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새 술은 새 부대에 -->
볼크의 손에는 순은색의 금속 장갑이 들려 있었다. 장갑 겉면에 새겨진 문양은 투박하지만 힘이 느껴졌다.
“무겁습니다. 어서 받으세요.”
볼크가 웃으며 말하자, 프레이는 일단 장갑을 들었다.
‘뭔가 새겨져 있는데?’
그는 장갑을 돌려보다가 장갑의 팔목 안쪽 부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철의 주인이 은인에게]
날렵한 필기체로 새겨진 문장.
“이건...?”
프레이는 일단 장갑에서 눈을 돌려 물었다. 볼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큰 장비는 못 만들겠더라고요. 무엇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검은 충분히 훌륭하니 공격은 문제없을 것 같아서, 방어구를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프레이는 장갑의 정보를 살폈다.
[‘볼크’의 ‘은인(恩人)용 장갑’]
[명장 ‘볼크’가 제작한 장갑입니다. 그는 자신의 은인에 대한 감사를 장갑에 새겼습니다. 순 켈라디움으로 제작하여 매우 가볍고 강도는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합니다. 그만큼 가치가 대단한 물건이기에 ‘볼크’는 도난을 우려하여 장갑 겉면에 은을 도금했습니다.]
[은 도금 – 언데드에 입히는 피해가 상승합니다.]
프레이는 설명을 읽고 뜨악한 표정으로 다시 볼크를 바라보았다.
“수, 순 켈라디움이라고요?”
“뭐!?”
옆에서 저게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바이런 역시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세상에...”
“많이 비싼 건가?”
에밀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직 세이렌만이 그 가치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하죠! 순 켈라디움이면... 어림잡아도 기본 400골드 이상일 텐데!”
바이런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매장에서 프레이가 사용하던 검에 대한 열기를 생각해보면 부르는 게 값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겉을 은으로 도금했는데 그 비용도 무시할 건 아니었다.
“아유, 별거 아닙니다. ‘그랜드 마스터’가 주는 물건인데 대충 아무거나 줘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켈라디움은 메탈코어 복구에 쓰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볼크는 다시 그랜드 마스터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의 말에 프레이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제 선에서 쓸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다른 분들에게 줄 게 없어서...”
볼크가 일행을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바이런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닙니다.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고. 피 터지게 싸운 건 프레이니까요. 안 그래요?”
바이런이 동의를 구하듯 두 여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렇죠.”
“멋대로 굴다가 죽기나 하고...”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세이렌은 살짝 볼을 부풀리며 남은 불만을 표시했다.
볼크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다들 좋은 분들이시군요.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든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정말, 좋은 선물 감사드립니다.”
프레이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그를 돕기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아니던가?
켈라인의 오브를 수리해주는 것은 물론이며, 이런 선물까지 받게 되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오히려 고마운 건 이쪽입니다.”
볼크가 손을 내밀었다. 프레이는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프레이 일행은 볼크와 헤어지고 곧바로 마법지부를 찾았다.
“그나마 여기는 건물이 멀쩡하네요.”
프레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합이 몰려있는 중심가 쪽은 피해가 거의 없어 보였다.
“인마, 멀쩡하기는. 여기를 우선으로 고쳐서 그런 거지.”
바이런이 혀를 차며 설명했다.
“아, 그래요?”
“네. 가디움도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유저들에게 일을 주는 조합 쪽을 먼저 수리하기로 했었어요.”
에밀리가 부연설명을 하자 프레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생각했다면 금방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일단 엘레타스 대륙으로 가는 거지?”
“한 번에 신성제국으로 갈 수는 없죠?”
바이런의 물음에 프레이가 되묻는다.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금액을 확인했다.
“잠깐만. 하... 500골드가 사라지니 정말 허전하구나.”
“그래서 얼마 있는데요?”
세이렌이 대답을 재촉했다. 바이런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약 80골드입니다. 프레이가 부활하는 동안 각자 모은 돈을 합해도 그리 많지는 않네요.”
“허... 내가 그렇게 열심히 부품을 치웠는데...!”
세이렌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얻어낸 금액이 적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에밀리의 마법으로 번 돈이 대부분인데...”
“뭐라고요?”
바이런은 세이렌을 곁눈질하면서 중얼거리자 그녀가 눈을 치켜뜬다. 프레이는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나섰다.
“자자, 그러면 가죠. 일단 엘레타스로 가서 다시 여비를 벌면 되죠.”
“그래. 그럼 들어가자고.”
프레이와 바이런을 선두로 건물로 올라가니 에밀레에게 편지를 건네줬던 남자가 안에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에밀리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내부는 정리 중인지 여기저기 서적이 가득했다.
“지금 순간이동 할 수 있습니까?”
“아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정리 중이던 책장을 놔두고 안쪽의 문을 열었다. 일행이 모두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네 분 모두 이용하시는 건가요?”
“예.”
프레이가 대표로 대답했다.
“장소는...”
“매지카...”
“바로 해안가로 갈 수는 없나요?”
에밀리가 불쑥 물음을 던졌다. 그녀의 물음에 마법사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정체를 몰랐다면 모를까, 그녀가 베네피스의 딸이라는 걸 옆에서 들었으니 굽신거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 노력해보겠습니다.”
“네?”
“아, 아뇨. 가능합니다!”
그는 최대한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가능하기도 한 일이었고.
“그러면 요금은...”
“그 거리라면 인당 30골드...”
“어이구, 120골드야?!”
바이런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에밀리도 미간을 찌푸렸다.
돈이 부족해서 지은 표정이지만, 마법사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있는 사람들이 진짜 더하는구나...!’
마법지부는 엄연히 마법연합 소속이다. 베네피스는 마법 연합 구성원 중 가장 강력한 마나홀드 대학 학장이 아니던가?
그의 딸을 소홀히 대접했다가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랐다.
“다, 단체 할인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에밀리의 주름이 조금 펴졌다. 마법사는 안도하며 빠르게 말을 붙였다.
“예, 옛! 지금 보유하신 금액이 어느 정도...?”
“한 8...”
“아니 70골드 정도 있습니다.”
프레이의 입을 가로막고 바이런이 대답했다.
“형?”
“가만있어, 인마.”
프레이가 놀라 묻자 그가 손가락을 올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하하... 70... 골드요.”
마법사의 눈이 흔들린다. 정가에서 무려 50골드나 차감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단체 할인이 있다고 일단 던져뒀으니 어떻게든 할인은 해주어야 할 터였다.
‘50골드면...’
매우 큰 금액이다. 물론 마법지부에서 일하는 만큼 기본적인 급여가 높아 감당하지 못하는 액수는 아니었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과연 50골드가 베네피스 학장의 딸에게 비위를 맞추는 데 써야 할 돈인가?’였다.
바이런은 대충 그의 상황을 짐작했다. 그렇기에 프레이의 입을 막고 10골드를 깎아봤던 것이었다.
‘이렇게 꽉 조여주고...’
협상은 처음부터 원하는 조건이 나오지 않는다. 본래 서로 간의 합의가 도출되는 과정이니까.
다만 지금은 서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
“70골드는 아...”
“아, 5골드가 더 있었네요.”
마법사가 거절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바이런은 전혀 몰랐다는 듯 연기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에 다시 마법사의 눈이 흔들렸다. 원래 50골드로 생각되던 비용이 5골드나 줄었다.
마치 이익인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바이런은 그런 생각을 유도했다.
‘먹혀라...!’
바이런과 마법사가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벌이는지에 상관없이 다른 일행은 지루한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예, 그 정도 할인은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어서 가도록 하죠.”
바이런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재촉하고, 다른 일행들을 마법진 위에 서게 했다.
혹시나 마법사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이동해야 했으니까.
그는 곧바로 돈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네, 75골드 받았습니다.”
곧 그가 수인을 맺자 마법진이 푸른색으로 차오른다.
“근데 왜 저번에는 단체 할인을 안 해줬을까?”
“4명 이상이어야 하나 봅니다.”
세이렌의 물음에 바이런이 빠르게 대답했다. 에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할인 정책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스팟-!
푸른 섬광과 함께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또 무슨 일로 오신 게요.”
페이완 장로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자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 지 1주일도 되지 않았으니까.
“한동안 오퀸에서 지내게 되어 인사차 들린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베네피스의 대답에 페이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불쾌한 듯 엘프 특유의 긴 귀를 날카롭게 세웠다.
“지금부터 하는 대화는,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으음...”
페이완이 침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음... 다 물렸군.’
마나탐지를 통해 기척을 확인한 자들이 모두 넷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훌륭한 제자들이로군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요. 내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다시금 검은 피를 토하는 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이완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워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 무엇입니까?”
“장로님. 이곳에서 제가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베네피스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꺼내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페이완은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르템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야 흔한 일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쉽게 변하는 종족이니 말입니다.”
“그대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자기비하는 갑자기 웬 것이오?”
베네피스는 입술을 실룩였다. 그는 이전에 읽어낸 프레이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모르템의 마수가 이제는 다른 종족에게도 뻗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유약한 피스칸조차 모르테미안이 되니 말입니다.”
“피스칸? 그들이 겁쟁이인 건 사실이나 리퀴두스를 섬기지 않소?”
물, 혹은 바다의 신 리퀴두스. 피스칸을 비롯해 바다에 사는 종족들이 믿는 신이다.
그들이 믿는 신을 놔두고 왜 모르템을 섬긴단 말인가?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속한 것이니, 꼭 인간만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번 다크엘프까지...”
“으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불편한 이야기가 나오자 페이완이 화제를 돌렸다. 베네피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저는 지금까지 그들이 스스로 모르템을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말이지 않소?”
종교를 누구에게 강요한다 한들, 대상이 믿지 않으면 끝이었다.
페이완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베네피스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모르템은 색다른 포교 방법을 이용하던 모양입니다.”
베네피스가 말을 마치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검게 변색한 손목이 보였다. 그 피부는 마치 죽어가는 시체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
“이전 동굴에서 당한 것입니다. 억누르고는 있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중입니다.”
“그게 무슨...!”
페이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베네피스의 손목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제자에게서 느꼈던 그 힘.
“그렇다면...?”
“섣부른 판단은 이릅니다.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걸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그 제자도 자의로 모르템을 섬긴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검은 마나에 먹혀, 변한 것일지도 모르죠.”
베네피스는 검게 변한 손목을 다시 가렸다.
“그렇게 될 마음도, 그렇게 되기도 싫지만. 혹여나 제가 변하게 된다면...”
“우리가 막아달라는 뜻이로군.”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9 (19%)]
[초급 단검술 Lv9 (2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78%)]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89%)]
[초급 수리 Lv9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