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화
01. MIROH(1)
「긴 시간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소중한 우리 스테리나인 멤버들. 고마워. 너희가 내 두 번째 가족이야.
그리고 제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팬들 레디.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 늘 감사하고 또 미안합니다.
스테리나인은 이대로 끝이 나지만, 저 정의헌은 계속 나아갈 테니 부디 따스히 지켜봐 주세요.
과분한 사랑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스테리나인이라서 행복했습니다. 사랑해요.」
A4 크기 색종이에는 손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 정체는 며칠 전 스테리나인 해체 소식을 알리며, 공식 카페에 스캔해 업로드한 편지의 원본.
버려야 할 서류더미 속에서 이영하가 발견해 내게 건네주었다.
“안 버리고 가져갈 거지?”
“응.”
받은 종이는 잘 접어 이삿짐 상자에 끼워 넣었다.
상자 안은 이미 연습복과 운동화, 목베개, 미니 선풍기, 블루투스 스피커 같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물건을 어찌나 오래 썼는지 내용물이 죄다 낡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회사가 망해서 짐을 빼는 중이다.
보이그룹 스테리나인, 일명 ‘스나’의 해체와 동시에 소속사는 폐업 절차를 밟았다.
순식간에 진행된 폐업에 그룹 맏형들인 나와 이영하는 아침부터 바빴다.
집에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류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직원들을 도와 가구도 뺐다.
연습실 청소는 오늘의 마지막 일과였다. 빗자루로 마룻바닥을 쓸고 있는데, 문득 우편물을 정리하던 영하가 손에 작은 봉투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이것도 네 거다.”
귀여운 초콜릿 도넛 일러스트가 프린트된 하늘색 편지봉투. 받는 사람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보내는 사람 이름은 스티커로 가려진 채였다.
보통 편지는 집에 가져가 혼자 읽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
투둑, 봉인이 뜯기고 봉투 속에서 편지지 두 장이 나왔다.
나는 정성스레 눌러 적힌 손글씨를 눈으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의헌이 안녕!
날씨 너무 많이 추워졌지. 잘 지내?
올해도 우리 의헌이 혹시 겨울 오는 거 모르고 지내다가 감기 걸릴까 봐 걱정돼서 편지 써봐.
누나는 허니만큼 추위를 안 타는 게 아니라서 벌써 패딩 꺼냈어. ㅜㅜ
의헌이도 더 추워지기 전에 겨울옷이랑 가습기 꺼내두자!
10월 되니까 요즘 자꾸 〈프레스토〉 활동 때 생각난다.
재작년에는 가을부터 너무 추웠잖아. 첫방 뮤직채널 녹화 새벽에 한다고 해서 첫차로 서울 올라가서 밖에서 줄 서고, 나 정말 그때의 추위 잊을 수 없어. ㅜㅜ
그래도 역조공 선물도 받고 미니 팬미팅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추억이고 소중한 일이었던 것 같아. 그치?
공카에 손편지랑 해체 기사 봤어.
나도 속상한데 의헌이는 얼마나 슬플까 걱정도 되고, 의헌이 손편지 답장도 쓰고 싶고, 옛날 생각도 나고, 그냥 마음이 많이 싱숭생숭해서 내가 편지를 꼭 써야겠다 싶더라.
덕질 2년 차지만 편지를 보내는 건 처음인데, 문장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네.
사실 우리 안 좋은 일도 힘든 일도 많았잖아.
운이 안 좋아서 생긴 일도 있었고 어쩔 수 없는 불행도 있었고.
그래도 나는 스테리나인 응원하는 동안 많이 즐거웠고 많이 행복했어.
의헌이가 레디들한테 받기만 한 게 아니고, 우리도 좋은 것들 소중한 것들 충분히 받았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다.
(무슨 내가 레디 대표인 것처럼 말하네 ㅋㅋㅋ 말해놓고 보니까 조금 민망한 것 같기도 하구 ㅋ...)
그러니까 허니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우리 리더로서 많이 노력해 줬다는 거 알아. 고맙다는 말만 받을게!
나는 의헌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기회는 있어. 나도 늦게 입덕했고 새 팬도 계속 생겼는걸.
우리 절대 포기하지 말고 멈추지 말자. 사람들이 의헌이를 모르는 것뿐이니까.
의헌이도, 그리고 스테리나인도,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이거든.
의헌이의 미래와 삶을 평생 응원할게.
수가 많지 않더라도 응원하는 사람이 언제나 네 뒤에 있다는 걸 기억해 줘.
너의 행복을 빌어. 네 앞길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
의헌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한 편이니까.
늘 고마워. 사랑해. 앞으로도 사랑할게!!
“…….”
“왜 그래?”
“아니야.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자.”
하마터면 약간 울컥한 마음을 들킬 뻔했다.
괜히 민망해진 탓에 나는 괜스레 이영하를 툭툭 건드리며 연습실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빈 연습실에 혼자 남은 뒤에는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오랫동안 다시 읽었다.
‘어떡하냐, 이걸.’
해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뒤에는 쓸데없는 생각도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막연한 응원을 받고 나니 앞으로에 관한 고민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편지지를 손에 든 채로, 그대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춤을 포기할 수는 없어. 당연히…….’
공사를 시작하기 전이라, 아직 연습실 벽에는 낡은 전신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이 보였다. 난생처음 연습용 가벼운 실내화가 아닌 실외용 스니커즈를 신고 연습실에 들어온 나.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생각을 상식과 이성의 궤도 위로 올려놓기 위해 애썼다.
‘절망하지 말자. 아이돌이 아니어도 춤은 출 수 있잖아.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도 많아.’
다짐은 이어졌다. 가까이에서 나를 마주 보기 위해 나는 거울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할 수 있어. 당장 오늘 저녁부터 댄스팀이나 스튜디오 먼저 찾아보자.’
오케이. 거울 속 나는 웃는 얼굴이고, 허우대 멀쩡한 데다가 정신 건강하고, 의지도 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안개가 낀 것처럼 내가 선 위치에서부터 거울이 뿌옇게 흐려졌다.
‘……?’
반사적으로 거울 표면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이상한 기운이 손아귀에 맞닿았다.
“어?”
마치 거울 안쪽에서 내 손을 움켜쥐고 세차게 당기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나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 * *
우당탕.
큰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그대로 나무 바닥 위로 넘어졌다.
무릎을 부딪혔는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데…….
‘뭐지?’
나무 바닥의 정체는 무대였다. 기억에 없는 구조의, 커다란 극장의 무대.
관객은 한 명도 없이 텅 비었고 한 줄기의 조명만 나를 비추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나뿐이었다. 스태프도 동료도 없었다.
꿈을 꾸듯 자연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꽤나 뜬금없는 상황.
다른 사람이라도 찾기 위해 움직여 보려는데, 객석 방향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 잠깐, 가지 마세요.
또렷한 발음이지만, 특이한 높낮이였다.
기계가 내는 소리의 보이스톤을 낮추거나 올려놓은 것처럼 성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소리가 난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계속 쳐다보니 불현듯 객석 중간쯤에서 동그란 불빛이 켜졌다.
어두운 남색 ‘미드나잇 블루’를 배경으로, 펄을 흩뿌린 것처럼 연한 청록색 ‘클라우디 민트’가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리나인의 공식 색상이었다.
멀리서 남색과 청록색이 번갈아가며 빛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알아챘다.
‘우리 응원봉 색이잖아.’
몇십 초는 그 불빛을 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콘서트 생각도 나고.
이런저런 향수가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분명 속으로 말했는데, 들려오는 대답이 있었다.
- 가상 공간이에요. 정확히는 정의헌 씨의 무의식 속이죠.
“……음? 네?”
- 놀라셨죠. 이럴 때면 원래 빠르고 쉽게 트럭을 보내는데, ‘발송인’께서 ‘우리 아기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면 안 돼!’라고 꼭꼭 당부를 하셔서.
아기가 웬 말이냐.
“저 스물아홉인데요. 그나저나 트럭이라뇨?”
- 음, 그게 강력하고 무겁고 빠르고 쉬우니까요. 여러모로.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인 게 아니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아니, 그전에……. 누구세요?”
- 신은 아니고 일단은 천사 정도로 해두죠. 그러니까 본론은, 편지의 발송인이 당신을 과거로 돌려보내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편지…….”
왠지 이 목소리가 말하는 편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맞습니다’라고 목소리가 추임새를 넣었다.
- 그게 그 사람의 소원이었죠. 저는 그것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삐빅.
의미불명의 기계음과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직사각형이 생겼다.
- 참고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편지에 적힌 게 다가 아니니까요.
곧 홀로그램 위로 윈도우 창이 떠오르더니, 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 ‘툿투’ 화면이 켜졌다.
홀로그램은 툿투 계정 프로필과 과거 게시글이 로딩됨에 따라 세로로 길게 늘어났다.
팔로잉은 백 단위에 팔로워는 스무 명 남짓한 비공개 계정.
계정 프로필 사진은 고양이가 엉엉 우는 그림이었다. 웹툰에서 잘라 온 듯했다.
* * *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 해체???????
해??????????체????????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아빨리나퇴근시켜 9분남앗는데? 저 집갈게요 ㅋㅋ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아... 말도안되는소리하지마 소속사 이 됴라이들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아니친구들아....... 이게말이되냐? 스테리나인망했다 진짜망함 해체함 ㅋㅋㅋㅋㅋㅋㅋㅋ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아니... 말도안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눈물도 안나와 이제 그냥 웃겨 짜증나 ㅋㅋㅋㅋㅋㅋㅋ............ 아죽을래 이게어떻게 이렇게끝나 [사진] [사진] [사진] [사진]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근데 아니 우리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 왜이러냐고... 허탈하다... 아니 나 솔직히 언젠가 이렇게 될줄은 알았어 그냥 그럴것같았어 그런데도 너무 충격 ㅋㅋㅋㅋㅋㅋㅋ 아 오빠 아 어떡해 정의헌 ,., , 우리 리더 .... [사진] [사진] [사진] [사진]
김비비(였던 것) @HONEY9BIBI
아 허탈 ㅋㅋㅋㅋㅋㅋ ㅁㅊ... ㅆㅃ 우울해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죽을까? 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bbzzzzzz 나스나못잃는다고.... 킵브라이트닝.... 안녕하세요스테리나인인사드립ㄴ니다.... 의헌아. 나진짜 어떡하면좋냐고 아제발 시간을 되돌려줘 이게뭐야 [사진] [사진] [사진] [사진]
* * *
스크롤을 내리던 내 손이 조용히 멈추었다.
일단 ‘아’라든지 ‘아니’라든지 같은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하시는 게, 상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충격만은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궁금한 것도 하나 생겼고.
- 질문하셔도 됩니다.
“그게, 이런 질문 조금 그렇겠지만……. 살아계시나요?”
- 당연하죠. 하지만 대학로에서 마라탕 제일 매운 단계로 양고기 두 번 추가해서 싹 비우고, 거기에 고량주까지 정신 못 차리고 세 병이나 들이부었으니 위와 장은 죽음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르겠네요.
……거, 걱정되는데.
‘절명의 순간 신에게 비는 소원’ 같은 건 아니라서 그래도 다행인가?
- 다 읽으셨지요?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대략은요. 그보다 더 읽는 건 이 분이 원치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고 이 누나(……겠지?)가 자꾸 제 데뷔 초 셀카 올리잖아요…….
화장이나 염색이나 다 이상하고 사진 필터마저 세피아톤으로 올드한데, 스크롤 내릴 때마다 4장씩 보여서 미칠 것 같다.
이때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옆머리를 빡빡 깎고 컴백한 걸까?
- 흠. 이해는 다 되셨을까요.
“방금 새로운 의문 하나 생긴 거 못 들으셨어요?”
- 아무튼 이런 사유로 정의헌 씨는 지금 당장 과거로 회귀하게 됩니다.
미지의 목소리는 내게 통보하다시피 말했다.
“제 의사는요?”
- 싫어요?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물으니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언어로 정제되지 않는 생각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입안이 썼다.
현재 나는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에 다다랐을 것이다.
성공은 이제 윤곽조차 희미하고, 아이돌이라는 오랜 꿈은 문자 그대로 실패했다.
과거로 돌아가면 나는 마땅히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되겠지.
그룹에서 빨리 탈주하든 미래에 히트할 남의 아이디어를 등쳐먹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리면 이렇게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의 의지가 있고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 생각하는데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선택권은 이쪽에 없어요.
“예?”
- 그야 정의헌 씨의 소원이 아니니까요, 이거.
그 말과 동시에 사방 무대 조명이 깜깜하게 전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