는지는 아셔야 할 거 아니야. 내 이름 검색하면 신상 다 나오니까 같이 보내드려.”
그가 말하자 ‘오~ 간지~’와 ‘우~ 허세~’라는 지방 방송이 동시에 송출되었다. 정의헌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헉.’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일 처리에 정신줄을 너무 놓고 있었다. 체리본은 그제야 본인의 역할을 상기했다.
보호자를 자처하는 성인이 있다면(그리고 그가 꽤 신뢰할 만하다면), 그도 새로운 안건을 제시해 볼 수 있었다.
우선 그는 정의헌에게 잠깐 기다릴 것을 요청하고, 복도로 나가 스튜디오 원장인 김산과 짧게 통화를 마쳤다.
‘정의헌이 있다면 오케이’, 김산의 허락도 묘한 신뢰에 기반해 이루어졌다. 체리본은 돌아와서 의견을 냈다.
“네 명이면 차라리 여기서 매트 깔고 자고 가는 건 어때요?”
“그래도 돼요?”
“일고여덟 명까지는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 현금이나 귀중품도 없고, CCTV 다 있어서요. 원장 쌤도 괜찮다고 하시고.”
매트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 그 정체는 접이식 메모리폼 토퍼였다. 시험이나 대회 등을 준비하며 자고 가는 학생이 많아서 구비해 두었는데, 실제로 쓸 일이 많아서 세탁도 자주 하고는 했다.
호텔만큼 편하지는 않겠지만, 하루 쓰고 나서 청소도 하고 가야겠지만,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일찍 비워줘야 하지만, 장점은 돈 안 받는다는 것밖에 없지만…….
체리본은 이 모든 조건과 단점을 추가로 일러주었지만, 연습생 일동은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속없이 좋아했다. 너무 좋은 아이디어란다.
심지어 ‘그러면 저도 자고 갈래요!’라고 손을 드는 이들도 하나둘씩 추가되어 최종 일곱 명이 모였다.
“라면은 끓여 먹어도 되는데, 실내에서 고기는 구우면 안 돼요!”
“네, 살펴 가세요!”
연습생들이 문가에 우글우글 모여서 퇴근하는 체리본을 씩씩하게 배웅했다.
그녀는 자세를 곧게 하고, 가로등이 총총 수 놓인 거리를 걸어갔다.
한 짐이나 덜어낸 걱정 덕분에 체리본은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쟤가 왜 스태프들한테 인기 많은지는 알겠다.’
길고양이가 다니던 좁은 골목에서부터 큰길로 발을 옮기며 그는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소망해 보기도 했다.
친절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새벽을 가르는 마음이 산뜻했기에, 바람도 가벼웠다.
* * *
“장롱이 잠겨 있다.”
매트리스가 들어 있을 장롱 문을 힘주어 열어보던 정의헌이, 몇 번 시도해 본 뒤에 돌아와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댄스 스튜디오에서 1박이 결정되자, 회식 때부터 높아진 모두의 텐션은 하늘을 뚫을 듯 높아졌다. 다들 마치 반 친구들과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된 중학생들 같았다.
채호원은 천성적인 내향 성향 탓에 중학생 시절에도 수학여행을 두려워했지만, 공간을 빌려주겠다는 체리본 트레이너의 말은 기꺼웠다. 택시를 탈 수 있더라도 지하철이 운행 종료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연예인이나 되어서 돈을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현재 수입이 없는 그에게는 택시비도 다 사치였다.
아무튼, 체리본 트레이너가 퇴근하자 남은 인원은 일을 나눴다.
그렇게 몇 명은 근처 편의점에서 클렌징과 세면도구 따위를 사오기로 하고, 그 외에는 잘 곳을 정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실내에 남겨진 멤버 중 채호원과 정의헌의 역할은 ‘바닥에 깔 매트 가져오기’였다.
“열쇠 사무실에 있대. 찾아서 매트 가지고 올게.”
“오케이요!”
“가자, 채소야.”
정의헌은 체리본 트레이너와 잠시 문자를 주고받더니, 곧 구석에 앉은 채호원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3층으로 향해 사무실에 들어섰다. 정의헌은 마치 실내 구조를 다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길 찾기를 주도했고, 채호원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평소 같으면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먼저 던질 정의헌이지만, 시간이 늦어 피곤한지 오늘은 그도 말이 없었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는 것만 봐도……. 이래저래 꽤 긴장이 풀린 사람 같았다.
반면 채호원은 사무실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고민했다. 그리고 두루뭉술한 결론을 내렸다.
지금이 딱 적절한 시기인 것 같다고.
“정의헌.”
“오냐.”
채호원이 문가에 서서 상대의 이름을 불렀고, 책장을 둘러보던 정의헌이 돌아보지도 않고 툭 대답했다.
채호원은 먼저 불러놓고도 머뭇머뭇 한참을 다시 고민했다. 망설임 끝에 나온 말은 이런 내용.
“……너는 정현이 형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한때 채호원과 같은 팀이었던, 탈퇴한 리더 ‘앤섬’에 관한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