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3화
03. Giddy Up(6)
때는 네다섯 시간 전쯤, 점심시간 무렵. 여기서부터 사건을 조금 회상해 보기로 하자.
개인 연습이나 생활할 때가 아닌 촬영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장면의 경우 우리는 협찬 의상을 입었다.
트레이닝복은 교복 브랜드가 만든 체육복을, 신발은 운동화 브랜드에서 만든 가벼운 재질의 러닝화를.
그랬기 때문에 옷이나 신발을 돌려쓰거나, 마음만 먹으면 몰래 바꾸어놓는 등의 행동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점심 먹고 옷 갈아입고, 바로 연습실로 내려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맞춰보게.’
우리는 중간 평가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에 연습실에서 최종 점검을 해보기로 약속했다.
그중에서 채호원과 나는 점심을 거르고 일찌감치 연습을 시작했고, 이때 나는 채호원에게 말했다.
‘너 무게중심이 제대로 안 잡히는데. 다리에 힘을 줘봐.’
‘이거 신발 바닥이 조금 미끄러워. 밑창이 접지가 제대로 안 돼.’
그렇게 대답한 채호원은 이것저것 확인하며 두 번이나 신발을 새것으로 갈아 신었다.
‘누가 신고 밖에 나갔나 보다. 고무가 막 갈려 있어.’
채호원은 닳은 신발을 들어 내게 보여주며, 멋쩍게 말했다.
형광 노란색 신발 밑창에 난 거친 자국은 말마따나 아스팔트 따위에 갈린 흔적 같았다.
시간은 금방 흘러가 점심시간이 끝나고, 지상이나 다른 애들도 곧 연습에 합류했다.
반면 김병석이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촬영 리허설 이십 분 전이었다.
심지어 연습실에 등장한 김병석은 협찬 의상으로 환복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병석이 형, 점심 먹고 바로 오라고 했잖아요! 왜 이제야, 아니……. 무슨 냄새가…….’
열심히 따라와 주던 팀원 중 하나가 김병석에게 따지려고 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김병석 몸에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던 탓이다. 당연하지만 촬영장은 금연일뿐더러 담배 소지도 규정상 불가능하다.
‘왜. 점심 먹고 바로 왔잖아. 촬영 시작하려면 이십 분이나 남았고.’
‘네? 뭐라고요?’
김병석은 도리어 우리에게 짜증을 냈고, 분위기는 날카로워져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일단 애들을 말리며 채호원에게 부탁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빨리하면 세 번은 맞춰볼 수 있으니까. 호원아, 의상 좀 가져다주라.’
당시에는 몰랐다. 애초에 신발 생김새까지 신경 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넘어진 김병석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그만 김병석의 신발에 눈을 두고 말았다.
형광 노란색 러닝화.
사이즈, 색상, 그리고 밑창에 난 자국 모양까지 같았다. 그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일부러 그랬냐.”
“일부러라니.”
채호원은 피식 웃으며 웅웅 작동되는 세탁기 하나에 걸터앉듯 기대어 섰다.
“우연이었어.”
채호원이 간단하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 손상된 신발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노라고.
리허설 직전 급하게 의상을 챙겨오느라 제대로 살필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었단다.
하지만 마지막 연습이 끝나고, 신발의 흠을 알아챈 채호원은 김병석을 뒤늦게 불러세웠다.
‘김병석, 그거 신발이…….’
‘됐어요.’
하지만 김병석은 채호원의 말을 무작정 잔소리로 여기고 대화를 거부했다. 그래 놓고 짜증스러운 티를 팍팍 내며 채호원을 두고 먼저 가버렸다고.
그 단계에서 채호원을 다시 말 걸어보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자업자득이지.”
채호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나라면 거기서 어떻게든 불러내서 신발을 고쳐 신게 해주었겠지만, 채호원은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라면 내가 호구에 전두엽 녹은 놈이고 이 녀석의 대응이 상식적인 거겠지. 덮어놓고 채호원을 비난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피해자라고.”
채호원은 카메라가 있어야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김병석은 내가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 취급은 아니지 않나?”
“너도 똑같아. 데뷔 경력 있잖아. 그러면 김병석한테는 악역이야.”
나는 이번 일로 점수 좀 딴 것 같은데……. 이게 중요한 건 아닌가?
쓸데없는 자의식 과잉 발상은 속으로 삼키고, 나는 채호원의 주장을 마저 귀담아들었다.
“걔는 이렇게 생각할걸. ‘아이돌 활동한 연습생은 욕심내면 안 된다’. ‘진짜 간절한 것도, 정당한 기회를 가진 것도 나뿐이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 믿음이 안 흔들리니까 엄청 당당하지.”
채호원은 참,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너도 김병석 같은 애들한테까지 잘해주려고 노력할 거 없다고.”
왜 이렇게 이상하고 한결같은 결론을 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오지랖이 넓은 건 내가 아니라 채호원인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채호원은 ‘누가 괜히 남 걱정하는 일’ 자체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그런데 너 이 이야기하려고 나 부른 거 아니지?”
“…….”
“궁금한 거 따로 있잖아. 김병석이 사고가 신발 때문인 거 눈치챘냐 안 챘냐, 이거 아니야?”
조잘조잘 김병석 썰을 풀던 채호원이 입을 다물었다.
“병석이는 몰라.”
그리고 나는 채호원에게 임시 의무실에서 내가 김병석과 나눈 대화를 조금 알려주었다. 김병석이 어떻게 화를 냈는지, 내가 김병석을 어떻게 달래주고 나왔는지 등등.
숨길 것은 대충 숨기고, 말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은 솔직하게 전달했다.
한바탕 회고가 끝나자 채호원은 냉정하게 코멘트를 남겼다.
“너 그런 애들한테까지 너그럽게 구는 거, 엄청 이상한 거 알아?”
“대외비 알려줬건만 감사하는 태도가 글러먹었군…….”
“딴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들어. 너 누구 편이야.”
“아니, 누구 편이냐고 하면 나는 피해 보는 애들 편이긴 한데.”
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김병석을 대놓고 갈구고, 어린애들한테 접근 못 하게 했는지 까먹은 건가.
과잉 진압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타인을 대할 때에는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그리고, 김병석은.
“……아직 애잖아.”
“한 살 차이인데?”
“그런 게 있다. 일단 한 팀이기도 하고.”
성인도 20대 초반이면 애다.
게다가 지금은 한 살 차이도 진짜 한 살 차이가 아니라서 말이다.
채호원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면전에서 욕먹고 당황해서 나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말이냐?
“그놈의 팀, 그놈의 그룹. 그놈의 동생들.”
내 얘기 맞네……. 채호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나는 빼주라. 네 보호 범위에서.”
“야, 야. 타임.”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나는 다급하게 대화를 끊어냈다. 나도 잠깐 머리로 정리를 해보자고.
우선 채호원이 지금 열받은 이유는 내가 김병석한테 너그러워서는 아닌 것 같다. ‘나야, 쟤야? 쟤라고? 죽어!’도 아니고, ‘걔를 용서하다니 네 인성에 실망했다’도 아니고. 그보다는 뭐랄까.
‘팀원들 챙기는 게 싫고 답답하다?’
아니, 답답하기만 했다면 ‘난 빼달라’는 말 같은 건 안 할 거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하겠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는 두 번째 삶은 웬만하면 선량하게 살기로 노선을 정했다.
그게 맞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시간 돌려서 혼자 이득 보는데, 사람이 매너라도 있어야…….
‘……아무튼, 채호원은 본인이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거야.’
스스로 달라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에 얽힌 일일 테고.
이 상황에서 해볼 법한 추측은……. 채호원과 가까웠던 사람 중 누군가가 녀석한테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었다는 것. 간섭을 심하게 했다든가, 괴롭혔다든가, 아무튼 채호원이 삐뚤어질 계기를 제공한 거 아닐까.
나는 과거 음악방송 대기실이나, 아이돌 명절 체육대회 같은 데서 마주친 채호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니까 회귀 전 말고, 정말 먼 과거에 봤던 모습 말이다. 스픽스는 〈데프아〉 종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했으니까.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나눠본 기억은 없지만 그때 채호원의 이미지가 지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스픽스 멤버들과 있던 채호원은 현재 이 모습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었고 즐거워 보였다.
‘일단은 그 모습을 믿어보는 게 좋겠다.’
채호원처럼 열심히 하는 애는 싫지 않으니까, 기준도 좀 관대해지는 것 같다.
뭐, 지금은 대화 정리부터 해야겠지만.
“호원아, 우리 서로 입장 꼬이기 전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생각을 마친 나는 채호원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녀석이 오해할 만한 것들 위주로.
“나 너 안 싫어하거든. 싫어할 이유도 없고, 사실 되게 잘 지내보고 싶어. 매일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도 엄청 멋있는 것 같고, 네가 아이돌 선배님이니까 그것도 되게 리스펙트하고 있어.”
“…….”
“물론 너한테도 사정이 있고 취향이 있겠지. 그러니까 네가 나 싫다고 해도 별로 안 억울해.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어, 진짜 솔직히 말해서.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김병석이라는 친구 때문에 우리 관계가 틀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나 걔 실드 칠 생각 없어. 걔가 너나 팀원들한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내 입장이 그렇다는 건 알아두라고.”
이게 최선이다. 애가 싫다는데 좋아해달라고 드러누워서 떼를 쓸 수도 없으므로, 오해라도 정정하는 수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조심스러워지는 건 당연하다. 합숙 끝나면 뒷사정을 수소문해 보든가 해야겠군.
내가 본새 안 나는 설득과 변명을 이어나가자 채호원의 표정이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했다.
긴 침묵 끝에, ‘나 떨떠름합니다’라는 감정을 광고하는 것처럼 꽉 다물린 입매 틈으로 답이 새어 나왔다.
“……난 너랑 친해지기 싫어.”
젠장!
채호원의 굳센 고집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때쯤 타이밍 좋게 세탁실 문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열렸다는 점이다.
“실례합니다, 카메라 교체 때문에요.”
카메라를 들고 들어온 스태프가 우리가 선 곳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깨져 버린 흐름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을 돌려 벽걸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가자.”
채호원이 먼저 제안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나가는 녀석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스태프에게 들리지 않을 음량으로 조용히 채호원에게 말을 걸었다.
“야, 그런데 나 진짜 착하지 않냐. 너 화풀이도 다 받아주고.”
그러자 채호원이 코웃음과 함께 뭐라고 대답했냐면.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참 어이가 없는 답변이지만……. 그 순간 나는 모순되게도,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채호원의 걸음이 느려져서, 앞서가던 녀석이 금시에 나와 나란히 걷게 되었기 때문에.
어? 이거 될지도. 가능성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