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24화 (24/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24화

05. What I Said(6)

데뷔조가 확실히 짜이기 전부터 나는 어나더뮤직 차기 그룹의 리더로 사실상 결정이 된 상태였다.

비교적 연습 기간이 길기도 했고, 연습생 때부터 새로 들어오는 애들을 관리하기도 했고…… 원인은 여러 가지였는데.

아무튼 그래서 나는 연습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리더로서의 내 역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트레이너 쌤들이나 회사 위에서도 동생들을 관리하라고 나를 은근히 압박했으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혹독하게 군기를 잡거나 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다는 건 아니다.

‘그저 미친 듯이 예민하게, 엄격하게, 그리고 원칙주의적으로 굴었을 뿐…….’

변명하자면 그 무렵 내 성격이 비틀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일단 스테리나인 아홉 명이 확정되기 전에 나는 두 번이나 어나더뮤직에서 데뷔할 뻔했다.

입사 초기에 다른 연습생 형들과 그룹으로 한 번, 솔로로 한 번,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스테리나인이었다.

안승준의 입사는 내 솔로 데뷔가 막 엎어졌을 시기와 맞물려서, 그때 나는 몹시도 감정적이었다.

흑역사를 인정하고 정당화를 조금 하자면, 참 여유가 없고 날이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생 2회차인 오늘날의 나는 여러모로 성격이 정말 많이 좋아진 거고…….

“그런데 난 정말 데뷔하고 나서도 의헌이 형이랑 못 친해질 줄 알았어.”

“나도.”

김지상이 말하고, 안승준이 동의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게, 김지상도 뒤늦게 길거리 캐스팅으로 스테리나인 데뷔조에 합류해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벌써 미지근해진 탄산음료로 목을 축이며 안승준이 덧붙였다.

“그때 우리끼리 형 불편하다고 뒷담 엄청 하고 다녔는데.”

“안승준 너는, 인마.”

“아, 물론! 내가 연습생 때 형한테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응? 무슨 말인지 알지?”

나도 그때 잘한 건 없지만 안승준 얘는 아직 덜 큰 게 분명하다. 나를 피해 양손으로 투명 하트를 쏘아대는데, 보고 있으려니 수명 깎이는 기분이다.

그 무렵 김지상이 까만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여기 나와서 이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신기해.”

우와, 왠지 뒷배경으로 산들바람에 벚꽃잎 떨어져야 할 것 같은 비주얼. 승준이와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뭘 그렇게 봐.”

“오……. 김지상 지금 청춘 드라마 장면 같았다.”

“난 청춘 드라마보다는 순정만화에 한 표.”

안승준은 대체 무슨 만화를 보고 사는 거냐.

그렇게 이어지던 시답지 않은 소리는, 문득 안승준이 꺼낸 새 주제에 멈추었다.

“그런데 나 조금 고민인 게 있거든.”

“어. 뭔데.”

“우리, 그때 그러고 어떻게 화해했는지 형은 기억 나?”

‘혼낸 것도 잊은 형한테 이런 거 묻는 것도 웃기지만’이라며 승준이는 사족을 덧붙였다. 화를 내고 난 뒤에 팀원들과 사이가 어색해졌는데, 관계를 수습할 방법을 모르겠단다.

하지만 이게 고민이라면 우리의 사건을 들이미는 것은 영 부적절했다.

“우리는 화해 안 했지. 그래서 네가 나 불편해한 거잖아.”

우리는 그저……. 이래저래 시간이 해결해 준 것뿐이니까.

몇 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서 감정이 흐려지고 무뎌진 것에 불과했다.

괜히 서먹하게 지낸 게 아니고, 괜히 자투리 감정이 오래 남은 게 아니다.

“네가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그냥 가서 화내서 미안했다고 해. 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럴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안승준이 영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으로 ‘우리 형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양손을 들어 올려 가위 모양으로 교차했다.

“잠깐, 감동 금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든 금지. 지상이는 뭐 없어?”

그리고 억지로 대화의 포커스를 김지상에게로 옮겨놓았다.

김지상이 황당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 왜?”

“연습하면서 무슨 일 없었냐.”

사실 나로서 더 알고 싶은 것도, 더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지상이의 사연이긴 했다.

그러나 김지상은 실속 없이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없는데.”

“그러면 안 대단한 거라도 말해봐.”

“다들 기대하는 게 많은 것 같긴 해. 욕심도 많고. 그냥 순위 높은 팀 들어와서 버스 타고 싶은 것 같은 애들도 없는 건 아닌데…….”

내가 슬쩍 재촉하자 김지상은 어렵지 않게 연습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그래도 못할 수준은 아니야.”

“힘든 건 없고?”

“음……. 힘든 것까지는 아닌데, 하다 보면 멤버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양보를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나는 의헌이 형 하는 것만 봐왔으니까.”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김지상이 괜히 나를 띄워주는 게 어색해 진실을 말했더니, 안승준이 끼어들었다.

“다르지. 우리는 형만 할 수 있는 파트가 너무 많았어.”

“그랬나?”

“〈뛰어들어〉 댄브나 〈Express〉 인트로 같은 건 좀 그렇지.”

……그런가?

“그러면 지상이도 똑같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네가 제일 잘하면 네가 해.”

“내가 뭘 잘하는데?”

얘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안승준과 나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잘생긴 거.”

“어. 잘생긴 거.”

“…….”

농담이 아닌데 지상이가 농담으로 듣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나서서 설명을 더해주었다.

“……잘생긴 비주얼을 베이스로 한 무대에서의 다양한 표정 연기와 디테일이 살아 있는 댄스 스타일이 역시 너의 최대 장점 아닐까. 첫 음도 잘 맞추는 편이고 목소리도 미성이라 웬만한 곡 도입부에도 잘 어울리고…….”

“그만, 형. 스톱. 거기까지.”

정작 하나하나 짚어주면 또 민망해할 거면서 핀잔은 왜 하는 건지.

그래도 김지상이 혼자 속으로 걱정이나 스트레스를 쌓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직 고생길이 시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으나, 이 분위기라면 벌써 걱정하는 것도 기우일 것이다.

김지상은 나빠지고 있지 않았다. 추억 속 평소의 그 모습이었다. 오늘 이 단계에서는 그 깨달음이면 충분했다.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으니까 좋네.’

몸은 피로하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들 덕분에 충전이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도 우리 팀이 한국에만 있었다면 그 정도로 난리는 안 났을지도 몰라.’

아, 그러고 보니…….

“우리 해외 투어 공지 나왔더라.”

“맞아, 봤어.”

“잘됐지, 뭐. 미국 좋겠다.”

다들 반응이 담백하다. 당연한 결정이라서 그런가.

멤버 공석이 많은 만큼 새 앨범 런칭은 애매하고, 남은 멤버가 몇인데 〈데프아〉 끝날 때까지 멀뚱멀뚱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면 해외 투어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멤버들 입장에서도 오래 쉬어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테고, 해외 콘서트나 팬미팅은 수익 면에서 비교적 가수 주머니에 떨어지는 게 많은 편이다. 우리 셋을 두고 떠난다니 슬프긴 하지만……. 우리가 솔직히 서운해할 입장은 아니니까.

승준이는 출국이 부럽다면서, 전에 미국 투어에서 먹었던 음식 이름들을 중얼거리더니 덧붙였다.

“어쨌든 난 그러려니 싶다. 우리도 여기서 열심히 삽시다, 끝!”

안승준의 그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기도 했고, 쿨한 척 같기도 했고, 두 가지가 섞인 결과물 같기도 했다.

흠. 이건 생각을 오래 이어갈수록 분위기가 처지는 주제다. 그냥 짧게 수습하자.

“내 생각도 그래. 지금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으니까 각자 자리에서 할 일 하는 게 답인 것 같다.”

“…….”

“깊게 생각하지 마. 애들도 우리 이해해줬으니까, 우리도 애들 이해해야지.”

내 가치관을 애들한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다. 전에 강주찬에게는 같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내걸었지만, ‘무조건 그룹 우선으로! 무조건 돌아가자!’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들 생각이 바뀌도록 조금씩 유도하는 거라면 몰라도.

그래도 지상이나 승준이나 잘 버텨주고 있어서 안심은 된다.

앞으로 올 일을 아는 입장에서도 미래는 꼬인 실타래처럼 느껴지는데, 한 치 앞도 모르면 얼마나 속이 답답하겠나. 그런데도 두 사람은 무슨 일이든 차근차근 잘해 나가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얼마 없네.’

고작해야 불안이나 부담을 덜어낼 수 있게 옆에서 놀아주고 지켜봐 주는 것 정도.

‘말 한마디로 안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한 마디 유무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말을 꺼낸 나부터 바뀌어야겠지.

‘나도 긴장을 해야겠다.’

안승준도, 김지상도……. 다른 스나 멤버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사실 이번 경연은 팀 안팎으로 상처받는 사람 없도록 적당히 조심스레 상황을 다뤄보려고 했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조금 더 독하게 준비해야겠어.’

뺀질거리는 팀원들 잡아내고, 무대 완성도 높일 수 있게 머리도 굴려보고, 확신이 있는 건 더 세게 밀어붙이고.

개인 팬덤이 견고해지기 전이라서 지금 무대 퀄리티 잘 뽑으면 성적도 쑥쑥 오른다. 잘되면 팀원들한테도 좋을 거다.

“슬슬 일어나야겠다.”

좋아, 가만히 주저앉아 있지 말자. 나는 구석에 둔 노트북을 가져와 들고, 마우스와 충전기 코드도 뽑아 챙겨 들었다.

적당히 애들한테 인사를 해주고 계단을 오르려는데, 그때 문득 등 뒤에서 승준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의헌이 형!”

뒤를 돌아보자 ‘둘, 셋’ 하는 카운트와 함께 무언가 팔랑팔랑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고개가 치솟았다가 내려가며, 내 시선은 천장에서부터 바닥으로 향했다.

허공에 날린 물건의 정체는 잘게 자른 A4 용지 조각이었다.

식당과 복도가 이어지는 문가에 승준이와 지상이가 웃으며 서 있었다. 쫓아서 여기까지 나온 건가.

“이거 뭔데?”

승준이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쓸어담아 주웠고, 지상이는 태블릿PC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화면 메인에 보이는 시계의 숫자가 오전 1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16년 7월 24일.

“자정 지났어.”

“아…….”

안승준이 먼지가 잔뜩 묻은 종이를 굳이 한 번 더 허공에 던지고 웃었다.

“스테리나인 데뷔 2주년을 자축하며~”

너스레를 떨어대는 승준이의 얼굴에 나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에는 종이가 더럽다든가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든가 하는 잔소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희 귀여운 짓 한다?”

머리에 내려앉은 손톱 크기 종이들을 털어내며 나는 스테리나인을 생각했다.

“내가 좀.”

“내 아이디어였거든?”

뻔뻔하게 구는 안승준, 바보같은 핀잔을 하는 김지상, 걱정이 많을 강주찬과 무슨 생각일지 모를 이영하.

휴식 중인 막내, 다른 멤버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그리고 이렇게 같이 엉켜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짧은 순간들까지.

“……뭐, 고마워. 너희도 축하한다.”

그래, 지키려면 잘하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