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0화
03. Giddy Up(3)
“나는 그래. ‘1등하고 싶다’, ‘데뷔하고 싶다’, 그런 다짐을 계속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여기 규칙이니까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아. 나도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욕심을 내고, 절실하게 하려는 중이고.”
“…….”
“그리고 나는……. 형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지상이의 웃음기 가신 얼굴과 나를 똑바로 마주 보는 두 눈이 올곧기 그지없었다.
‘그러게……. 김지상은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이 묘하게 까칠한 말투, 왠지 참 오랜만이다. 실제로도 오랜만인 게 맞긴 하지만.
‘얌전하게 생겨서 독설가, 차가운데 착한 놈.’
김지상은 선을 그어놓고 사람을 대하는 타입이었다. 가까운 이들 앞에서는 숨김이 없지만, 선 밖의 타인에게는 절대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안 그럴 것 같아서 자존심도 강한 데다가 예민하기는 또 엄청 예민하고.
겉으로는 잘 대하다가도 일이 끝나면 ‘사실 저 사람, 불편하고 무서웠어’라고 코멘트하는 성격.
그래서 지상이가 설명 없이 그룹을 탈퇴했을 때, 우리 멤버들은 이런 이유로도 충격을 받았다.
‘사실 지상이는 우리에게도 불만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어서.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그 의심은 바보 같은 것이었구나.
김지상에게는 분명 우리에게조차 이야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조금 믿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래서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좋아했을 거야.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말은 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보라고?”
“응.”
과거 김지상은 훌륭한 몰입감과 노력으로 〈데프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데뷔 경험이 없는 연습생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김지상 연습생은 활동 경력만큼 실력도 뛰어나고, 의지와 열정이 넘치죠.’
지금도 기억할 수 있는, 지상이가 〈데프아〉에서 트레이너들에게 들은 평가.
방송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하거나 프로그램이 끝난 뒤 다시 보면서, 나는 영상 속 김지상의 태도에 몇 번이나 감탄했다. 멤버끼리도 지상이가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쑥덕거렸을 정도니까. ‘김지상이 각오하고 나갔다’고.
지상이는 필사적으로 춤을 추고, 나서고, 본인 포지션이 아닌 랩이나 어려운 보컬 파트에 도전했다.
내가 아는 김지상과 TV 속 김지상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낯가림이 심하고, 생각 많고, 행동이 느리고,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일 귀찮아하던 김지상은 〈데프아〉에 없었다.
〈데프아〉에서의 김지상은 승부욕으로 불탔고, 작은 기회라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았다. 그러므로 지상이의 말에 담긴 열정도 알아챌 수 있었다.
“형도 열심히 해보자. 우리 경쟁자잖아.”
“너 나 이길 수 있겠어?”
“그래도 이길 생각으로 해야지.”
잠깐, 말 던지고 생각해보니 김지상 전에 최종 3위였는데.
얘랑 경쟁하려면 최소 3위는 해야 한다는 거네. 빡세다.
“……그러면 나도 이길 생각으로 해야겠네.”
하지만 해야지, 어쩌겠어.
‘김지상이 나랑 경쟁해 보고 싶다잖아. 그러면 나도 응해줘야지.’
동기부여를 해보자. 긴장을 풀지 말고.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 * *
속을 털어놓고 경쟁심리에 불을 지핀 것에 반해 우리는 별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개인 파트도 따로 없는 떼창 곡에 서로 같은 팀이라서 애초에 다툴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오히려 나를 피곤하게 만든 것은 백덤블링 파트를 가져간 김병석이었다.
“랩메이킹은? 오늘 끝낸다면서?”
“대충 했는데요. 형, 한번 봐주세요.”
김병석이 건네준 공책에 수기로 적혀 있는 가사를 보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Win Win 잘 봐 나의 폼 넘사벽, 교복 치마 펄럭 Shout out But 넌 오빠를 못 막아
제일 괜찮은 벌스가 그 수준이었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원곡과 심상도 안 어울린다.
썼다가 지운 흔적 밑에는 원래 무슨 단어가 적혀 있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병석아.”
“넵.”
“네가 양아치냐?”
다행히 가사는 괜찮게 써온 다른 연습생이 있어서 그쪽을 사용하자고 결론이 났다.
다른 방법 없었으면 그냥 원곡 가사 그대로 가자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심각한 작사였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병석, 놀지 말고 해.”
“저 방금 앉았는데요.”
이 자식이 글자 그대로 가지가지 했다. 개인 연습을 시켜놓으면 탈주하고, 단체 연습 시간에는 남들 다 연습할 때 혼자 바닥에서 뒹굴고.
이십 분 전부터 앉아서 연습용 태블릿PC로 SNS 보던 거 다 내가 모르겠냐고. 싫은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불편한 분위기 만들고 싶지 않아 애써 삼켰다.
“그런데 그거 언제까지 해요? 진도 너무 안 나가는데.”
김병석이 드러누워서 턱을 괴고, 연습을 구경하다가 질문했다.
퉁명스러운 말이 툭 던져지자 내 뒤에서 연습하던 애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야 당연했다. 애초에 김병석부터가 나한테 말하는 척하며 저 애들을 저격한 거였으니까.
〈데프아〉 1차 경연은 전원을 실력(일단은 이렇게 표현하자)으로 줄 세운 다음, 순위의 일의 자리가 같은 연습생을 팀으로 묶었다.
다시 말해 같은 팀 안에서 실력의 편차가 필연적으로 생기는 구성이었다.
등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낮은 점수를 받은 멤버는 상대적으로 스킬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우리 팀에 들어온 62위는 카메라만 보면 긴장해 덜덜 떨었고, 72위는 아이돌 연습생 2주 차였으며, 82위는 그냥 살면서 한 번도 춤을 배운 적이 없단다.
하지만 이 친구들이 멘탈 깨져서 소극적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 팀워크는 나락으로 간다.
그런 문제 안 생기도록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애들을 어르고 달래고 칭찬해 주고 쓰다듬어 줬는데!
‘괜찮아! 주눅 들지 마. 하면 금방 늘어.’
‘카메라는 나중에 보고, 동작부터 외우자.’
‘이게 기본 동작이거든. 알겠어? 서른 번만 따라해 보자. 손끝이랑 팔꿈치에 힘주고!’
결과적으로 기본기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김병석 입장에서는 답답했나 보다.
“저런 거 진짜 제가 삼 년 전에 회사 처음 들어갔을 때 하던 건데.”
그리고 김병석은 내가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주절주절 나 때는 이랬고 저랬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별로 악의가 있는 소리도 아니고, 정말로 기다리기 심심해서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김병석은 신나서 떠들고 연습하는 애들은 점점 주눅 들고, 집중력도 흩어지고.
더 내버려 두면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 같아서 나는 참다 참다 한마디를 했다.
“너 백덤블링 연습하고 있어.”
“뭐 굳이 그런 연습을…….”
“해야지. 처음에 뛴 이후로 한 번도 안 했잖아.”
김병석은 대놓고 달갑지 않은 표정을 했다.
사실 백덤블링 연습 권유도 지금껏 몇 번 해왔다. 김병석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연습을 마다해 계속 지체된 것뿐.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니 더 미룰 수도 없었다.
“갑자기 어디서요?”
“매트 가져올까?”
가만히 있던 채호원이 끼어들었다.
얘도 어지간히 김병석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나 보다.
“매트 3층에 있을걸.”
3층 연습실, 세 명 세워두고 백덤블링 오디션을 본 장소다.
첫날은 거기서 연습하다가 3층을 다른 클립 촬영에 사용한다고 해서 한 층 내려온 게 여기.
김병석은 팀 맏형들, 나와 채호원이 나서서 압박을 넣으니까 무력하게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이 있는지 본인이 매트를 가져오겠다고는 안 하더라. 결국 팀원들에게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 채호원과 나는 한 층 계단을 올랐다.
“네가 나설 줄은 몰랐다.”
“시끄럽게 하잖아.”
내가 운을 떼자 채호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뭔가 보기보다 기가 좀 세지 않나?’
그동안 나는 바빴고, 채호원은 혼자서도 성실하게 잘했다. 다시 말해 내가 터치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얘가 원래부터 붙임성 없고 내성적인 편인지 의사소통을 해도 긴 대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채호원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아는 정보라고 해봐야 2012년 데뷔한 그룹 ‘스픽스’의 멤버고, 나와 나이가 같다는 프로필이 다였다.
아, 궁금한 건 있긴 하다. 얘는 데뷔할 때 회사에서 무슨 동물을 붙여줬을까.
채호원은 생각을 예측하기 쉽지 않은, 눈꼬리가 위로 사납게 올라간 샤프한 인상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상냥했다면 토끼고 냉정한 사람들이라면 뱀으로 결론을 냈을 것 같다.
원래 아이돌 시장에서 토끼상과 뱀상은 이상한 공통분모가 있다. 이거 TMI인가?
“들어오세요!”
하여간 우리는 노크부터 하고 3층 연습실 문을 열었다.
촬영 장비가 설치되고 있는 내부, 한쪽 구석에 매트가 돌돌 말린 채로 놓여 있었다.
채호원과 내가 나타나자 현장 스태프 한 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다가왔다.
“뭐 필요하세요?”
“저기 매트리스 가져가려고요. 연습할 때 필요해서요.”
“어, 잠시만요.”
스태프는 곤란한 듯 매트리스에 다가가 살펴보고, 곧 다시 돌아왔다.
“그게. 저 매트, 페인트가 묻어가지고.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대신 1층에 창고 있거든요.”
“어? 첫날에 사용했었는데. 그동안 뭐가 묻은 건가요?”
“아뇨, 원래부터. 묻어 있는지 모르고 쓰게 했다가……. 여기 보면.”
내가 질문하자, 스태프가 손가락으로 우리가 서 있는 발밑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내려보니, 말마따나 파란색 페인트가 바닥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쓸 때는 몰랐는데 남은 흔적이 꽤 컸다. 매트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쓸린 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자세를 굽혀 손가락으로 파란 얼룩을 쓸어보았다. 이미 색이 들었는지 손에는 먼지만 묻어났다.
“그러면 창고로 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스태프에게 인사하고 그대로 나오려는데 채호원이 묵묵부답이었다.
불러도 답이 없어서 나는 채호원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야, 가자.”
“어? 어. 그래.”
그제야 채호원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따라왔다.
뭐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나? 바닥과 채호원을 번갈아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뭔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조금.”
넘어진 기억이 나서 그런 걸까. 나는 첫날 연습실에서의 일을 열심히 떠올려보았다.
빠른 8박자. 첫 번째로 김병석, 두 번째로 김지상, 그리고 마지막 순서가 채호원. 안정적인 자세로 뛰다가 마지막에 매트 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미끄러진 순간 채호원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을 했고……. 왜 미끄러졌지?
또한 매트가 쓸린 자국을 관찰하던 채호원.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린 퍼즐이 달각거렸다.
‘쓸린 자국……. 방향?’
복도와 계단을 걸으며 나는 채호원의 옆얼굴을 힐끔 곁눈질했다.
‘착지했을 때 매트리스가 밀려난 방향.’
넘어진 본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누가 매트를 슬쩍 흔들어서, 발이 미끄러진 거라면……. 채호원은 몇십 시간 혼자 의혹을 품고 있다가 바닥에 남은 흔적으로 증거를 확인한 것이다.
매트리스 위에서 채호원이 실수했을 때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제작진을 제외하면 둘. 김병석과 김지상.
그런데 김지상은 아니다. 채호원이 뛸 때 아예 내 옆으로 나와 있었으니까, 위치상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작진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고.
‘그렇다면…….’
용의자는 한 명.
그렇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한다고? 카메라에 찍힐 수도 있는데?
채호원을 잘 따라가던 걸음이 느려지다가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