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새 술은 새 부대에 -->
베네피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흐트러진 마나를 바로잡기 위해 감각을 서서히 차단했다.
그는 오롯이 자신의 몸 안쪽을 집중했다. 몸 전체로 뻗어 나간 모세혈관처럼, 푸른 선이 전신에 퍼져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베네피스는 그의 몸을 살폈다.
‘큭...’
푸른 혈관 곳곳에 얼룩이 진 것처럼 검게 물든 부분이 보였다. 베네피스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돌아오고 그는 진땀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호흡할 때마다, 그의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불쾌함이 느껴졌다.
마나를 잠식하는 검은 기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명백했다.
‘방심했어...’
오퀸의 동굴에서 발견했던 그 서적은 저주받았다. 모르테미안이 아닌 이가 열면 곧바로 침식당하는 함정이었다.
그나마 베네피스였기에, 마나를 다루는 것이라면 명실공히 1인자를 자처하는 그였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었다.
‘신의 힘이라는 건가?’
베네피스는 오퀸에서 돌아온 이후, 에밀리와 세이렌을 아이오티스로 돌려보내고 나서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지식 내에서도 이 검은 기운을 몰아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베니피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신의 영역이라... 탐구할 가치는 충분하군.’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는 연구, 베네피스는 오히려 약간의 고양감을 느꼈다.
그동안 마나홀드 대학의 학장, 마법연합의 일원으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마법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데 기쁨을 얻는 별종이었다.
그동안 책임감에 그가 개인적으로 연구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니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순수한 마나가 필요하다.’
베네피스는 자신이 당한 것이 저주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저주도 마나를 매개로 하는 것, 더욱 강력한 마나로 억누른다면 확산을 막을 수 있을 터.
그러자면 마나가 풍부한 곳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오퀸이 마나를 활용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페이완 장로에게 빚을 지웠으니... 어렵지는 않겠지.’
그의 제자가 모르테미안이 됐다는 사실은 비밀로 했다. 굳이 다른 제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없다는 페이완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야.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것 같은 분노를 생각해보면...’
베네피스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 에밀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칫 잘못하면, 이 저주에 먹혀 그녀를 해할지 모른다. 그것은 마법사가 아닌 아버지로서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해결하면 될 일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손을 들자 펜과 종이가 허공에 떠올랐다.
스슥- 슥-
베네피스는 종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펜은 살아있는 듯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후...”
그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잠깐 마나를 썼을 뿐인데 그 사이를 비집고 검은 기운이 퍼지려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 지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를 훑고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 * *
“중앙 광장은 이제 거의 끝났는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잘해주고 있네. 유저들 무기 지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현재로서는 재료 수급이 어렵습니다.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광산에서 채굴 중입니다만...”
가디움은 부관의 말에 머리를 짚었다.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알았네. 일이 모두 끝나고 파산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는 책상에 앉아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보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오토마톤을 다시 재활용 중이니...”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지.”
구원 요청을 하며 약속했던 보상만 해도 비용이 상당했다. 거기에 파손된 건물의 수리며, 다른 마을의 대장장이들을 영입하는데 드는 비용까지 합하면 액수가 어마어마하다.
평생 숫자라고는 덧셈과 뺄셈만 해왔던 가디움에게 그런 회계 작업은 너무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책임자로서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야 했다.
부관은 그의 눈치를 보며 옆에서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랜드 마스터께서 살아계셨다면...”
가디움이 중얼거리자 부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안하군. 우울한 얘기였네. 그럼 계속 부탁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그는 문 뒤에 있던 사람들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요?”
“아, 가디움 님을 뵈러 왔습니다.”
프레이가 대표로 대답했다. 부관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훑었다.
“가디움 님께서는 업무로 바쁘시오. 나중에 찾아오시오.”
“그래도...”
“무슨 일인가?”
가디움은 부관이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부관의 옆에 있는 프레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오라 하게.”
“네? 하지만...”
가디움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부관은 굳게 입을 다물고 옆으로 비켜섰다.
프레이 일행은 그를 피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가디움은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말했다.
“뭐...”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세이렌은 그의 행태에 화가 났지만 프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프레이, 맞소?”
가디움은 연신 눈과 손을 서류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예.”
“그래, 기억이 납니다.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행동하더니, 여기는 무슨 일이오?”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예. 바쁘시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볼크를 찾고 있습니다.”
빠각-
프레이가 말을 마치자 가디움의 두툼한 손에 쥐어진 펜대가 부러졌다. 바이런은 흠칫 놀랐다가 자신만 그랬다는 걸 알고 헛기침을 했다.
“그 유저는 왜 찾소?”
가디움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묻는다. 프레이는 잠시 주저했지만 입을 열었다.
“그에게 받아야 할 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야 할 물건이라?”
그가 머리를 들었다.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설마 그쪽도 그랜드 마스터의 징표를 노리는 거요?”
“아닙니다. 저희 물건을 볼크가 가지고 있어서...”
“허, 그 양반 참 문제로군.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가 보오.”
가디움이 프레이의 말을 끊고 비아냥거렸다. 프레이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바이런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흠흠, 그의 행방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를 만나기는 어려울 거요.”
“어디에 있기에...?”
바이런의 물음에 가디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프레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
창 너머로 평가소가 보인다. 프레이는 볼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메탈코어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그를 끌어낼 셈이오. 그때까지는 아마 그를 보기 어려울 거요.”
“끌어내요?”
“그렇소. 그랜드 마스터는 공정하게 선출되어야 하오. 그에게서 징표를 되찾고 다시 그랜드 마스터를 선출할 거요.”
프레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드워프가 아닌 프레이가 반박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기에 불쾌함을 표시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바이런이 가디움과 프레이의 눈치를 살피고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원하는 정보를 얻었으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프레이는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몸을 돌렸다. 일행이 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타이룸 님은...”
가디움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프레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랜드 마스터께서는 편안히 영면에 드셨소?”
볼크에게서 최후를 듣지 못했던 걸까? 프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최후까지 찬란한 불꽃이셨습니다.”
가디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문을 닫고 프레이 일행은 건물을 나왔다.
“어떡하지? 헤븐스미스는 아무나 못 들어간다며?”
“그래도 프레이가 오면 열어주지 않을까요?”
의회 건물로 오며 프레이는 일행들에게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세이렌의 물음에 바이런이 대답했다.
“아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인벤토리에서 붉은 심장을 꺼냈다.
영롱한 빛을 잃고 균열이 심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와! 이걸 다시 찾았어? 경매장이 알면 피눈물을 흘리겠는데?”
바이런이 놀라 말했다. 그러나 곧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게 먹힐까?”
“해 봐야죠.”
“하긴... 그럼 어서 가보자. 그 유저가 로그아웃하면 곤란하니까.”
바이런의 재촉에 일행은 평가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여기야?”
“오...”
세이렌이 거대한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바이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문을 훑었다.
“이걸 다 켈라디움으로 만들었다고? 세상에... 이걸 돈으로 바꾸면 도대체 얼마냐?”
상인의 본능인지 바이런은 곧장 돈으로 가치를 환산했다.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몰랐으니까.
“아무튼... 열어볼 게요.”
프레이는 인벤토리를 뒤져 깨진 붉은 심장을 꺼냈다.
다른 일행들이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음...”
세이렌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낮게 소리를 냈다. 바이런도 팔짱을 끼고 문을 바라보았다.
“안 되는 걸까요...?”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프레이는 재차 문을 향해 붉은 심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파손이 심해서...”
쿠웅-
바이런이 입을 열자마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네?”
“아, 아냐.”
바이런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문이 열리고 헤븐스미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
세이렌은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서슴없이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일행들이 뒤를 따랐다.
깡- 깡-
망치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볼크!”
묵묵히 망치질을 하던 볼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프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프레이! 살아났군요!”
볼크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분들은...”
“아, 제 일행이에요.”
프레이는 그에게 일행을 소개했다. 각자 인사를 나누고 볼크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볼크라고 합니다. 비공식 그랜드 마스터죠.”
“아하하...”
바이런을 비롯해 일행은 어색하게 웃었다. 프레이는 분위기가 더 어정쩡해지기 전에 용건을 말했다.
“오브, 가지고 계시죠?”
“네? 아아, 맞다. 잠시만요.”
볼크가 인벤토리를 뒤졌다.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다행히 볼크는 탐욕스러운 다른 유저들과 달랐다. 프레이는 안심하며 그가 오브를 건네기를 기다렸다.
“이거 맞죠?”
그가 켈라인의 오브를 꺼냈다. 에밀리는 이리저리 오브를 살피고는 안도했다.
“정말 새것처럼 깨끗해졌네요!”
그녀의 칭찬에 볼크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 헤븐스미스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이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볼크는 슬쩍 손을 안쪽으로 당겼다.
그를 비롯해 다른 일행들이 의아한 눈으로 볼크를 바라보았다.
“그냥 드릴 수는 없죠.”
볼크는 웃으며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9 (19%)]
[초급 단검술 Lv9 (2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78%)]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89%)]
[초급 수리 Lv9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