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켈라인의 오브 -->
프레이는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에밀리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프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팔은 여전히 프레이의 허리를 휘감은 채였다.
“다, 당신 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이렌이 다가와 물었다. 에밀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프레이 님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그만...”
에밀리는 얼굴을 붉혔다. 세이렌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아직 허리에 휘감은 팔을 풀지 않았으니까.
“자, 잠깐. 에밀리, 네가 왜 여기에?”
프레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알튼에게 그녀를 만나면 안부를 전하겠다고 말하긴 했다. 그녀가 마법연합에 온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홀드 대학에 그녀가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아...! 베긴네르는,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에밀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프레이를 봐서 기뻤지만,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륙 하나를 사이에 두는 거리였고, 베긴네르에는 조합도 없었기에 소식을 듣지 못했다.
“마을은 무사해. 알튼 님도 너를 많이 걱정하셨어.”
프레이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세이렌과 바이런은 끼어들 타이밍을 놓치고 둘의 재회를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허...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카사노바네.”
“카사노바가 누구예요?”
세이렌이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바이런은 찔끔하며 눈을 돌렸다.
“아니, 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바이런도 아는 여자예요? 프레이랑은 무슨 관계에요?”
물론 바이런도 알고 있었다. 당시에 알튼이 에밀리를 몰래 탈출시켰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으니까.
에밀리와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지만, 당시 NPC들과 두루 친했으니 얼굴은 알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바이런은 베긴네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프레이가 목숨을 바쳐 그녀를 늑대로부터 구했다는 설명에 세이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프레이가 목숨을 건 횟수는 내 쪽이 더 많다고...!’
왠지 모를 승부욕이 솟아났다.
“다행이네요. 다들 무사하신 거죠? 저, 안 그래도 계속 마음에 걸려서...”
에밀리는 고개를 숙이며 프레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프레이의 손가락을 훑다가 굳어졌다.
“괜찮아. 이제 지나간 일이니까.”
“프레이 님?”
“응?”
갑자기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하지만 프레이는 에밀리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반지...”
“반지?”
“제가 선물해드린 반지는...”
여자로서의 감일까?
에밀리는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세이렌의 손을 훑었다.
그리고 발견한 반지.
그녀는 굳은 얼굴로 세이렌에게 다가왔다.
“뭐, 뭐야?”
“그 반지... 왜 당신이 가지고 있죠!?”
단숨에 세이렌의 손을 낚아챈다. 그 무례한 행동에 세이렌은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잠깐, 이게 무슨 경우야?”
에밀리의 손을 뿌리치며 세이렌이 소리친다.
바이런은 여자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뒤로 물러났다.
“그 반지는 제가 프레이 님께 선물한 거라고요! 왜 당신이...!”
“아... 그런데 내가 이걸 빼앗은 건 아닌데?”
“뭐라고요...?”
세이렌은 의기양양하게 에밀리의 시선을 마주했다. 둘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돌아갔다.
“너 큰일 났다.”
“형...?”
바이런은 속삭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프레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에밀리와 세이렌이 동시에 다가왔다.
“프레이, 이거 나한테 준 거 맞지?”
“프레이 님! 정말이에요?”
다그치듯 묻는 두 여자. 프레이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일단 둘 다 진정하고...”
손을 들어 그녀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확실하게 대답해주세요!”
“그래! 그냥 대답해버려. 그래야 이 여자가 오해를 안 하지!”
세이렌은 오랜만에 황태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을 내리 깔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예전 폭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오해라고요!?”
“그럼, 뭐 반지 하나 줬다고 되도 않는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두 여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만약 시선이 눈에 보인다면 치열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프레이는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바이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바이런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아서 하란 뜻이다.
‘보고 있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구경하면 싸움 구경. 싸움 중에서도 치정에 얽힌 건 제 3자로서 즐길 거리로 충분했으니까.
바이런도 눈치가 있기에 세이렌이 프레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밀리야 베긴네르에서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프레이, 너도 참 고달픈 운명이구나.’
팝콘만 있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싸움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에밀리.”
남자의 목소리였다. 세이렌과 옥신각신하던 에밀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세이렌은 더 쏘아붙이려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돌렸다.
“아, 아버님.”
프레이는 몸을 돌렸다. 짙은 턱수염과 부리부리한 인상, 그리고 약간의 주름이 진 중년의 남성.
‘이 사람이... 에밀리의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짓궂은 장난까지 칠 정도로 친한 친구 같던 아버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가족을 지켰던 아버지.
그러나 눈앞의 남자에게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그가 에밀리의 아버지일까?
“밖에서는 학장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 죄송해요.”
“됐다.”
에밀리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물러났다.
아버지의 길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한 움직임.
‘학장...? 그렇다면 이 대학의...’
“자네들인가. 대주교의 편지를 가져온 게?”
그의 시선은 프레이 일행에게 돌아갔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편지에 적힌 바와 같이...”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그렇군.”
그가 손을 움직였다.
“웃?!”
조금 떨어져 있던 바이런이 순식간에 끌려왔다.
“무슨...”
“저, 저도!”
에밀리는 급하게 프레이의 옆에 붙었다.
세이렌이 다시 뭐라고 하려는 찰나,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뭐... 뭐지?”
바이런이 놀라서 말했다.
‘순간이동인가?’
순간이동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근거리 순간이동이라고 해도 이리 간단히, 그것도 5명의 인원을 순식간에 이동시켰다.
그의 수준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타닥타닥-
고즈넉한 서재, 한쪽 벽면에는 벽난로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에밀리.”
“저,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버지의 부름에 에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알겠다. 그럼 차라도 내오너라.”
“예...”
에밀리는 군말 없이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프레이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앉지.”
프레이 일행은 엉거주춤 서 있다가 하나씩 앉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마나홀드 대학 학장을 맡은 베네피스라고 하네.”
프레이 일행은 놀라지 않았다. 베네피스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이하군. 다들 내 이름을 들으면 놀라던데...”
“놀라야 하나요?”
프레이가 대답했다.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놀란 부분이 달랐을 뿐.
‘에밀리는... 그럼 학장의 딸인 건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나홀드 대학의 학장을 맡을 만한 인물이다.
적어도 귀족급은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에밀리도 준 귀족은 되지 않겠는가.
그런 에밀리와 친하게 지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건 아닐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베네피스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확실히 이건 헤리엇 대주교의 인장이야. 만약 이게 위조라면, 나는 이걸 만든 사람을 적극적으로 영입할 거야.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니까.”
“내용을 읽으셨다면, 저희의 목적도 아시겠군요.”
세이렌이 소리를 냈다. 베네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켈라인의 오브. 확실히 우리가 보관하고 있지. 그건 몇 안 되는 켈라인의 유물이니까.”
“맞아요. 그리고 제가 진짜 데일 도프람이라는 걸 증명하려면 꼭 필요합니다.”
세이렌의 말에 베네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프레이는 세이렌에게 다가가는 베네피스를 경계했다. 그러나 세이렌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아.”
베네피스는 처음부터 프레이를 신경도 쓰지 않은 듯, 세이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확실히...”
그녀의 몸을 위아래를 훑는 행동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성추행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네피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기에, 아무도 트집잡지 않았다.
“신기하군. 이렇게 육체를 영구적으로 변화하는 방법이라니. 마나의 흐름이 엉키지도 않았어.”
“그걸 어떻게 알죠?”
“마나를 다루다 보면 아는 일일세. 자네의 그 팔이 가짜라는 것도 알고 있지.”
베네피스는 프레이의 팔이 오토마톤이라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뭐라고요?”
차를 내온 에밀리가 놀라며 물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에밀리.”
베네피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에밀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이 황태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네.”
에밀리는 눈빛으로 세이렌에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저 여자가 황태자라고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켈라인의 오브를 빌려달라는 겁니다. 그 오브를 들고 신성제국으로 돌아가 제 2황태자인 마틴의 피와 비교하여 제 진실을 입증할 겁니다.”
세이렌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베네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향을 음미하고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사실, 자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탁-
찻잔을 다시 내려놓은 베네피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500골드.”
“네?”
“켈라인의 오브를 대여하는 데 드는 비용이네.”
프레이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바이런은 계산할 일이 생기자 자연스레 머리를 굴렸다.
“자, 잠깐...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은데...”
“이해를 못 하는 건 자네들이야.”
베네피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세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는 엘레타스. 자네가 귀족이든, 황족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곳에서는 직위는 물론, 종족과 성별을 막론하고 오로지 실리만을 추구하는 곳이지.”
“그... 그래도 500골드는...!”
바이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500골드를 어디서 마련한단 말인가?
그들의 재산은 순간이동으로 탕진하다시피 했다.
베네피스의 시선은 바이런에게 돌아갔다.
“자네는 상인이 아닌가?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른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버님...!”
조금 심한 말이 아닌가. 에밀리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에밀리, 네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제국의 후예에서 지냈던 일들은 모두 잊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일은 너의 앞길을 방해할 뿐이다.”
베네피스의 말에 에밀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히려 안면이 있기에 더 냉정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에밀리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마법사라면 지식과 능력을 보겠지만, 외부인들의 가치는 그들이 가져오는 골드뿐. 자네들이 켈라인의 오브에 걸맞은 비용을 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베네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 그들을 배웅해주어라.”
베네피스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잠깐...!”
세이렌의 말은 허공에 흩어졌다.
다시 시야가 뒤집어지며 그들은 상아탑의 입구에 와 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공사가 철저하신 분이라...”
에밀리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프레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고생하며 이곳에 왔건만, 결국 또 다른 장벽에 가로막혔다.
에밀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앞머리에 꽂아두었던 머리핀을 풀었다. 그리고 프레이의 손에 머리핀을 쥐어주었다.
“에밀리?”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이걸 꼭 가지고 계세요.”
“이건 왜...”
에밀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것이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끈이 되기를. 언제 어디서나 내가 그대를 느낄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머리핀이 은은하게 빛을 내뿜었다.
어리둥절한 프레이에게 에밀리가 미소를 지었다.
“언령(言霊)마법 중의 하나에요. 일종의 추적마법이죠.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제가 프레이 님을 찾을 수 있어요.”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76%)]
[초급 단검술 Lv9 (2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78%)]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89%)]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