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22화
05. What I Said(4)
“수민이가 뭐라고 했어요?”
“그것까지는 비밀. 그런데 수민이가 의헌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대체 뭐라고 말했을까.
그 인터뷰 원본을 들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은 의외로 금방 해소되었다.
그날 저녁 편곡 파일을 렌더링까지 마치고 방에 들어와 보니, 내 침대 위에 뭔가가 올려져 있었다.
매점에서 살 수 있는 쿠키 과자 한 통과, 그 박스 표면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한 장.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읽어내려 갔다.
「의헌이 형 저 수민인데요. 팀이 되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서 편지 씁니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아직도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해보겠다는 느낌으로 마무리되었다.
형이 팀 분위기를 잘 살피고 노력해 주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으며 어쩌고저쩌고…….
수줍은 발렌타인 데이 선물인 줄 알았는데 어버이날 카네이션이었군. 효도 받은 기분이다.
‘그런데, 팀이 되어주시긴 뭘 되어주셨다는 거냐…….’
팀 구성 규칙상 본인이 들어온 거고, 나에게 허락과 거절 권한은 없었는데.
과자 포장을 뜯으면서 나는 묘하게 익숙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애 자존감을 여기까지 깎아놓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른들 잘못이 크다.
‘미숙한 상황에서 오디션 나온 게 문제가 아니라, 준비도 안 된 연습생 내보낸 회사가 제일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어릴 때 나와 같이 연습하고 그만두던 다른 연습생들이 자꾸 생각이 났다.
어나더뮤직을 퇴사하고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간 친구들, 그리고 다시는 음악을 하지 않게 된 애들까지.
‘얼마 안 지난 일인데 까마득한 옛날 같네.’
시간의 축이 한 번 꺾인 만큼 나에게는 아주 오래된 일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때였다.
‘……옛날?’
순간 한 가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을 뒤지기 시작하자, 제 침대에 누워 있던 주태훈이 놀라서 외쳤다.
나는 옷장에서 제작진에게서 빌려온 노트북을 찾아 꺼내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슬리퍼를 대충 꿰어 신고 방을 나서며 대답했다.
“잠깐 식당에 편곡 좀 하려고요. 먼저 주무세요.”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 시간, 당장 머릿속에 생각난 것을 노래로 옮겨야 했다.
* * *
“난 B버전이 더 괜찮은 것 같은데.”
“나도 두 번째가 낫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오순도순 샘플 음악을 들어보던 안승준과 김지상이 같은 의견을 냈다.
나는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파일 저장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잠깐 쉬어도 되겠다.
앉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쭉 켜고 나는 식당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빡셌다, 오늘.”
두 사람과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규정상 저녁 연습 시간이 끝나면 연습실 하나를 제외하고 본관 문은 모두 잠겼다.
그래서 연습생들은 밤에 춤‧노래가 아닌 다른 연습이나 작업이 필요하면 기숙사 건물 시설을 이용해야 했다.
지하의 식당은 기숙사 시설 중 제일 다용도로 이용될 수 있는 장소였다. 나는 노트북으로 편곡 작업을 위해, 김지상은 식당 벽에 붙은 대형 TV로 연습 영상을 모니터하기 위해, 그리고 안승준은 컵라면 끓여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무슨 라면이야? 아침에 얼굴 다 붓는다.’
‘저녁을 못 먹었어…….’
핀잔 한 번 줬다가 안승준이 불쌍하게 굴어서 본전도 못 찾고, 송수민한테 받은 과자까지 뜯겼다.
물론 식당에는 우리 셋 말고도 드문드문 가사 작업을 하거나 서로 떠들거나, 야식을 먹는 연습생들이 더 있었다.
실내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나름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식당은 늘 사람이 왁자지껄 많아서 마이크도 안 설치해 둔다고 하더라.
“인마, 그만 뺏어 먹어. 받은 거라고.”
말리지 않으니까 안승준이 남의 과자를 동낼 기세라, 나는 과자 박스의 입구를 다시 잘 접어 챙겼다.
노트북 위에 과자까지 올려놓고 구석으로 밀어놓자 김지상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누가 줬는데?”
“그냥 우리 팀 애가.”
“형은 팀원들이랑 꽤 사이 좋은가 봐.”
승준이가 부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게 칭얼거렸다.
나는 거기다가 대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어깨만 으쓱였다. 말하자면 너무 길고 말할 수가 없단다…….
“다들 지낼 만은 하냐.”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워 손목에 턱을 괴고, 나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마 김지상에게 조금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아직 대진표도 안 짜였으니까, 조금 걱정이 이르긴 하지만……. 이 2차 경연에서부터 류희재가 김지상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김지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대답을 가로챈 자 있었으니, 안승준이었다.
“형 오기 전에도 우리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왜,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냥 조금.”
“무슨 일 있었는데?”
안승준은 그렇게 운을 띄워놓고도, 내가 묻자 우물쭈물 대답을 주저했다.
방송에서는 어떻게 나왔더라?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연습생 한 명을 안승준이 도와주었던 것 같은데.
옛날 〈데프아〉에서 승준이는 은근히 분량이 적었다.
이야기 들려달라고 슬금슬금 귀찮게 굴었는데도 애가 자기 유리한 얘기만 해서…….
내가 이미 아는 것은 그저 일부. 이런 고민거리 따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안승준 부끄러워한다.”
김지상이 작은 소리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지상이는 말을 덧붙여, 내게 정확하게 일러바쳤다.
“애들이 말 잘 안 들어서 힘들었대.”
“야!”
안승준이 외쳤다. 하지만 폭로를 듣고 내가 웃음을 터뜨린 게 그보다 먼저였다.
아, 힘들었어?
우리 연습생 생활할 때 제일 제멋대로 뺀질뺀질 굴고 말 안 듣던 우리 승준이가?
“그랬구나, 승준아.”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들어봐.”
안승준은 귀 끝까지 벌게진 채로 해명을 시작했다.
* * *
사전투표 결과 8위.
정의헌만큼 상황을 완벽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승준도 이 결과의 원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스테리나인이어서, 기존 스테리나인한테 팬이 있어서 얻은 순위다.
소속사 평가 때보다 겨우 한 계단 위로 올라간 등수였으나 의미만은 남달랐다.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내가 생각해도 제대로 못 했어.’
8위 결과를 받은 안승준은 첫 번째 합숙에서 리더를 역할을 맡았을 때보다 열의를 불태웠다.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김에 열심히 해보자.’
그러나 완성된 2차 경연 팀은 그 의욕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한 구성이었다.
안승준의 8조 팀원들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경쟁력이 부족했다.
리더를 제외하면 최소 16세, 최대 19세로 이루어진 그룹. 사전투표 결과 가장 낮은 순위가 94위. 리더 다음으로 제일 높은 순위도 25위.
고작 사전투표였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사전투표에서부터 성적이 나빠 문제였다.
다들 평범했다.
회사가 유명하지도 않고, 비주얼이 뛰어나지도 않고, 경력이 대단하지도 않고…….
그저 어중간했다. 어중간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곳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VIK’ 선배님들의 〈속삭여〉를 일단 추가할 거고.”
안승준은 일부러 높은 톤의 목소리로 팀원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묵묵부답. 선곡 의견을 모을 때나 콘셉트를 결정하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이미 모두의 얼굴에 두꺼운 우울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었고, 증상은 꽉 막힌 침묵으로 나타났다.
사람은 열 명이나 되는데 초조해 발을 구르는 사람은 안승준뿐이었다.
“그리고 ‘러키세븐’ 선배님들의 〈Bow Wow〉 추가하려고 하는데. 얘들아, 듣고 있어?”
1지망 선곡은 4년쯤 전에 발매된 청량한 분위기의 여름 시즌 러브송이었다.
물론 〈Bow Wow〉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청량한 노래였고, 안승준은 선곡에 자신이 있었다.
우선 이 팀의 비교적 낮은 평균 연령은 청량 콘셉트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팀들이 전체적으로 청량하거나 귀여운 것을 기피하는 듯한 눈치라, 틈새시장을 노리고 싶었다.
사실 안승준의 진심은 조금 더 터프한 노래를 희망했지만…….
* * *
“……그래도 팀에 어울리는 곡을 고르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서. 애들 다 어리니까 너무 센 컨셉은 애매하고, ‘차라리 힘을 빼고 가는 게 전략적으로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거지.”
“아하……. 머리 잘 썼네.”
“아무도 안 하는 거 먹겠다는 생각으로 갔어. 여름이니까 여름 노래, 좋잖아.”
“그런데 너 방송은 9월에 나갈 수도 있다는 거 알아?”
“초 치지 마라.”
“아 넵넵.”
“이 형 일부러 이러는 거라니까? 남이 진지한 말만 하면 자꾸 이상한 태클을 걸어.”
* * *
아무튼 안승준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다 괜찮아?”
“…….”
“주형이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무엇이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의사 표현이 없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곡 다음 과정, 파트를 나누고자 해도 욕심을 내는 팀원이 없었다.
“알았어, 너희 다 괜찮다고 하면 메인래퍼는 내가 하기로 하고.”
안승준이 홀로 팀에서 연장자 겸 리더 겸 킬링파트 겸 메인래퍼를 맡아도 박수 한 번이 없는 상황.
모든 결정은 물 흐르듯 빠르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메인보컬 해보고 싶은 사람 없어? 자신 있는 사람?”
“…….”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리 애써가며 진행해도 리액션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안승준은 기어이 팀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가며 의사를 묻기 시작했다.
“영빈이 어때. 저번에 보컬 쌤한테 칭찬도 받았잖아.”
“그래도 제가 메보를 할 정도는 아니라서…….”
“영빈이 안 되면 민찬이는?”
“저도 자신은 없는데……. 해볼까요?”
객관적으로 실력이 나쁜 연습생들은 아니었다. 탁월한 것은 아니었으나 형편없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만고만하게 짧은 연습 경력에 비해서는 잘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수준.
풀이 죽어서 포텐셜을 터뜨리지 못하는 것은 괜찮다, 안승준은 생각했다. 그런 건 잘 북돋아 주면 되니까.
만약 춤이나 노래 실력이 미숙한 것뿐이라면, 그것도 합숙하는 동안 배우면 되니까. 괜찮다.
차라리 그런 상황이었다면 안승준은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들이 집중을 안 하네.’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해도 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엉망진창이었다.
리더의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거나, 말을 걸어도 다른 곳을 보며 듣지 않거나, 이미 확인하고 진도를 나간 부분을 계속 다시 질문하는 등.
안승준은 이해하고 또 참고자 노력했다.
‘애들이니까 한 번만 봐주자. 나도 저 나이 때는 만만치 않았고…….’
그러나 수많은 다짐도, 사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기어코 그날 저녁, 안승준은 폭발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