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2화
03. Giddy Up(5)
나는 작게 숨을 내뱉고, 생각한 바를 트레이너들에게 말했다.
“둘 중에 한 명이 대신 뛰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방송에 이상하게 편집되어서 나올까 봐 말하면서도 조금 두렵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서 생각을 숨길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무대의 완성도 면에서도, 김지상과 채호원의 소망 면에서도.
김병석의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으니까. 물론 아이디어만 쏙 빼먹는 결과야말로 김병석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겠지만, 그건 그놈 업보다.
“좋네. 이 김에 봐줄까? 원래 하기로 했던 두 명 누구야?”
댄스 트레이너 우솔이 가볍게 제안했다. 길었던 고민이 한 번에 무색해지는, 산뜻한 말투였다.
하지만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트레이너가 직접 뽑아준다면 우리끼리도 잔말이 안 나올 테고.
나는 고개를 돌려 눈짓으로 김지상과 채호원을 불러내었다.
* * *
‘기본 실력은 둘이 비슷해 보이는데요.’
‘페이스가 더 안정적인 건 채호원 연습생 아닐까요?’
‘난 김지상 연습생이 가운데에 있을 때 분위기가 더 잘 잡히는 것 같아. 전체적으로.’
‘저도 우솔 선생님 말씀에 동의. 지상이가 병석이 자리랑 조정해서 아예 센터 쪽으로 조금 오는 건 어때?’
‘그것도 좋겠네요. 김지상 연습생 비주얼이면 눈에 확 들어오니까.’
댄스 트레이너들의 주도와 다른 트레이너들의 동의로 백덤블링 퍼포먼스의 주인이 바뀌었다.
투표와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결론에 김지상은 수줍은 듯 기뻐하며 임명을 받았다. 치료받고 있을 김병석에게 약간 미안해질 정도로 사이 좋은 분위기였다.
“튜토리얼 중간 평가 촬영 종료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의 우렁찬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우고, 그렇게 첫 번째 중간 평가가 종료되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열 개의 팀 중에서 제일 칭찬을 많이 받았다.
류희재의 1조가 생각보다 혹평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위라서 집중 포격 겸 제작진의 견제를 받은 듯했다.
“그래도 잘된 것 같아요, 그렇죠?”
“너무 무서웠는데 생각보다 잘했던 것 같아요.”
촬영장을 나서는 우리 팀 분위기는 제법 훈훈했다. 서로 웃으며 떠드는 게, 다들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했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도 우리 팀이었으므로.
“의무실 이쪽으로 가면 돼요?”
“……의무실? 아마도요?”
내가 복도 끝을 가리키며 묻자 장비를 들고 지나가던 스태프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의 그 발언은 정답이자 오답이었다. 나는 맨 끝방 문을 열며 진실을 깨달았다.
〈데프아〉 촬영 현장에는 의무실은커녕 의료진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빈 대기실에 열린 구급상자와 함께 앉아 있는 김병석을 보자마자 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
“스태프가 알려주던데요.”
붕대를 감아놓은 것도, 쓸데없는 약 뚜껑이 열려 있는 모습도 엉망진창이었다.
김병석은 스태프가 인터넷으로 검색해 알려주는 것을 따라 혼자 응급처치를 했단다.
“냉찜질은?”
“안 했어요.”
“어이고…….”
나는 급한 대로 일 층 자판기에 달려가 시원한 음료수 병을 하나 뽑아 돌아왔다.
냉찜질은 음료수 병으로 대신하고, 구급상자를 뒤져 붕대도 제대로 다시 감아주었다.
비록 나도 인터넷발 정보를 활용하긴 했지만……. 십 분쯤 뚝딱뚝딱 끝내놓고 보니 그래도 김병석의 셀프 치료보다는 아웃풋이 괜찮았다.
김병석은 입을 꾹 다물고 날 노려보며 응급 치료를 받다가, 내가 소파 옆자리에 털썩 앉자 그제야 퉁명스레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작가님이 알려주시더라.”
뭔가 십 분 전 문답과 멘트가 똑같군.
나는 김병석에게 지금까지 결정된 것에 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다. 남은 이틀의 스케줄과 중간중간 들어가는 자투리 촬영 안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중간 평가 심사평과 파트 변경 일까지. 전부 숨기지 않고 말했다.
“원래 쌤들이 만들어놓은 안무랑 편곡 샘플이 있는데, 예상보다 수준이 높아서 그거 안 쓰고 연습생들이 만든 곡이랑 안무로 진행하겠대. 쌤들끼리 투표해서 대표 편곡, 대표 안무 하나 뽑을 예정이라고 하더라. 오늘 저녁부터는 그걸로 음원 녹음이랑 100인 단체 촬영 연습 들어갈 거고.”
그렇다. 시그널 송 어레인지에 관해서는 그렇게 결론이 났다.
이 말인즉, 내가 예전에 방송을 통해 본 〈데프아〉 안무는 트레이너들이 제작한 춤이라는 거다.
멋모르고 기억나는 대로 따라 하지 않고 새로 만들어서 다행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
“그리고, 뭐……. 백덤블링은 김지상이 맡기로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결정을 했고.”
“…….”
“너는 일단 회복부터 해. 도저히 안 되겠으면 자진 하차도 된다던데, 그러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이걸 왜 내가 얘한테 직접 이야기해 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쭙잖은 친절로는 김병석의 기분을 풀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쌓일수록 김병석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아이씨.”
덜컹.
김병석이 다치지 않은 쪽 발로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을 세게 밀어냈다.
이건 아주 의도가 분명한, 나 보라고 하는 과장된 액션이었다.
심술도 이런 심술이 없다. 나는 옆으로 피해 일어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너.”
“형 지금 제가 꼴 보기 좋고 그래요?”
당황스럽다.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져오니까, 반응이 바로 안 된다.
그 틈을 타 김병석이 벌게진 얼굴로 외쳤다.
“형이 원래 제가 백덤블링 한다는 거 반대했잖아요. 의헌이 형은 김지상 편인 거 다 알아요. 지금 형 원하는 대로 됐잖아요. 그래서 좋은 거 아니에요?”
방금까지는 당황했는데, 여기까지 들으니까 황당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시비를 거는 거라면 나도 세게 나가겠지만, 현재 김병석의 말투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냥 본인 실수인 것을 자각했으면서도 자기방어와 합리화를 위해 남 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현타 온다.’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겠지……. 난 어른이니까.
“침착하게 들어봐, 김병석. 내가 너 싫어서 반대한 게 아니잖아. 다칠 것 같으니까 더 연습하라고, 더 연습하지 않으면 못 뛸 거라고 한 거지. 난들 너 넘어져서 좋겠냐.”
팩트를 꼬치꼬치 체크해 주려다가 그냥 그쯤에서 자제했다.
* 팩트: 사실 이 모든 것은 김병석의 쓸데없는 고집과 노력 부족으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김병석도 고작해야 20대 초반인데 이런 애를 다그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나 싶었다.
거기까지 말하니까 김병석이 얼굴을 본인 두 손바닥에 파묻기에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 이제 어떡해요…….”
김병석은 눈물 콧물을 짜내며 울기 시작했고, 나는 옆에서 기다렸다.
‘겨우 이런 일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살다 보면 사소한 일로도 세상 다 무너진 것 같을 때가 오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은 달래주도록 하자. 밉상이고 짜증 나는 녀석이어도 일단 당장은 한배를 탔으니까.
“무리하지 마. 다른 애들도 다 너 걱정하더라. 그러니까 일단은 회복에 집중하고, 다음에 잘해서 만회해. 이번 경연으로 바로 탈락하는 거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김병석도 서서히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사실 애들이 걱정한다는 말은 순전히 애를 달래주기 위한 MSG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자.
‘더 쉬어보고, 저녁 연습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임시 의무실을 나왔다.
“……뭐냐.”
그리고 의무실을 나오자마자 문 바로 앞,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채호원과 마주쳤다.
처음에는 채호원이 김병석에게 용건이 있는 줄 알고 비켜주려고 했다. 그런데 채호원이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 아닌가.
“들어가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말해.”
내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자 채호원은 눈짓으로 김병석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 이거 또 얼마나 곤란한 소리를 하려고…….
그보다 들었나. 김병석과 내가 한 이야기. 방음 신경 쓰는 걸 보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방에 카메라가 있는데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호원은 따라오라며 나를 저 멀리까지 사람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안무 우리가 만든 걸로 픽스됐어. 녹음은 1조 편집으로 한대.”
“1조 편곡이랑 우리 안무가 맞나? 수정 들어가?”
“그거 쌤들이 하신다더라. 수정 끝나면 우리 부르러 오신대. 안무 시안 촬영할 거라서.”
좋은 소식이었지만 무덤덤하게 전하는 채호원 때문에 나까지 반응이 삼삼해졌다.
채호원이 나를 밀어 넣고 또 따라 들어온 장소는 숙소 건물의 꼭대기 층, 세탁실이었다. 아무도 없고, 양말이나 티셔츠, 잠옷 따위가 걸려 있는 건조대나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탁기만 몇 대 놓인 곳.
채호원이 타일이 다닥다닥 붙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서며 말했다.
“여기 카메라 고장 났대.”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시선을 올려 세탁실 천장을 살폈다.
채호원의 말마따나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 지지대만 설치되어 있고, 기계 본체가 없었다.
“한여름이잖아. 실내 습기 때문에 망가졌다더라.”
“네가 그랬냐?”
채호원이 내 날 선 질문을 웃어넘겼다.
“나는 그냥 발견한 거지. 지금은 스태프가 가져갔어.”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카메라가 없다?”
“말하자면.”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이런 장소까지 만들어 나를 끌고 온 것일까.
채호원은 자신이 무고한 발견자인 듯 말했지만, 듣는 입장으로서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정말 카메라가 한 대도 없을까. 나는 눈으로 세탁실을 다시 훑어보았다. 눈에 띄는 건 없는 것 같긴 한데.
“…….”
침묵이 흘렀다. 내가 경계심을 숨기지 않자 채호원도 먼저 주제를 꺼내지 않고 말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불렀으면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지. 참다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신발.”
“뭐?”
“……잠깐. 욕한 게 아니라.”
아……. 말해놓고 내 발음에 내가 놀랐다.
아무튼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니까. 순간 난처함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나는 마저 캐물었다.
“김병석 신발은 왜 바꿨냐, 너.”
카메라도 없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굳이 피할 것 없는 주제였다.
아직 경연이 끝나지 않은 이상,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채호원한테 확인을 받아야 할 필요도 있었다.
채호원의 표정이 미소한 채로 멈추었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 낯빛도 곧 평온하게 바뀌었지만.
“무슨 소리야?”
“대답이나 해라. 나도 본 게 있는데, 너 말고 할 수 있는 사람 없었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 다 보인다.
이 자식은 그렇게 행동하고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