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4화
04. Goosebump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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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채호원과 한바탕 실랑이한 뒤 사흘에서 나흘 정도 지났을까.
합숙은 끝났고, 나는 스테리나인 멤버 이영하를 찾아갔다.
“영아, 커피 사줄게. 나와봐.”
“나 카페인 끊었는데.”
정확히 말해서는 회사에서 혼자 연습 잘하고 있던 이영하를 억지로 끌고 온 느낌이다.
“셋 셀 동안 나오면 너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어쩌고로 사준다. 하나, 둘.”
“기다려! 진정하고 기다려!”
“……둘 반. 둘 반의반…….”
영수증에 찍힌 제품명을 보니까 민트초코 피스타치오 오레오 쿠키 어쩌고를 갈아 넣은 아이스 음료라고 하더라.
밥은 굶으면서, 갖다 대기만 해도 혀가 녹아버릴 것 같은 단 음료는 좋아하는 이영하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튼 이영하의 그것과 초라하고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카드로 긁고 우리는 회사 휴게실로 돌아왔다.
대화의 시작은 당연히 지난 일주일 동안의 근황 보고였다.
“지상이는 아까 출근하면서 봤어. 승준이도 왔다 간 거지?”
“어. 걔는 오늘 저녁에 가족 모임 있다고 바로 가더라.”
물론 합숙 끝나자마자 스테리나인 단톡에서 이미 대부분 썰을 풀어서 새 소식은 별로 없었다.
심각한 뒷이야기를 공유한 건 아니고, 촬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이야기 위주였지만.
“이사님이 뭐라고 하셔?”
“그냥 고생했다고 하시던데.”
1차 합숙이 종료된 것은 금요일. 토요일은 휴가고, 일요일에 나와 승준이, 지상이는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보고하고 다음 합숙까지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등 업무를 처리했다.
다른 연습생들이라면 촬영 일화까지 회사에 낱낱이 브리핑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회사 어나더뮤직은 원래 아티스트 관리에 살짝 유난인 구석이 있었다.
우리 바로 위의 선배 보이그룹이 고삐 풀어줬더니 이래저래 말썽 피운 게 많아서 그렇다.
잘못은 저기서 했는데 후폭풍은 우리가 전면으로 맞은 셈.
그 형들 덕분에 나는 스무 살에서 스물둘까지 3년 동안은 핸드폰도 없었고, 데뷔 후 5년 넘게 연애는 물론이고 개인 SNS, 담배, 클럽 등의 유흥, 타투, 귓불을 제외한 피어싱까지 회사에 금지당하는 신세였다.
금지 목록이야 딱히 하고 싶다는 멤버도 없었지만, 핸드폰 없는 건 좀 힘들긴 했다.
“그건 그렇고,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영하가 막 빨대로 휘핑크림을 휘젓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본론을 꺼냈다.
“그럼 그렇지. 갑자기 뭘 사준다고 했다. 뭔데.”
“스픽스 알아?”
그리고 나는 채호원과 나눈 대화를 아주 많이 생략하고 영하에게 설명했다.
연예계 뉴스에 빠삭하기로는 내 주변 사람 중 이영하가 제일이기에.
아, 물론 영하도 딱히 연예인 친구가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다. 얘는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와 검색 중독이라서 그렇다.
“소문은 모르고 오피셜 뜬 거라면…….”
내 말이 끝나자 이영하는 스마트폰으로 내게 뉴스 기사를 하나 찾아 보여주었다.
다섯 달 전인 올해 2월에 작성된 기사였다.
* * *
‘스픽스’, 앤섬 그룹 탈퇴‧유현 입대… 남은 멤버 향후 활동은?
아이돌 보이그룹 스픽스(SPIX)의 앤섬(본명 황정현)이 그룹 탈퇴 소식을 전했다.
2월 10일 스픽스의 소속사 넥스트레코드는 공식 SNS를 통해 “스픽스는 금일을 기점으로 6인 체제로 팀을 재정비한다”며, “당사와 앤섬은 심도 있는 대화와 논의 끝에 앤섬의 그룹 활동 마무리를 합의했다. 멤버 전원 앤섬의 향후 진로와 음악적 견해에 관해 존중의 의사를 밝혔다”고 공식 입장을 공개했다.
이어 소속사는 “또한 멤버 유현은 오는 3월 9일 군입대 예정”이라며 “유현은 추후 군 전역 후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임을 전했다.
2012년 싱글 ‘말해줘’로 데뷔한 스픽스는 결성 당시 7인조로 출발했다. 앤섬의 탈퇴, 유현의 입대로 스픽스는 알트, 서연, 영진, 호원, 토오루 5인조로 활동할 전망이다.
* * *
“헐.”
“몰랐냐고.”
이영하가 홈 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멤버가 둘 빠지고 서바이벌 출연까지 겹치면 활동할 수 있는 멤버가 세 명은 되나 모르겠다. 소속사 신고식 때 보니까 스픽스에서도 채호원 혼자 〈데프아〉에 출연한 게 아니던데.
앞으로 그룹 활동이 불투명해서 채호원은 더 이를 악물고 〈데프아〉에 매달리는 건가. 대충 맥락이 읽혔다.
“어, 이것도 있다.”
내가 혼자 속으로 채호원의 언행을 회상하고 있으니까, 이영하는 핸드폰으로 뭘 더 찾아왔다.
스픽스를 탈퇴한 맏형이자 리더 ‘앤섬’과 군 생활을 같이하는 사람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신변잡기였다.
탈퇴한 멤버도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바로 입대한 건가. 나는 눈으로 영하 핸드폰 화면을 훑어 내려갔다.
‘입대하고 논산 훈련소에서 아이돌 했던 사람 만났다.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음.’
그런 식으로 썰을 풀어놓았는데 글빨이 좋아서 내용이 소소하게 다른 유머 커뮤니티들에도 퍼 날라진 모양이었다.
작성자는 그룹과 멤버 이름을 초성으로 처리했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바로 정답을 알아낼 수 있는 수준.
솔직히 말해 별다른 인증도 없고 쓴 사람 주관도 많이 들어가서,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글이었다.
하지만 팬덤 문화에 아예 무지한 사람이 쓴 글이다 보니 민감한 이야기에 필터링이 없었고, 그게 묘하게 신빙성을 조성했다.
심지어 글 올라간 게시판 이름이 무려 ‘풍선아트 봉사활동 메모톡’인데? 여기까지만 봐도 작성자는 진짜 아이돌에 관심 없는 사람일 것 같다.
문제가 되는 대목은 글 중간쯤에 슬쩍 지나간 문단이었다.
‘아무튼 그 형이 잘하는 게 엄청 많았음. 거의 훈련소 맥가이버. 선임들이 되게 좋아함. 나중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룹 활동할 때 멤버들이 덜떨어져서 이것저것 대신 해주다가 그렇게 됐대. 아 물론 전 멤버들 덜떨어진다고 본인이 직접 말한 건 아님. 대충 비슷한 말이긴 했음. 덜덜 아이돌 리더는 다 그러냐?’
크게 불탈 주제는 아니지만, 스픽스의 기존 팬들이라면 의아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글.
내가 보기에는 리더의 말도 왜곡이 많이 된 것 같은데……. 글을 읽은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여기 그룹 팬분들이 엄청 싫어할 것 같은 글이다.”
그야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이영하의 코멘트에 긍정했다. 비난의 화살이 아예 탈퇴한 멤버에게 향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링크를 받아서 내 핸드폰으로 인터넷 게시물의 원본을 찬찬히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음…….’
리더가 탈퇴한 일이 채호원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탈퇴하는 과정에서 멤버들끼리 무슨 다툼이나 큰 사건이 있었나.
혹시 이 리더 형과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어서, 내가 불편한 걸지도?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 보고도 놀라듯이.
내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자, 이영하가 내게 질문했다.
“신경 쓰여?”
“조금.”
“흐음…….”
“걔가 너랑 은근 타입이 비슷하거든.”
무슨 의미인지 감이 안 잡히는지 이영하가 대답 없이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렸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남은 커피를 식도에 털어 넣으며 나는 말을 계속했다.
“조용하고, 낯 많이 가리고, 남에게 의지 안 하고 혼자 하는 걸 너무 익숙해하는 스타일이라서……. 대충 감이 오지? 먼저 가서 자주 체크해 줘야 하는 것까지 너 닮았어.”
“너…… 에게 나는 그런 이미지구나.”
떨떠름하게 말하는 이영하에게 나는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새삼 이영하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손이 참 많이 갔었는데.
그래도 이제 영하는 오래 알고 지내서, 나도 쟤 방식을 알고 쟤도 내 스타일을 안다.
그룹 내 유이한 맏이. 동갑내기에 친구. 우리는 많이 싸우면서도 많이 화해했다.
이 세계의 이영하는 모를 추억까지도 뭉게뭉게 떠올라서, 발진하는 감동에 나는 급히 생각을 차단했다.
하여간 이런저런 대화와 사건이 있었지만, 내 속에서 채호원은 그렇게까지 기분 나쁜 악당 이미지는 아니었다.
열심히 잘하는 팀원을 향한 거시적인 호의가 아무래도 자잘한 곤란함을 이겨버린 것 같다. 합숙 도중 채호원은 팀에서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까.
“그래서 너, 나 축하는 언제 해줄 거냐.”
“아. 맞아. 투표 잘됐다면서.”
나는 웃으며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1등.”
연습생 100명 자체 투표 결과, 10팀 중 1등 혜택은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중간 평가 이후로는 우리가 만들고 트레이너들이 수정한 안무로 연습생 전원이 최종 촬영을 연습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단체 촬영은 지금 전송한 안무로 진행합니다.’
‘저희 지금까지 만든 안무랑 편곡은요?’
‘그것도 나중에 사용할 건데요, 최종 촬영 연습은 전송한 곡으로 해주세요.’
어떤 연습생이 손을 들고 질문하는데 제작진은 매몰차게 입장을 고집했다.
예고한 대로 제작진은 시그널 송의 10팀 10색 서로 다른 어레인지 버전도 따로 영상을 찍어가기는 했다.
그간 조금 친해진 스태프한테 듣자 하니, 신생 영상 플랫폼이 협찬사라서 영상 콘텐츠를 최대한 많이 찍어 올려야 한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까 PD 놈들이 연습생들에게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많이 시켰는지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1차 합숙 동안에도 별의별 영상을 다 촬영했다.
팀별 퍼포먼스 영상, 팀 퍼포먼스 개인 세로 직캠, 100인 단체 퍼포먼스 영상, 100인 단체 개인 세로 직캠은 기본이고. 선공개용 개인 라이브 퍼포먼스 세로 직캠에 더불어 온갖 브이로그, 비하인드 콘텐츠, 무슨 대본 있는 콘텐츠까지.
듣자 하니 ‘소속사별 훈련 경기’ 최종 TOP10에게 돌아가는 개인 베네핏도 개인 직캠을 다른 연습생에 비해 먼저 공개해 주는 것이란다.
그렇게 촬영할 것도 많고 스케줄도 촘촘하다 보니, 팀 안무와 100인 단체 안무가 같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 되었다.
지상이의 백덤블링 역시 교묘하게 이목을 끌어, 우리 팀은 마흔 표 정도를 받고 1등이 되었다.
압도적인 표 차나 과반수 득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2차 합숙 전에 〈뮤직 채널〉 특별 촬영도 할 거래. 대단하지 않냐.”
어깨를 으쓱으쓱 과장되게 올리며 자랑하자 이영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으래, 좋겠다. 너 프로필 공개된 건 알아?”
“어? 벌써?”
프로필 사진은 합숙 전에 찍었으니까, 슬슬 나올 때가 되긴 됐다.
이영하는 또 핸드폰을 조작해서 내 〈데프아〉 공개 프로필 사진을 찾아왔다.
나는 내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켜놓고, 두 스크린 속 내 모습을 비교해 본 뒤 말했다.
“생각보다 잘 나왔다.”
“그러게.”
여유롭게 웃는 얼굴의 전신 사진, 그리고 노골적으로 반전된 분위기를 풍기는 프로필 컨셉 포토.
일부러 다른 느낌으로 찍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한눈에 잘 보이게 나올 줄은 몰랐다. 좋게 말하면 유니크했다.
지상이와 승준이,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의 프로필 사진까지 보고 비교해 보면 내 사진은 더 돋보였다.
그러니까……. 혼자 컨셉 다르게 잡았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