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2화
08. DO or NOT(1)
복잡한 것 없이 첫 번째 경연 준비로 고생했을 연습생들에게 쉬고 친목을 다질 시간을 주는 것만이 이번 촬영의 목적이다.
반전도 없고 자극적인 요소도 없고, 멘토인 트레이너의 작업 공간에 방문해 구경하고 밥 먹고 헤어지는 콘텐츠. 그동안 듣기 어려웠던 업계 이야기나 프로의 조언도 듣고,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그런 그림이 이상적이지 않을까.
다들 혼나고 깨진 경험 때문에 트레이너 선생님들을 꽤 무서워하던데, 이번 기회에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당히 정신을 풀어줘야만 나오는 드라마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하여튼, 명목 자체는 첫 경연의 회포를 푸는 것이다.’
무작위로 정해진 트레이너 한 명이 두 팀씩 담당해서 한나절쯤 데리고 있게 되는데, 이게 하필 첫 경연 대진표대로 묶인다.
다시 말해 우리 팀은 채호원 팀과 같은 트레이너한테 배정되었다. 아직 조금 서먹한데 괜찮을까 모르겠군.
‘그나저나 길이 뭔가 익숙한데.’
택시에서 내린 순간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확실해졌다.
건물 일 층에 걸린 간판 가라사대, 〈Romeo Dance Studio〉.
평소에는 남의 차 얻어 타서 늘 주차장 방향으로 내렸으니까 지도를 보고도 감을 못 잡았다.
문을 열고 1층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겨주었다.
“정의헌 연습생, 3등 도착!”
“안녕하세요. 혹시 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죠?”
내가 묻자 〈데프아〉의 댄스 트레이너, 체리본이 고개를 저었다.
체리본 쌤은 스트릿 댄스 신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특이한 캐릭터로 각종 예능에서 인기를 얻은 라이징 스타다. 잦은 방송 활동 덕분에 〈데프아〉 트레이너 중에서는 케이팝 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아닐까.
리본을 길게 휘감아 묶는 양갈래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라 보통 방송은 양갈래로 참여하시는데, 오늘은 포니테일로 묶으셨다. 의상도 전체적으로 편한 캐주얼 스타일이고.
‘여기가 체리본 쌤의 본진이라는 건가. 하긴 그렇겠지.’
솔직히 어색한 마음도 든다. 꽤 시간이 되긴 했지만, 나는 이 장소와 인연이 조금 있었으므로.
평소라면 사람이 가득한 스튜디오인데 촬영 때문에 하루 문을 닫았나 보다.
“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저 오늘 헤메 다 하고 와서 시간 좀 남아요.”
“오, 셀프로 했어요? 헤어, 메이크업 둘 다 너무 잘 됐다.”
“셀프로 하면 이렇게 안 나오죠. 머리카락 끝이 조금 상해서 샵에서 받고 왔어요.”
스태프분들께 인사도 드리고……. 여기 스태프분들은 인사를 잘 받아주시는 편이다.
이래저래 다들 촬영 준비로 꽤 바빠 보이셔서 커피 심부름도 자처했다. 한 턱 낸 것까지는 아니고 배달만이지만.
일찍 도착한 애들 꼬셔서 같이 후다닥 양손 가득 캐리어를 들고 왔더니, 촬영 시작 지연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인 PD님이 오시는 길에 일이 조금 생겼다네요.”
스태프 한 분이 커피를 받으며 그런 전달사항을 알려주었다.
흠……. 마침 잘 됐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둔 4구 커피 캐리어를 집어 들고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커피 왔습니다~”
그 길로 내가 찾아간 사람은 조명 감독님. 마침 촬영이 진행될 1층 대형 연습실에 조명 장치를 세팅하는 중이시다.
바로 커피를 건네드리고, 그 자리의 다른 스태프분들께도 캐리어를 돌리고, 나는 슬쩍 조명 감독님 옆으로 되돌아왔다.
그 잠시 사이에 큰 사이즈 컵을 다 비우시다니……. 이런 분한테 내가 막 귀찮게 굴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말을 안 할 수도 없지 않나.’
애초에 그렇게 복잡한 용건도 아니었다.
“감독님,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어? 뭔데요?”
‘아니, 왜 연습생이 나한테 말을 걸지’라는 심정이 십분 느껴지는 표정이다.
“제가 아까 들어오는 길에 잠깐 봤는데, 복도에 조명 놓인 게 조금 위험해 보여서요. 감독님 괜찮으시면 촬영 시작하기 전에 살짝만 안쪽으로 옮겨도 될까요?”
나름 용기 내서 말씀드린 건데, 조명 감독님의 휘둥그레 커진 눈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새벽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같기는 하다. 나는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이게 오지랖일 수도 있는데, 원래 조명 장치가 되게 뜨겁잖아요. 그런데 여기 복도가 좁고 벽 소재도 약해서 화재 발생 위험이 크다고 하더라고요. 전에 불난 적도 몇 번 있고요.”
“오……. 진짜요?”
“조금 된 일이라서 지금은 안전할 수도 있지만요. 그래도 촬영 시간 긴데, 혹시 몰라서 말씀드렸어요.”
내가 말씀을 드리자 조명 감독님은 복도로 나가 이것저것 살펴보시다가, 제안에 긍정의 답을 내려주셨다.
그렇게 조명팀 스태프들과 함께 조명 위치를 조절하고 다시 대기실로 향하려는 그때.
“우와, 정의헌 연습생.”
체리본 트레이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대화를 듣고 있었나 보다.
“그 얘기 진짜였구나?”
……음, 이거 아무래도 딱 걸린 것 같지.
내 대답이 늦자 체리본 쌤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정정하셨다.
“아니, 아니. 이상한 거 아니고. 지난주에 방송 나온 날에 둘이 같이 봤는데, 산 쌤이 의헌이를 알아보더라고요. 의헌이가 산 쌤 수제자라고 하던데 진짜예요?”
금요일 밤 열 시 방송을 왜 둘이 같이 보시는 건데요? 충격적인 정보가 슬그머니 내 뒤통수를 때리고 지나간다.
그보다 이걸 제자라고 해야 되는 건가. 체리본 쌤이 생각하시는 것과 진실은 거리가 약간 있으리라고 본다.
김산 선생님은 이곳 로메오 스튜디오 겸 아카데미의 원장인데, 엄밀히 말해 나는 여기 학생 출신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산 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 맞긴 해.’
뭐가 좀 애매하지만, 지금은 산 쌤 의견에 동의해 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숨겨야 할 과거는 아니니까.
“제가 원래 중학생 때 제이엘비에서 배웠거든요.”
제이엘비 댄스 학원. 칠팔 년쯤 전에 산 쌤이 전임 강사로 계셨던 곳이다.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춤을 익혔으니까……. 제이엘비도 한두 해는 다녔나.
내 경우 제이엘비에 돈 내고 다닌 건 아니지만, 모르던 스킬을 배운 것은 사실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 산 쌤 독립하시면서 이사 도와드리고, 강남 올 일 있으면 연습실도 빌려 쓰고 그랬어요.”
“아하……. 난 이제 오 년째니까 의헌이가 내 선배님이네?”
“쌤은 선생님이고, 저는 학생이었는데요?”
기적의 계산법이다…….
“어쨌든,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에요. 워낙 옛날이라. 여기도 많이 달라졌을걸요.”
“그렇구나. 사실 저번 겨울에도 여기 복도에서 불날 뻔했거든요? 그거 아는 줄 알았지.”
“그건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잡으세요. 그게 원인이니까.”
체리본 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흡연자처럼 웃더니, ‘아, 맞다’ 하고 주제를 돌렸다.
“의헌이는 그러면 탱크도 몰라요?”
“어? 탱크 아직 여기 있어요?”
탱크는 회색 털에 까만 줄무늬를 가진 길고양이다. 통통하고 주둥이가 길어서 아기 돼지처럼 생겼다.
밤만 되면 주먹만 한 새끼가 어미도 없이 근처를 돌아다녀서, 로메오 스튜디오 강사와 학생들이 종종 밥을 챙겨주고는 했다. 근처 동물병원에 데려가 예방접종에 중성화시켜 줬다는 것도 내가 따라가 봐서 안다.
작명은 산 쌤이 인터넷에 검색해서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검색어가 ‘고양이 이름 추천’이 아니라 ‘강아지 이름 추천’이었다는 사소한 비하인드가 있다. 쌤이 말씀하시기를 실수였단다.
내가 알은체를 하자 체리본 쌤이 핸드폰을 켜서 슥슥 만지더니 화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짠~”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는 회색 고양이 사진.
“……왜 이렇게 작아요?”
그런데 애가 야위다 못해 반쪽이 됐다.
줄무늬 모양이나 눈동자 색을 보면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는데, 사진이 찍힌 배경도 심지어 이불 위다.
“과체중이 고양이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엄청 관리했거든요. 지금은 건강해졌죠.”
“입양하셨어요?”
“나 말고 산 쌤이. 길에서 다친 거 치료하는 동안 집에 데려왔더니 나갈 생각을 안 하더래.”
“많이 놀랐었나 보네요…….”
그런데 애가 진짜 반쪽이 됐다. 말마따나 건강해 보이긴 하지만.
내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체리본 쌤이 사진을 몇 장 더 보여주셨다.
핸드폰 갤러리를 휙휙 넘기며 사진마다 어떻게 찍었는지 설명을 덧붙이던 체리본 쌤이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고민인 게, 탱크가 내가 주는 간식은 안 먹으려고 하더라고요. 왜인지 알 것 같아요?”
이어지는 간식 급여 에피소드를 들어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유가 있었다.
“그거, 걔가 사람이 아니라 음식을 가리는 걸로 알아요.”
“음식을?”
“밥은 아무거나 먹는데, 간식은 싫은 건 뱉고 자기 좋아하는 것만 먹거든요. 그,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뛰어간 대기실, 구석에 놓아둔 가방 속에는 ‘그것’이 들어 있었다. ‘바삭바삭 맛있는 고양이 스낵 양고기 맛’.
포장도 뜯지 않은 봉지를 그대로 들어, 곧바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체리본 쌤에게 가져다 드렸다.
“이거 편의점에서는 안 팔고 저 밑에 24시간 마트나 인터넷에는 있는데, 똑같은 거 아니어도 양고기 맛이면 다 돼요.”
“이런 거 줘도 돼? 고마워요…….”
“어차피 탱크 만날까 싶어서 가져온 거라 괜찮아요. 드릴게요.”
체리본 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만 한 봉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탱크가 잘 지내고 있다니까 다행이다. 이제 나이도 있을 텐데 건강하다니 더 다행이고.
혼자 조금 촉촉해지려는 찰나, 스튜디오 입구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메인 PD가 도착한 듯싶었다.
* * *
[사람 가리는 게 아니라 음식 문제라잖아여 ㅡㅡ]
[로메오 김산T: ㅋㅋ]
[로메오 김산T: 들켰네]
[로메오 김산T: (오리 캐릭터가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모티콘)]
[날 속였어]
[(고양이 캐릭터 머리 위로 불이 활활 타는 이모티콘)]
[로메오 김산T: 의헌이가 알려줬어?]
[제자는 진짜 착한데 선생이 문제야]
[뭘 보고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ㅡㅡ]
[로메오 김산T: ㅋㅋㅋ애 착하지 성격 엄청 좋아]
[안 그래도 많이 아껴주고 있다구요~]
[로메오 김산T: 그래 걔는 더 잘돼야 돼]
[로메오 김산T: 잘 좀 챙겨줘 앞으로도]
그때 스태프가 휴식 종료를 알렸고, 화면의 자판을 두드리던 체리본은 쓰던 것을 몽땅 지우고 ‘잠깐 촬영’이라고만 메시지를 전송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이 주제에 관해 더 길게 이야기했을 텐데 아쉬웠다.
댄서 겸 방송인 겸 트레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나름대로 학생을 능숙하게 잘 대하는 편이었다. 어린 연습생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오늘의 촬영도 그에게는 큰 고비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이제 방송 나올 만한 멘트 위주로 타이트하게 갈게요. 연습생들한테 조언한다는 느낌으로 해주세요.”
어느덧 해가 떨어져 창밖은 새까만 밤이 된 지 오래. PD 역시 체리본에게 서두르라는 주문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