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29화
07. 직진(1)
하긴 정의헌 가족이 경연 방청을 안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정의헌의 부모님은 원래 콘서트도 오시고, 컴백 쇼케이스도 오시고, 심지어 팬미팅까지 출석하시는 분들이다.
이건 정씨 식구들이 얼마나 사이가 돈독한지 알고도 긴장하지 않은 밀월 잘못이었다.
‘왠지 화환 사진을 그렇게 찍어가시더라!’
안구에 습기가 핑 도는 감각을 느끼며 밀월은 슬로건 한 장을 추가로 따로 챙겼다.
“버스 떠났어, 언니.”
“버스는 가도 언제 택시가 올지 모르는 게 인생인 법……. 다음에 만나면 드리겠어.”
밀월은 고집을 부렸고, 안개는 한편 자신의 눈썰미와 기억력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멤버 부모님과 아무리 공연장에서 자주 같은 공기를 마셨다고 해도, 얼굴을 직접 본 횟수는 손에 꼽았으니까.
“승준이 부모님은 안 오셨으려나.”
“지상이네는 모르겠는데, 승준이 부모님이라면 가능성 있지?”
안개가 중얼거리는 말에 밀월이 답했다.
일 년 반 넘게 스테리나인의 오프라인 이벤트를 꼬박꼬박 참석하는 밀월도 김지상의 가족은 본 적이 없었다. 오셨다는 소식도 물론 들은 적 없고.
“어쨌든 며느리가 되어서 시댁에 불효하니까 기분이 너무 안 좋다…….”
“응. 나눔 또 오신다.”
밀월의 주접에 안개가 적당히 반응하고, 밀월이 잔여 슬로건까지 나눔을 모두 끝내니 어느덧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졌다.
곧 진행된다는 게릴라 미니 팬미팅 자리를 잡아놓고, 두 사람은 잠시 지인과 교대해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아니,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언니 뒤에서 중학생 애들 째려보는 거 봤어?”
“난 애들은 안 무서운데 우리 앞줄 사람들 얘기하는 내용 너무 살벌해서 쫄았잖아.”
여전히 듣는 귀가 많아서 말조심은 필수였지만, 그래도 팬미팅 대기 공간에서보다는 입이 조금 트인 그들이었다.
지금 삼십 분이 아니면 밤까지 뭘 먹을 시간이 없어서 그들은 빠르게 해치우면서도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뻘하게 나 궁금한 거 있어. 저리 님은 아예 탈덕하신 거야?”
“그 언니 그냥 서바이벌 현타 온 것 같더라. 레스트는 걸었는데 비계 보면 투표도 다 했더라고.”
‘저리’는 밀월보다 자본력이 좋은 정의헌 팬이었다. 사진 계정 ‘J̲U̲S̲T̲I̲C̲E̲ L̲E̲A̲G̲U̲E̲’를 운영한다.
그는 정의헌의 〈데프아〉 출연 소식이 들리자 계정 운영을 쉬어가겠다고 ‘Rest’ 공지를 쓰고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기존에 친분을 쌓아둔 밀월은 저리의 비밀 계정과 팔로우였고, 그리하여 저리가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최애가 팀 활동에 진심이 아닌 것 같아서 서럽다느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니 뭐니, 매일 새벽에 쏟아내던 툿투 글도 점점 뜸해지고 있고……. 모르는 척 밀월의 화환 서포트에도 돈을 보태줬으니까 말이다.
밀월은 한숨을 쉬고 콜라를 한 모금 빨대로 빨아 마셨다.
“현타 올 만도 해. 스나 나온다는 루머야 전부터 있었지만……. 그게 의헌이일 줄은 진짜 아무도 몰랐을걸.”
“나도. 솔직히 정의헌은 그룹 활동 계속할 줄. 그룹에 애정 엄청 있는 것 같았는데.”
“그냥 회사에서 골라서 내보낸 거 아니야?”
“에이……. 싫었으면 싫다고 했겠지. 걔 성격이 있는데.”
“아냐, 헌이 은근 납득 빨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해. 진짜 뭐지……. 서바이벌 나가면 잘할 멘탈이라서?”
“지상이는 멘탈 은근 약하지 않아?”
“걔는 자기가 나가고 싶어 했겠지. 그리고 잘생겼잖아. 딱 봐도 인기 많을 듯.”
반말은 물론이고 안개의 경우 정의헌보다 나이가 더 어린데도 가수 이름을 마구 불러대고 있었다.
팬덤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놀랄 수도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일상이었다.
그들은 조금 과격했을 뿐 까빠도, 개인 팬도, 악성 개인 팬도 아니었으며 진심으로 스테리나인과 최애를 사랑했다.
“의헌이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솔직히 헌이는 걱정은 안 되잖아.”
밀월이 말했다. ‘걱정 안 된다’는 그녀가 남돌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건 그래. 그래도 둘만 보내는 것보다는 정의헌 같이 가는 게 낫지. 스나 남은 애들은 영하가 케어해 줄 거고.”
“맞아. 그리고 애들 공카 방문 수도 은근 자주 오른대.”
그냥 팬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소문이었다.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세 사람의 공식 카페 방문 수가 갱신이 안 되는 기간이 〈데프아〉 합숙 기간이다.’
아무튼 몇몇 추론은 진실이고, 어떤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뇌내 망상이었다. 밀월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 진짜 너무 많다……. 방송 잘되려나.”
“공짜 행사가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진짜 바글바글한 것 같긴 해.”
밀월은 남은 햄버거를 입안에 욱여넣고, 손으로는 쓰레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그런데 판 커지는 게 재미는 있지 않아?”
“그러니까. 떡밥 개 많아. 나 그사이에 움짤계 팔로워 100명 늘었잖아.”
‘움짤계’란 안개가 운영하는 ‘안승준.GIF’ 툿투 계정 이야기였다.
밀월도 허니문 계정의 팔로워 증가량을 생각해 보았다. 한 달 동안 500명 정도는 늘어난 것 같다.
특정 일자의 옛날 사진 끌어올려 달라는 질문도 익명 질문함 ‘퀴즈폼’을 통해서 피곤할 정도로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드문드문 수준 낮은 어그로나 멤버들 욕을 하는 까빠도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으니 활력이 돌았다.
“아! 떨려! 사람 많아서 더 떨려!”
“진심……. 나 심지어 너무 오랜만이라.”
밀월은 말하는 동시에 머리로 마지막으로 정의헌을 본 게 언제인지 계산해 보았다. 아마도 저번 겨울…….
솔직히 말해 밀월은 반년이나 휴덕 상태였다. 가장 최신 활동인 〈Run and Run〉 활동 때는 공개방송 한 번 보러 가지 않았고, 이번 정의헌 생일에는 이벤트 카페도 주최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렇게 살다가 진짜 탈덕할 생각이었다. 멤버 활동 중지 때문에 사방에서 안 좋은 말 나오는 것도 스트레스였고.
그러나……. 정의헌의 〈데프아〉 출연 소식이 들리자 밀월도 어쩔 수 없이 옷장 속 고이 모셔둔 카메라 먼지를 닦았다.
‘그래도 몇 년이나 좋아했는데. 연습생이 그렇게 많다던데.’
사명감에 휩싸여 각성한 그녀였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을 정의헌 본인에게 직접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정의헌이 팬을 혼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냥 그 상황을 상상하면 아무 이유 없이 민망했다.
물론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정의헌이 부드럽게 혼내주는 것도 너무 좋을 듯’ 하는 욕망도 없지는 않았다.
밀월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안개와 함께 팬미팅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사람이 더 모였다. 카메라 없는 사람도 많고, 저 뒷줄에는 사다리를 끌고 올라선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공허한 눈을 보아하니 그들은 찍은 사진을 돈 받고 파는 데이터 팔이나 지인의 대리로 온 사람들인 듯했다).
두 사람도 카메라를 꺼내 세팅을 시작했다. 조리개와 셔터 설정을 맞추고 테스트 촬영까지 끝내면 곧 시작 시각이었다.
“연습생분들 입장합니다! 질서 유지해 주세요!”
시끄러운 환호가 야외를 가득 메우자 스태프를 따라 공식 복장을 잘 차려입은 연습생들이 무리 지어 등장했다.
줄을 서는 둥 마는 둥 삐뚤삐뚤한 대형으로 연습생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안녕하세요, 〈프로젝트 아레나〉의 후원자 여러분!”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은 인사를 한참 하고 나서야 팬들과 자유롭게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자신을 찾는 카메라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들떴을 뿐인 연습생들. 그 사이에서 정의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거나 성장 중인 연습생과는 거의 한 뼘이 차이 나는 키였다.
너무 오랜만이라 카메라 화면을 봐야 할지 피사체 실물을 봐야 할지 헷갈렸지만, 밀월의 입은 정신보다 본능적이었다.
“의헌아!”
밀월이 우렁차게 외쳤다.
원래 찍덕 고인물은 아이돌이 이쪽 볼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볼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그때.
“어?”
정의헌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눈을 크게 떴다.
카메라를 쳐다보던 밀월에게 놀라움이 전염되었다. 정의헌이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본 것이다.
원래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카메라 렌즈를 봐주던 애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혜주 누나?”
맨 앞줄에 있는 아무나 찍는 사람들에게 취해주던 포즈를 멈추고, 정의헌이 밀월에게로 다가왔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밀월, 본명 윤혜주의 손가락은 주책맞게 셔터 버튼을 연타했다.
윤혜주가 혼란을 겪는 사이 정의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왠지 엄청, 누나 오랜만인 것 같은데…….”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웠지만,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듯 잘 들렸다.
본명이 안 예쁘니까 닉네임을 부르라고 그렇게 말해도 본명이 가까운 느낌이라면서 정의헌은 늘 이름을 불렀다.
윤혜주가 문득 셔터를 누르던 손을 멈추었다.
들뜬 듯 말하는 그 얼굴은, 사진을 향한 윤혜주의 욕망과 습관을 내리눌렀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것 같은 그 표정을……. 자랑하고 싶은 한편, 남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윤혜주는 카메라 렌즈에서 고개를 떼어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정의헌의 얼굴에 농도 진한 미소가 고요히 번졌다.
“……보고 싶었어.”
정의헌이 속없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짜 보고 싶었어.”
속삭이는 말과 나긋한 행동. 윤혜주는 거절할 생각도 못 하고 잡았다. 손깍지는 덤이었다.
공연장 시큐리티가 너무 가까이 닿지 말라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순식간에 잡은 손이 풀렸다.
이대로라면 멀어질 것 같은 상황.
문득 윤혜주의 머리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내리꽂혔다.
‘아, 맞다!’
인간의 물결이 출렁이는 틈을 타 윤혜주는 가방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 과정에서 가방에 들어 있던 슬로건 한 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원래 편지도 선물도 줄 수 없는 게 규칙이었지만……. 윤혜주는 혹시 몰라 편지를 써왔고,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헌아, 이거!”
윤혜주가 편지를 내밀자, 정의헌이 시큐리티가 보는 방향을 등으로 막으며 편지를 낚아챘다.
그리고 바닥을 가리키고 외쳤다. 여러 소음이 섞이고,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데 대화는 또렷했다.
“그거 줘!”
어떤 우연이 생길지 몰라 한 장 챙겨놓은 여분의 정의헌 슬로건.
버스는 떠났지만, 택시가 왔구나. 윤혜주는 손을 뻗어 빠르게 슬로건을 집어 들고, 먼지도 털지 못하고 건넸다.
그리고 손끝이 닿았다가 떨어진 그 순간. 윤혜주는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혀 뒤로 밀려났다.
정의헌은 이미 시야에서 멀어지고, 오로지 그가 외치는 목소리만이 귀에 꽂혔다.
“누나 고마워!!”
윤혜주는 전생의 힘까지 끌어올려 대답했다.
“내가 더 고마워!”
그렇게 미니 팬미팅이 종료되고, 연습생들이 스태프들과 함께 먼저 공원을 떠나며 윤혜주는 밀월로 되돌아왔다.
저 멀리 앞까지 나가 버린 안개가 뒷줄의 밀월을 겨우 발견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사진 좀 건졌어?”
밀월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운 좋게 한두 장 정도는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하…….”
“으윽…….”
한숨 그리고 신음과 함께 둘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은 예쁜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승준이 오늘 기분 좋은가 봐. 애교가, 와……. 고소하려고.”
“정의헌은 미친놈이다…….”
집단적 독백 시작.
“의헌이 아까 들어가면서 내 편지도 가져간 거 알아?”
“진짜?!”
“어. 내가 편지 손에 들고 있으니까, 승준이한테 전해줄 테니까 빨리 달라고 뺏어가더라.”
“미쳤어……. 진짜……. 왜 그렇게까지?”
반쯤 혼이 빠져나간 밀월이 마치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나 얘 사랑하나 봐…….”
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