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30화
07. 직진(2)
“헤이. 편지 배달 왔다.”
촬영 시작 전 대기 시간, 나는 안승준이 있는 ‘출연자 대기실 2’에 찾아가 받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엉? 오, 하은이네. 왜 형한테 준 거지?”
“너한테 못 준 것 같아서 내가 받아옴.”
“잘했음. 감사감사.”
승준이는 편지를 챙겼고, 나는 승준이 옆 의자가 비어 있길래 대충 앉았다. 저녁 시간이라서 출연진이고 스태프고 돌아가며 도시락을 까먹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자리를 비워서, 제법 대기실은 한산했다.
우리 팀이 쓰는 4번 대기실은 엄청 시끄러운데 여기는 비교적 분위기가 조용했다. 팀원들이 내성적인 편이라서 그런가. 구석에 앉아 있으니 마음까지 진정이 되는 듯했다.
미니 팬미팅은 고작 이삼십 분만에 끝났건만, 정신이 아직도 몽롱했다.
‘……오버했지.’
너무 오랜만에 본 얼굴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텐션이 올라갔던 것 같다.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혜주 누나. 팬사인회에도 오지 않았고, 이번 내 생일 때도 소식이 없었으니까 그대로 이미 끊긴 인연인 줄 알았다.
나는 대기 시간 내내 목에 걸고 다닌 슬로건을 끄러내, 보들보들한 질감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가만히 생각했다.
‘몇 년 만이더라. 6년? 7년?’
이것도 미래가 바뀐 케이스 중 하나일까. 기분이 이상하다. 누나는 그 이후로 잘 살았을까. 지금은 잘 살까.
이대로 지내다 보면 혜주 누나를 오래 볼 수도 있는 건가. 아직 늦지 않았나.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증거를 접하니 드디어 실감이 난다.
……미래는 바뀌고 있었다.
“형 아까 엄청 돌아다니던데, 그건 뭐였어?”
협찬사에서 제공한 건강 나물 도시락을 주워 먹으며 질문하는 안승준 덕분에, 나는 겨우 정신을 현실로 끄집어내었다.
“그게 말이다. 짜증 내지 말고 들어봐.”
“무슨 짜증 나는 사고를 치셨죠?”
“오늘 메이크업이 잘 먹어서 셀카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가 연습생 전원이 셀카를 제출하게 되었어.”
안승준이 표정으로 욕했다. 귀찮아 죽겠는데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소리 없는 비난이 들려왔다.
나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작가님이 너무 좋아하시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찍으면 나중에 공개해야 되니까, 언제부터 괜찮은지 여쭤보려고…….’
‘아이디어 너무 좋은데! 우리 그러지 말고 방송 끝나고 오피셜 계정에 공개하는 거 어때요?’
‘제……. 사진을요?’
‘아니, 아니. 전원 다 시켜 가지고. 잠시 스태프들이랑 얘기하고 공지해 줄게요. 셀카 딱 좋지. 포토카드로 만들어서 방청 굿즈로 제공해도 좋을 텐데, 당일 출력 되는 곳이 있나?’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나비효과가 되어 번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왔더니 지금이다.
SNS에 공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포토카드로 만들면 스포일러는 괜찮은 건가……. 너무 의욕적이라서 태클도 못 걸었다.
“형이 오늘 좀 잘 나오긴 했어.”
“너도 예쁘게 됐으니까 잠자코 찍어서 남겨.”
편지 때문에 몇 번이나 찾아봐도 계속 자리에 없더니, 안승준은 정말 시간 들이고 공들여 스타일을 만든 태가 났다.
흰 반소매 세일러 풍 상의, 하얀 베레모까지. 짧은 바지를 입은 팀원도 몇 있어 보였지만 안승준은 긴 바지였다. 긴 옷깃 아래로 묶어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파란색 스카프가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반면에 나는 스포티한 스타일이다. 바지통이 좁은 데님 소재 점프 수트에 이마에 올려 쓴 고글 소품.
상체에는 장식이 거의 없고 바짓단에는 흰 물감이 흩뿌려진 듯한 장식이 프린트되어 있는데, 이래야 다리를 강조할 수 있다나. 같은 팀에는 체크무늬 셔츠나 멜빵 의상, 화려한 패턴의 반다나를 착용한 팀원도 있다.
김지상은 아까 보니 버건디 실크 재질 루즈핏 셔츠를 내의로 입은 수트 차림이던데. 우리 다들 정말 따로 노는구나.
“시간 빨리 좀 가라……. 빨리 하게.”
도시락에서 풀잎만 골라 먹은 안승준이 플라스틱 용기를 정리하며 혼잣말했다.
“자신 있나 봐.”
“그게 아니라, 너무 긴장해서. 매도 빨리 맞는 게 나으니까.”
“긴장돼?”
“미치겠어, 지금.”
승준이가 너스레를 떨며 손을 내밀어 보여주었는데, 손바닥이 땀으로 번들번들했다.
큰일이다. 긴장하면 근육 굳어서 춤도 노래도 안 나오는데. 임시 처방으로 안승준 뒤로 가서 어깨를 쭉 당겨주었다.
“아파!”
“마사지거든? 연습은 잘했냐.”
“그냥 열심히 했지…….”
“열심히 했으면 됐어.”
안승준이 본래 긴장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이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리더 자리가 부담이 심하긴 심한가 보다.
“넌 무대 올라가면 연습보다 잘하니까 스트레스 그만 받고, 팀원 상태부터 살펴. 애들 어리다면서.”
귓가에 대고 말해주자, 안승준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툭 내밀었다.
“이 형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를 해.”
“……끝나고 남을래?”
“아! 정의헌이 동생 괴롭힌다!”
근육은 풀었고……. 잡담과 농담도 완료. 분위기도 어느 정도는 느슨해진 것 같다.
촬영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소속사 무대는 트레이너들이 평가했고, 저번 경연은 연습생 자체 투표로 심사했으며, 〈뮤직 채널〉 녹화는 방청 없이 진행했으니 〈데프아〉에서 관객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설레는 마음이 더 크다.
‘시간 빨리 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 생각만은 안승준과 동일했다.
슬슬 들고 온 것들을 추스르고 대기실을 나서려니까 안승준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가려고?”
“이제 지상이 대기실 놀러 가게.”
“헐! 나도 같이 가.”
승준이가 서둘러 신발을 꿰어 신고 나를 쫓아왔다. 우리 참 우리끼리 잘 노네.
* * *
“좋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리더의 각오 한마디 들어볼게요!”
“존경하는 대선배님들의 노래로 무대를 하게 되었는데요, 가솔린 선배님들처럼 듣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희의 에너지가 관객분들, 그리고 TV를 통해 봐주시는 분들에게까지 잘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잘할 수 있죠?”
“물론이죠. 재밌는 무대 보여드릴게요.”
* * *
암흑. 정적. 조명은 꺼진 상태, 음악이 흐르기 직전의 긴장감이 무대에 흘렀다.
지금 무대 위에는 나 혼자 서 있다. 시선은 아래로 내리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 상태.
‘이게 내 킬링파트라서 말이지…….’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완벽한 타이밍에 노래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곡이 먼저 흘러나오고 그다음에 조명이 들어왔다.
내가 있는 자리에 정확히 쏘아지는, 핀 스포트라이트 조명이었다. 환호성이 들린다.
‘……시작한다.’
길고 반복되는 전주 구성은 본래 〈늑대의 시간〉이라는 노래의 특징이다.
이 곡은 처음 시작할 때 똑같은 리프가 네 번이나 반복되는데, 그건 원곡자인 ‘가솔린’ 선배님들이 3인조 댄스 그룹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원곡에서는 한 악절에 한 명씩 무대 앞으로 나와서 묘기에 가까운 춤 동작들을 선보인 뒤, 마지막 리프에서는 세 명이 함께 춤을 춘다. 가솔린 멤버들이 데뷔 전에 몸담았던 댄스 신에서의, 스트릿 댄스 배틀 같은 연출을 위시했다는 듯하다.
반면 우리는 이 파트를 원래 편곡 과정에서 없앨 생각이었다. 사유는, 너무 어려워서.
‘나도 겨우 따라가는 난이도인데, 어떻게 두 명이나 더 데리고 같이 추겠어.’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댄스 브레이크는, 킬링파트 재조정 과정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대신 원곡과 달리 인트로에서 춤을 추는 인원은 단 한 명. 네 번의 반복 역시 두 번으로 수정했다.
‘첫 순서에서는 원곡과 비슷한 독무로 스타트를 끊고, 두 번째는 오리지널 스타일의 창작 군무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도입부 독무가, 지금 내 손끝과 발끝에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관객의 시선이 모인 무대의 한 점. 텅 빈 공간 중앙의 나.
나밖에 없다. 이 서로 다른 관객들의 무수한 기대를 감당할 사람도, 나뿐이다.
그러나 내 피부를 감싸는 이 소름 돋는 감각은 압박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니다.
‘전부 내 거다.’
전율이었다.
‘이 사람들의 시간도, 눈길도, 집중도…….’
온전히 내가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만족스러웠다.
고글 렌즈 너머로 보이는 시야가 마치 맨눈처럼 밝다.
묘한 책임감이 내 등을 기분 좋게 밀어주었다.
One and, Two and, Three and
90년대 댄스곡에 으레 들어가는 오토튠 추임새를 기점으로 비트 위에 멜로디가 덧입혀진다.
그 박자에 맞춰 나는 팔과 다리를 뻗어 몸을 기울였다. 시작을 부드럽게 꾸미기 위한 동작. 이제 스텝을 밟으며 두 걸음 앞으로 나선다.
지금은 얼굴에 포커스를 주지 않고 전신이 만드는 큰 동작에 시선을 분산할 때다. 클로즈업이 들어가지 않을 쇼트기에 일부러 카메라도 보지 않았다.
‘여기서 점프.’
그리고 곧바로 전신 동작을 연결한다. 양팔로 바닥을 짚고 체중을 지탱하며 바디 웨이브.
다리를 교차해 들어 올리는 동작 때문에 더러는 전갈 같다고 하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 전갈을 닮은 동작은 내려갈 때까지만 유효했고, 내 경우는 다른 스킬으로 춤을 이었다.
‘한참 연습하던 그거.’
‘베이비’나 ‘스와입스’라고 부르는 동작.
상체와 하체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 몸을 돌려 일으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몸을 좌나 우로 뒤집는 건데, 그걸 허공에 떠서 허릿심으로 해야 하는 느낌?
덧붙여 지금 나는 배가 아니라 등이 하늘을 향하고 있으니까…….
한 바퀴에다가 반 바퀴를 추가로 더해 돌려야 한다.
‘즉, 미친 듯이 어렵다고.’
실패하면 개망신인데, 성공하면 개간지다.
스릴 넘치네. 좋다.
One and, Two and, Three and
그때 기계 변조음이 한 번 더 흘러나왔다. 그래, 지체할 시간도 없다.
음악 타이밍에 맞춰 발끝에 힘을 주고 허공을 시원하게 차올렸다.
내일은커녕 당장의 라이브조차 오지 않을 것처럼 시도하는 파워 무브.
그리고……. 제대로 돌았다.
반동으로 한 바퀴 더 돈 다음에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까지. 해냈다.
‘카메라 어디 있냐.’
고양감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재빨리 불이 들어온 정면 카메라를 찾아냈다.
바로 지금. 독무를 마무리하고 팀원들이 노래에 합류하기 위해, 딱 한 마디 여유가 주어졌다.
까맣던 핀 조명이 전부 환히 켜지고 음악이 멈추었다. 쉼표 하나 겨우 찍을 만큼 짧은 정적.
곧 무대 가장자리에 대기하고 있는 팀원들이 무대로 한 번에 뛰어들어 올 것이다.
‘벌써 숨이 턱 끝까지 찼는데 라이브는 이제 시작이라니…….’
우선은 눈가를 덮고 있는 고글을 벗어 이마 위로 올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무대 조명이 더 밝고 강했다.
그래도 카메라를 보며 짧게 속삭였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Time’s up
멈추었던 음악이 즉시 무대에 쏟아지듯이 재생되었다.
간지 좀 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