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8화
03. Giddy U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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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신호를 보내자 안승준이 입모양으로 뭐라고 대답했냐면.
‘짜증 나게 굴지 마라…….’
웃기는 놈이다.
하여튼 〈데프아〉의 리더 업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9년간 리더로서 일한 거 단체 인사 선창이랑 신곡 소개밖에 없는데……. 심지어 둘 다 매번 내가 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아이디어부터 모아볼게요.”
곳곳에 카메라가 널린, 강당 중앙. 나는 경연 안내사항이 적인 유인물을 손에 들고 말했다.
처음부터 창작 미션이라니 갈 길이 멀었지만, 이건 지원서 ‘창작 가능 분야’ 항목에 이것도 저것도 동그라미 친 나의 업보 같기도 했다.
“제한이 조금 많긴 하네요. 안무 동선 이동 금지, 콘셉트 변경 불가능.”
동선 이동이 안 되는 까닭은 단체 영상 촬영 편의를 위해서.
콘셉트 변경은 이 노래가 〈데프아〉를 상징하게 될 신곡이라서 안 된다고 한다.
“편곡이랑 안무 창작은 넣을 거고요, 랩메이킹은……. 할 줄 아는 사람?”
“어, 저요. 랩메이킹이면 가사 쓰는 거죠? 저 할게요.”
42위로 팀에 합류한 연습생, 스물두 살 김병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처음 보면 리젠트 스타일로 올린 앞머리와 어깨와 팔에 붙은 근육, 와일드한 외형 정도가 눈에 먼저 들어오지 않을까. 스스로 소개하기로는 목포에서 온 사나이란다.
“접수. 할 수 있는 사람 더 없어요?”
“그런데 꼭 모든 분야 창작이 들어가야 할까요?”
두 번째 질문의 주인공은 채호원. 날개뼈까지 오는 베이지색 장발을 반묶음으로 묶은, 22위를 받은 팀원이었다.
한 가지 더 특징을 더하자면 보이그룹 ‘스픽스’의 멤버라는 것. 활동이 몇 번 겹쳐 통성명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친하지는 않았다. 즉 사실상 초면인 셈.
별개로 아이돌 데뷔 경력이 있는 연습생이 세 명이나 여기 같은 팀에 있는 건 신기한 우연이긴 하다.
아무튼 채호원의 염려는 이상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내가 무리해서 다 뜯어고치자고 주장하니까.
“그거 말인데요.”
나는 제작진에게 받은 태블릿PC로 시그널 송 가이드 영상을 재생했다. 나도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란 말이지.
작곡가의 가녹음에 맞춰 녹화된, 안무가 팀이 스튜디오에서 춤을 추는 코레오그래피 영상.
난이도 있는 동작이 많다. 대중적으로 쉽게 따라 추라고 만든 게 아니라 정말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한눈에 구분되게’ 기획한 퍼포먼스 같았다.
그렇다기에는 후렴구가 굉장히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안무의 우선순위는 ‘심사 > 대중’인 것 같았다.
“안무 진짜 어렵다…….”
“이건 춰야죠. 안 바꿉니다.”
김지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단칼에 잘라내고, 나는 영상이 끝나자마자 태블릿PC를 다시 가져왔다.
“바꾸는 건 여기, 이 동작들.”
그리고 어플 맨 오른쪽 하단의 재생 바를 앞으로 끌어당겨 지나간 장면을 다시 플레이했다.
허공을 발로 번갈아 차는 동작, 물결치듯 팔을 부르르 떠는 동작, 그리고 인터넷 밈으로 유행하는 가슴을 튕기는 춤까지. 움직임 자체만 놓고 보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안무인데……. 영상 속 댄서들은 열심히 추고 있었다.
“이런 춤들은 대놓고 함정이거든요.”
‘함정’, 이거 너무 강한 단어인가?
하지만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상 속 댄서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이 댄서들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인식이 되었다.
‘그것도 그렇고, 배경 벽에 스튜디오 로고가 너무 대놓고라서…….’
촬영 장소는 로메오 스튜디오. 센터에 선 검은 티셔츠가 안무가 김산 선생님.
물론 로메오 스튜디오 소속 댄서는 산 쌤 말고도 많이 계시는데, 이건 안무 스타일부터가 그냥 산 쌤이었다.
‘김산 선생님, 유명하시지.’
산 쌤은 트렌디한 아이돌 안무를 주로 작업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에 진지한 성격이시다.
심지어 철학과 고집이 있는 분이라, 아무리 방송이 요청했다고 해도 이런 코믹한 안무는 절대 결과물로 안 내실 거다.
그 증거로……. 적어도 이런 동작들은 내 기억 속 본방송에서는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편곡에 제한이 좀 있잖아요. 콘셉트 변경 금지 규칙이라든가.”
나는 숨겨야 할 정보는 숨기고, 알려야 할 것을 골라 팀원들에게 알렸다.
“그렇게 엄격하게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 세 파트는 앞뒤로 연결이 별로 안 돼요. 안무 콘셉트도 튀고 움직임도 갑자기 끊기고. 잘 보면 여기랑……. 여기. 이때 잠깐 몸을 정면에 두고 동작을 멈추는데, 이거 일부러 걸리는 느낌 나라고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요약하자면 약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빈칸을 채우시오’ 같다고나 할까.
내가 설명과 동시에 골라낸 파트는 1절 초반, 2절 중간, 그리고 하이라이트 직전 파트였다.
“그리고 노래 잘 들어보면 딱 이 부분에서만 불협이 좀 나요. 멜로디랑 드럼 반주 리듬도 따로 놀고요. 내가 보기에는 연습생들 창작하라고 아예 일 분 정도를 비워준 것 같아. 그러니까 짚어본 곳 위주로 수정을 해보는 게 어때요.”
너무 놀라네. 시간도 없는데 괜히 분위기가 늘어질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안무 얘기 먼저 할게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저랑 같이 안무 짤 사람도 구합니다.”
그 말에 채호원이 슬그머니 거수했다.
“아이디어?”
“……안무 창작 같이하려고요.”
분업 좋지. 채호원이 손을 내리니 김병석이 번쩍 두 팔을 다 올렸다.
“창작?”
“아이디어요.”
“지원자들이 통일성 없군…….”
“애초에 형이 한 번에 두 개 물어봤잖아요.”
“어, 타당한 지적이다. 예리하네. 아이디어 말해봐요.”
내가 메모 중인 종이에 펜 끝을 굴리며 묻자, 김병석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저 하이라이트 파트에 백덤블링이요!”
지나치게 생기가 돌아 대답하니까 왠지 느낌이 불길하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잘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것도 같았다. 일단 아크로바틱 자체가 무난하게 좋은 아이디어였다.
투표자가 같은 연습생들인 이상, 득표를 위해서는 단순히 멋있는 게 아니라 남들이 못하는 퍼포먼스를 해내야 할 테니까.
구성에 아주 어긋나는 동작도 아니고……. 글자 그대로 ‘하이라이트’ 느낌을 내기에는 제법 괜찮을 듯싶었다. 머릿속으로 무대를 한번 설계해 본 뒤, 내가 아이디어 목록 맨 끝에 ‘백덤블링’을 적어넣자 김병석이 싱글벙글 웃었다.
“제가 진짜 끝내주게 돌거든요. 학교 다닐 때도 별명이 도른자였는데…….”
“저, 잠깐만요.”
그때 채호원이 김병석의 말을 끊고,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돌아갔다.
“저도 할 줄 알아서요, 백덤블링.”
오……. 채호원의 한마디에 다들 숨을 죽였다. 그렇지만 백덤블링이 들어가게 된다면, 탐이 날 만한 파트긴 했다.
클로즈업이든 풀 쇼트든 개인 컷 확정에 실력 인증도 되고, 단순하게만 생각해도 그냥 멋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는 게 이득이지. 가만히 있던 김지상마저 손을 들고 말할 정도였다.
“……백덤블링 저도 도전해 보고 싶은데요.”
다른 팀원들도 확인해 보았는데, 백덤블링이 가능한 후보는 저 세 명이 다인 것 같았다. 김병석, 채호원, 김지상. 이렇게 여러 명의 욕망이 겹치는 상황에는 마침 딱 좋은 방법이 있다.
“이 세 명으로 오디션 한번 보죠.”
나의 공명하고도 정대한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는지 김병석이 입술을 댓 발 내밀었지만, 굴할 내가 아니었다.
노래나 미리 듣고 외워두라고 다른 연습생들을 잠시 풀어주고, 세 후보와 나는 연습실 한구석에 매트를 깔았다.
재미있는 촬영거리라고 생각했는지 현장 스태프 몇 명도 카메라를 들고 우리를 쫓아왔다. 본인 과제 버리고 구경하러 온 우리 팀이나 다른 팀 연습생도 대여섯 명 있어서, 시작하려고 보니 어쩐지 현장이 조금 복작복작했다.
“딱딱딱딱, 딱딱딱딱. 이렇게 빠르게 여덟 박 씁니다. 도움닫기에 핸드스프링 들어가고, 뛰는 동작까지만 볼 거예요.”
내가 악보를 읽으며 선언하자 세 명과 구경꾼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순서로 뛴 김병석은 무게중심이 불안한 감이 있었지만, 실수하지 않고 무사히 동작을 마쳤다.
지상이는 배운 대로 잘 따라 해서 큰 특색은 없으나 눈에 띄는 흠이 없고 안정적인 느낌.
그래도 둘 중 고르자면 김지상일까. 그런 중간 평가를 속으로 내리고 있을 때였다.
쿵!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마지막으로 뛴 채호원이 그만 매트 위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아…….”
채호원이 제 발목을 손으로 감싸며 작게 신음했다. 자세도 힘 조절도 좋았는데 착지할 때 발을 헛디뎌 다친 모양이었다.
착지만 성공했으면 딱 좋았을 텐데……. 괜스레 나까지 안타까워진다.
“괜찮아? 많이 다쳤어요?”
채호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네 알았습죠’ 하고 넘어가기에는 순식간에 낮아진 채호원의 텐션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잠시 채호원을 앉혀두고 발목을 살폈는데, 다행히 부상은 경미한 수준이었다.
‘음, 그래도 매트 두 장만 더 깔걸.’
나름의 반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귓가에 다소 큰 목소리가 울렸다.
“결정된 거죠?”
김병석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채호원을 계속 살피고, 스태프한테 얼음에 손수건까지 받아서 건네주기도 하는 지상이와는 반응이 딴판이었다.
이 자식……. 너무 당연하게 자기가 파트를 따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두 명으로 결승 한 번 합시다.”
“진짜요?”
김병석이 순식간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녀석이 대충 무슨 내용으로 꼬투리를 잡을지 예상이 되었기에, 나는 미리 선수를 쳤다.
“대신 결정은 제가 안 할게요. 채호원 연습생이나 다른 보고 계시는 분들이 심사해 주시는 거 어때요.”
어차피 객관적으로 봐도 김지상이 더 잘 뛴다. 같은 소속사, 같은 그룹이라서 밀어준다는 오해도 사양하고 싶고.
내가 제안하니 김병석은 주변 카메라를 슥 돌아보더니, 방송을 의식한 것치고는 몹시 자극적인 발언을 뱉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제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김지상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는 처음이잖아요. 기회 한 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되나요.”
지상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근방에 놓인 카메라와 그 너머 스태프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지 스태프들 얼굴이 기뻐 보였다면 내 착각이겠지? 그런데 내가 스태프여도 상황이 흥미로울 것 같긴 하다.
김지상을 보면서 말하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나랑 채호원을 같이 저격하는 셈이기도 하니까. 한마디로 일석삼조.
처음 소속사별 무대에서부터 높은 점수를 기록한 스테리나인의 우리 둘, 그리고 5년 차 아이돌 스픽스 멤버 채호원.
김지상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나에게까지 시선을 주자, 나는 슬쩍 입 모양으로 말해주었다.
‘괜찮아.’
싸워도 되고 후퇴해도 돼. 괜찮으니까.
한쪽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벙긋거렸으니까, 카메라에는 찍히지 않고 정면의 김지상에게는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