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28화
06. MAMMA MIA(3)
순간 장난기가 일어, 나는 누운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일어나서 놀라게 할 정도로 에너지가 있는 건 아니라서 이게 최선이었다.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때쯤부터 계획이 실패할 것 같았다.
이건 텄다. 누군지는 몰라도 연습실에 들어와 나를 발견하고도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다.
“일어나기나 해.”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 양손으로 허공을 움키며.
“왁.”
“안 놀란다니까.”
진짜 안 놀라는군.
“채소야……. 실망했다.”
“하든가 말든가.”
채호원은 나를 굉장히 한심하게 바라보며 행거에 걸어둔 수건을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땀이나 닦으란다.
“나 물도 줘.”
“야.”
“거기 연두색 병.”
애가 말로는 틱틱거려도 은근히 착하다. 진저리를 내면서도 시키면 또 가져와 준다.
수건으로 얼굴 닦고 물도 마시고 쉬는데 채호원이 문득 내 옆에 턱 주저앉았다.
연습하러 온 거 아니었나? 자기 할 일 안 하고 그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였다.
“연습 안 해?”
"이따가 할 건데."
“벌써 세 시인데 지금 안 하면 언제 하려고.”
“자고 일어나서 온 거니까 상관없어.”
이게 저번 합숙 때처럼 또 기싸움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나는 거기서 대화를 끊었다.
말없이 입에 물병을 물고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채호원이 내 눈을 피했다.
“하기 싫으면 나 하는 거나 봐주든가.”
“말이 왜 그렇게 돼?”
“아, 그러면 앉아서 해 뜰 때까지 명상이나 하고 계시든가요.”
착하다는 말 취소.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으면 나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연습실에는 왜 들어온 건지. 나 내쫓으려고?
물론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다. 따지자면 순간적으로 살짝 약오른 것에 가까운 감정이다.
내가 투덜거리자 채호원은 몇 초 나와 눈싸움을 하더니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우리 싸운 거 아닌가?”
“……어?”
설마……. 그때 세탁실에서 있었던 일 얘기? 아직도?
이번에 오가며 얼굴 보고 인사하고, 경연에서 라이벌 구도 맺으면서 분위기도 꽤 느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측보다 채호원의 진심 농도는 높은 듯했다. 나는 이제까지 얘가 그냥 방송 재미있게 하려고 적수로 나를 고른 줄 알았다고…….
‘그게 싸운 건가? 싸운 거면 그냥 지금부터 화해하면 안 되나?’
이건 속으로만 생각했다. 입 밖으로 냈다가는 가볍게 굴지 말라고 더 멸시당할 것 같아서였다.
에너지가 바닥난 지 오래라 의문이 들어도 흥분이 머리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말했다.
“너는 나랑 잘 지내보는 게 그렇게 힘드냐.”
의도를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히.
“왜 안 되는지 말을 해봐. 나 너한테 잘못한 거 없어.”
적어도 잘잘못 면에서는, 나는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구태여 숨기지 않고, 그동안 조사한 것들에 관해 아는 티를 냈다. 채호원의 그룹 ‘스픽스’에서 리더 ‘앤섬’, 황정현이 탈퇴한 일. 그리고 그 사건을 둘러싼 좋지 않은 루머라든가.
“정현이 형이…….”
“……말조심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런데 내 말은 완성된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간에 뚝 끊겼다.
채호원은 전에 없을 만큼 매몰차게 주제를 밀어냈다. 녀석의 눈가가 열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역린을 건드렸나.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마저 감정적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냐.”
“…….”
“내가 알고 싶어 해도, 네가 말을 안 해주고 있잖아.”
짧은 침묵이 흐르고, 채호원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너는 내 얘기가 왜 그렇게 궁금한 건데? 이해가 안 돼…….”
글쎄. 좋은 질문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얘 눈치를 봐주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순한 성격은 아니고,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이나 상처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까지 품지는 않는다.
하지만 채호원 일은 조금만 더 말해보면 풀릴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 승부욕이 붙은 것 같다.
‘옛날 인연이지만, 정현이 형도 일단 나랑 아는 사람이니까. 더 궁금한 것도 있지.’
한데 이 상황에서 그럴싸한 대답은 그게 아니라, ‘서바이벌 중 한 팀이 될 수도 있고, 같이 그룹으로 데뷔할 수도 있으니까 잘 지내고 싶어서’일 것이다. 실제로 데뷔를 할 수 있든 말든.
……음, 아니다. 집어치우자. 이런 계산들은 의미가 없다.
“꼭 인간관계에 목적이 있어야 하나?”
지지부진하게 회피하고 같은 이야기 반복하는 것 지겹고 답답하고 스트레스받으니까.
나는 좋은 것이라면 깔끔하게 좋아하고 싶고, 너저분한 마음 따위 빨리 털어내고 싶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더 알고 싶은 거지.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
내가 대답하자, 채호원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몇 분이나 눈길을 서로 부딪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삼십 초도 안 되겠지만……. 체감하기에 그렇다는 의미다.
“……정현이 형 때문인 거 맞아.”
서서히 열린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까지는 예측한 그대로인데.
“너한테 피해 안 줄게. 미안.”
태도가 안 바뀐다.
그나저나 새벽이라 얘도 조금은 솔직해진 것 같지 않나? 기회 있을 때 당겨보자.
“해결 안 되는 문제야?”
“잘 모르겠어.”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말해서 털어내고 싶은 생각은 안 들고?”
“…….”
“아, 그게 나는 아니구나? 쏘리.”
너무 살벌하게 쳐다보네……. 송구해진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야, 오래 생각했어. 슬슬 끝내.”
미안한데, 주변에 생각 정리 중인 사람 이미 하나 있어서. 두 명은 내가 감당이 안 된단다.
“그냥 이렇게 하자. 이번 경연 끝나고 다음 합숙 전까지 말 정리해서 연락해. 내 번호 알지?”
“너 강압적으로 행동한다는 자주 듣지?”
“알아, 그게 좀 단점이라고 하더라. 용서하거나 예쁘게 봐줘.”
“으…….”
“대신 다음 합숙 전까지 연락 없으면 이 얘기 더 안 할게.”
일부러 세게 나간 거다. 강제성이나 압력이 없게 그대로 두면 이 상태가 방송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게 분명했으므로.
게다가 다음 합숙은 무려 한 달 넘게 남았다. 시간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어차피 말은 하고 싶은데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는 거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선택지가 없는 게 마음 편할걸.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풀어줄 건 풀고 잡을 건 잡았다. 결정은 이제 채호원의 몫이었다.
“경연 승패는 관련 없고?”
“너 경연도 지고 비밀도 털면 너무 불행해지지 않겠냐.”
“강압적인 데다가 건방지기까지……?”
대답 대신 손으로 뻔뻔하게 브이를 만들어 보여주니 채호원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겨야겠네.”
“연습하는 거 봐줘?”
“왜…….”
거의 반사적으로 묻자, 채호원이 나를 이상한 것 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냐고 물어봐도 그냥 호의인데. 실력 늘면 좋지 않나? 내가 피드백 하나는 잘하는 편인데.
“아니다, 그래. 한번 봐줘…….”
하지만 채호원도 결국에는 납득했다. 포기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이 정도면 깔끔하다.’
당장은 경연 퍼포먼스만 신경 쓰면 될 테니까.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네.
+ + +
“단독 콘서트도 아니고 연습생들 무대 평가하는 자리인데 무슨 화환이래.”
“저 연생 세 명 나란히 걸려 있는 거 봐. 아예 그룹명도 적지. 진짜 유난은…….”
공연장 입구에 20㎏ 쌀 화환을 설치한 지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험담이 들려왔다.
손에 들고 있는 류희재 슬로건을 보니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 같기도 했다.
당장 어깨를 잡으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시발……. 벌써 견제 오진다.’
그 이름은 밀월. 사진을 찍어 올리는 계정 ‘????????????????????????????????????’의 한국어 뜻 ‘밀월여행’에서 따온 닉네임이다. – 왜 HONEYMOON이 아니라 ????????????????????????????????????이냐고 하면 별 이유는 없다. 다들 그렇게 한다.
스테리나인 데뷔 후 두 번째 활동부터 팬이 되었으니 그는 어느덧 햇수로 3년째 정의헌을 덕질하는 중이다.
밀월은 자신이 고심해 고른 화환 문구 ‘의헌이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 ‘어나더뮤직 정의헌 팬페이지 허니문’을 눈으로 읽으며 생각했다.
‘아니, 내가 불법 행위 했냐고요. 서포트 열려 있었잖아.’
그녀는 제법 열정적이었다. 사전투표 과정에서도 주변에 플레이피 계정 빌려가며 매일매일 투표권을 벌었고, 당연히 경연 방청 또한 접수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신청했다.
어제는 이번 방청만을 위해 미용실에서 연갈색 염색과 C컬 매직을 하고, 네일 샵에 가서 스테리나인의 상징인 하늘색 별 장식을 손톱에 붙였다. 게다가 오늘은 아끼는 플라워 패턴 랩 원피스도 꺼내 입고, 한 학기 내내 등교할 때에는 한 번도 쓰지 않은 화장품도 오늘을 위해 찍어 발랐을 정도니까…….
그야말로 완전 무장 상태.
“저, 안녕하세요. 정의헌 슬로건 나눔…….”
“네, 맞아요! 정의헌 연습생!”
그런 그가 지금 스튜디오 야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니, 바로 방청용 응원 굿즈 슬로건 나눔이었다.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밀월은 본능적인 서비스직 미소를 입에 머금고 목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정확한 연령을 추정할 수 없는 액면가의, 그래도 중년께는 되어 보이는 여성에게 밀월은 자체 제작한 슬로건을 한 장 건네주었다. 물론 팬 인증도 확인했다. 직캠 동영상 스트리밍과 사전투표 이력 체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혹시 나눔은 한 장만 되시나요?”
“죄송해요. 저도 수량이 정해져 있어서.”
중년 여성은 밀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밀월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이제 와서 회상하자면, 툿투 계정에 처음 수요조사 게시물을 올리고 밀월은 놀라서 뒤집어질 뻔했다.
기껏해야 오십 장 정도 제작해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수요조사가 이백 건 넘게 들어온 것이다. 팬덤을 손으로 쥐면 한 줌도 아니고 한 꼬집에 다 잡힐 것 같은, 밀월이 지금까지 알아 온 한톨단 레디 규모가 아니었다.
‘우리 원래는 쌀알 한 톨보다 작은 팬덤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다 몰려온 거냐고. 방송 시작도 안 했는데.’
결국 밀월은 가난한 대학생의 지갑 사정과 타협해 슬로건을 딱 백오십 장 제작했다.
몇 장 나누어주고 보니까 방청 당첨이 되지 않았는데 슬로건만 받으러 온 사람도 있는 듯했다. 뿌듯하면서도 얼떨떨했다.
“언니!”
그리고 떠나간 중년 여성과 교대하듯이 밀월의 지인이 팔 벌려 인사하며 달려왔다.
단발머리를 어두운 보라색으로 염색한, 키가 크고 몸집도 큰 여성의 닉네임은 ‘안개’였다.
안승준의 개. 줄여서 안개. 닉네임에서부터 보이다시피 안승준 최애다.
광장 쪽에서 안승준 슬로건을 나눔한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금방 돌아왔다.
“안개 하이. 금방 왔네?”
“백 장 금방 나가더라고. 방금 의헌이 어머님 왔다가 가신 거야?”
“……뭐!?”
밀월이 깜짝 놀라서 직전의 손님이 떠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분과 중년 남자, 그리고 중학생 내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성 한 명. 세 사람이 사이좋게 저 시야 밖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듣고 보니 자신이 본 얼굴은 은근히 최애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코라든가 이마라든가.
밀월은 우선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지 않아? 헌이 동생 둘이잖아.”
“한 명만 올 수도 있지? 큰동생 고삼이라면서.”
K.O.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밀월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