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입장정리 -->
크젤의 말에 행동파 대장, 이튼은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이렇게 제멋대로 계획을 바꾼단 말인가.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지금 당신 처지를 몰라서 그러는 거요?”
“더도 말고 딱 하루. 하루면 됩니다.”
크젤은 제 발로 굴어온 복수의 기회를 걷어찰 수 없었다.
이전 배 위에서 당한 건 기습 때문이지, 제대로 붙는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유령선장을 해치울 정도의 실력이지만... 마법에는 취약할 터...’
알리칸의 독에 당하지 않은 걸 보면 독 저항력이 상당하리라. 그러나 프레이는 공격대 구성도 할 줄 몰랐던 놈이 아니던가. 다른 속성 저항력이 높지는 않으리라.
‘놈을 죽이면 어차피 사망 패널티 때문에 날 쫓지도 못한다.’
적어도 하루나 이틀은 접속하지 못할 테니, 그 사이에 자신은 유유히 엘레타스 대륙으로 떠나면 된다. 나중에라도 복수하려 한다면?
그때는 이미 자신이 더 고위 마법을 익혔을 테니 다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크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개 같은 놈, 게임에서는 실력이 전부라는 걸 알려주지! NPC나 빠는 변태 주제에...!’
생각만 해도 열이 뻗쳤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머저리한테 당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이튼은 정색했다. 그는 머리를 굴렸다.
‘제압해서 강제로 보낼까...?’
지금 눈앞의 골칫덩어리를 쓰러뜨리고 상자에 밀봉해서 배에 실어 올리면 계획대로 진행된다.
크젤은 엘레타스로 가고, 자신은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크젤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
그가 입을 떠벌려,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면 곤란했으니까.
‘언젠가는 나도 황실에 들어갈 몸이거늘...’
마틴 도프람을 옹립하면 정통파의 인물들이 실세가 될 터, 자신도 권력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유저가 부활한다는 건 때에 따라 도움이 되기도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확실한 걸림돌이었다.
“하루... 딱 하루입니다.”
결국 이튼은 하루를 소모하기로 했다. 이 인간도 엘레타스로 가면 더 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크젤이 눈을 굴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 * *
“기름이랑... 식량은 샀고... 약재도 샀고...”
바이런이 꼼꼼히 물건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가 프레이를 보며 말했다.
“프레이, 따로 살 거 있어?”
“네? 아뇨. 저는 없어요. 세이렌은요?”
프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세이렌은 물건을 구경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없어. 이제 좀 쉬러 가자.”
“오케이. 그럼 갑시다.”
바이런이 돌아서자 세이렌은 해방이라는 듯 먼저 문을 나섰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잡화점 주인의 인사를 뒤로하고 프레이는 밖으로 나왔다.
“여관으로 갈 거지?”
숲을 벗어난 후에 온종일 걸어서 웨이버에 도착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늘은 조금 좋은 방을 잡을까요?”
“그래... 고생했으니까 그래도 돼.”
예전이라면 음흉한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봤겠지만, 바이런은 이제 그들의 사이를 오해하지 않았다.
“엘레타스 대륙 물가도 잘 모르는데... 나는 그냥 싼 방 잡을래.”
노숙을 해도 되겠지만, 다시 로그인했을 때 그 피곤함은 느끼기 싫었다. 아무리 싼 방이라도 여관에서 자면 피로가 회복된다.
바이런은 가성비를 따지는 남자였다.
“프레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프레이 일행에게 접근하는 남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프레이가 몸을 돌렸다.
“누구시죠?”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는 웃으며 서신을 내밀었다.
“아, 맞네요. 여기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네. 수령하고 확인 부탁할게요.”
프레이는 그가 내민 서신을 받았다.
“뭐야, 완전 솔플 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아는 사람이 있었네.”
“네? 아니... 뭔가 오해가...”
프레이가 멋쩍게 웃으며 서신을 읽었다. 그는 곧 얼굴을 굳혔다.
“아... 저한테 온 게 맞네요.”
“그럼, 감사합니다.”
남자는 확인증을 받고 돌아섰다. 세이렌이 프레이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래? 나쁜 소식이야?”
혹시라도 프레이가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세이렌은 프레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뇨. 아니에요. 일단 가요.”
* * *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이는 슬쩍 눈을 떠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세이렌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자고 있었다. 프레이는 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으음...”
뒤척이며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도대체 어떻게...?’
프레이는 다시 서신을 꺼내 확인했다.
[From : 크젤]
[To : 프레이]
[프레이는 멍청해 보이는 남자와 창녀처럼 보이는 여자와 같이 있습니다. 보면 알 거예요.]
[전달내용 : 우리가 친하게 안부 물을 사이는 아니지? 다른 놈들 필요 없고, 해가 뜨기 전까지 해변으로 와라. 만약 오지 않으면 네 친구들에게 빚을 갚겠다.]
크젤이 보낸 서신.
‘내 위치를 알고 있고... 어디 해변으로 오라는 말도 없다. 놈도 웨이버에 있다는 거겠지...’
프레이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잡지 못 한 거로군...’
다시 부활 후에는 곧바로 잡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떻게든 빠져나온 모양.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수배가 된 몸인데 어떻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겠는가.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번처럼 배를 파괴라도 한다면...’
어쩌면 세이렌을 습격했을 때처럼 폭약이라도 준비한 건 아닐까.
의심하자니 끝이 없다.
‘어차피 우리는 내일 떠날 거야...’
그렇다면 놈의 목숨을 끊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한 번 죽였으니, 적어도 이틀은 지나서야 부활을 할 테니까.
프레이는 마음을 정했다. 그는 세이렌이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밖으로 나갔다.
* * *
밤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해가 지고 난 후의 바닷바람을 맞아보면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해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리나와 달리 언데드가 출몰하는 지역도 아니었기에 경비병도 없다.
‘확실히... 눈을 피하기에는 나쁘지 않겠어.’
탁 트여 있으니 기습의 염려도 없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일까.
바다가 달빛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바위가 잔잔한 파도를 막아냈다.
모래사장을 따라 걷던 프레이는 멀리 서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아무리 약속 시간을 정확히 쓰지 않았더라도... 너무 늦은 거 아니야?”
크젤의 목소리.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무슨 꿍꿍이지?”
“뭘 모르는 척을 하고 있어? 당연히 복수지?”
프레이는 이미 검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기에, 크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싸울 생각으로 온 거 아닌가? 들고 있는 검으로 저 가증스러운 놈의 목을 쳐낼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죽는 게 취미인가?”
“허... 꽤나 건방진데? 그깟 기습 한 번으로 날 이겼다고...”
크젤이 떠벌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걸음을 재촉하다 빠르게 내달렸다.
아직 크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특성이 발현되기 전에... 한 방으로 끝낸다!’
이퀄라이저 특성의 발현 조건은 양쪽 모두 적대적이어야 할 때다. 크젤의 스테이터스를 얻어봤자 근접전 스킬만 쌓은 프레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크젤에게 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끝내는 편이 좋았다.
“이 자식이 말하는데...!”
크젤이 당황한 듯 빠르게 손을 놀렸다. 프레이도 크젤이 마법을 쓰는 걸 보았기에 캐스팅을 막으려 했다.
쏴아악-
그가 휘두른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퀄라이저’ 특성이 반영됩니다.]
[‘크젤’의 스테이터스로 보정합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는 검인데도 무겁게 느껴진다. 어지간히 힘이 약한 모양이었다.
‘됐다!’
그래도 휘둘러진 검은 속도를 잃지 않았다. 가슴을 정확히 베었다.
“비겁하게 기습을...!”
크젤이 소리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
물렁한 살을 헤집고, 그 안의 딱딱한 뼈와 부딪치는 감각. 하다못해 크젤이 착용한 로브라도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젤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표정 가관이네.”
화르륵-
프레이가 베어낸 상처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프레이는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마법사, 제대로 상대해 본 적 없지?”
스웅-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정확히 목을 노렸다.
이전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크젤은 피하지 않았다.
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불꽃이 일렁였다.
“너...!”
“병신, PVP할 때 마법사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겠냐?”
가짜다.
눈앞에 보이는 크젤은 가짜가 분명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상, 그러니 상처가 날 리 없었다.
화르륵-
그의 생각이 맞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크젤의 모습이 불꽃으로 변하며 사라졌다.
‘그렇다면 진짜는...?’
프레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환상으로 시선을 끌었다면 시야 밖에서 공격을 할 게 분명했으니.
주륵-
해변에 있던 바위 중 하나가 일어났다. 크젤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환상을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역시... PVP 경험이 없군!’
공격대 구성도 못 하는 놈이 PVP를 해봤을까. 크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마법사가 환상으로 상대의 주의를 끄는 건 매우 기초적인 전술이다. 능숙한 유저라면 주변 일대를 살폈을 것이다.
하지만 크젤은 혹시나 프레이가 PVP 경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탁 트인 해변을 장소로 골라 그런 의심조차 들지 않도록 했다.
‘통구이로 만들어주마...!’
크젤은 곧바로 수인을 맺으며 준비한 마법을 시전했다.
뒤늦게 눈치챈 프레이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늦었어!”
정말로 느렸다. 프레이는 이전과 달리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크젤의 손위로 떠오른 불화살이 프레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쾅-!
날아오른 불화살이 적중하자 폭발이 일어났다. 크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놈이 오기전에 죽인다!’
마법사의 장점은 폭발적인 공격력이다.
근접전에 취약한 만큼 상대가 오기전에 끝을 봐야 한다.
근거리 순간이동과 같이, 회피용으로 사용되는 마법도 있지만, 크젤은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엘레타스로 가려는 것이었고.
2차로 준비해두었던 마법을 사용했다. 크젤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수인을 맺었다.
“크윽...!”
프레이가 신음을 뱉었다. 크젤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이것도 받아라!”
프레이의 발밑에 생겨난 마법진에 붉은빛이 차올랐다. 프레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를 박살 냈던 그 마법.
콰아아-!
불길이 치솟으며 프레이를 휘감았다.
“아직 남았다!”
크젤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프레이를 끝장내기 위해 부단히 준비했으니까.
양손에 생겨난 화염구를 미친 듯이 던졌다.
쾅- 콰쾅-
폭발에 모래가 흩어졌다. 이 정도로 마법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사망, 적어도 큰 타격을 입었으리라.
‘어디 볼까...’
나머지 마법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껴두어야 했다.
“어때, 말 그대로 뜨거운 맛을 보니?”
크젤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프레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폭발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프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뭣...?”
크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했나?”
프스스-프레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모래를 털어냈다. 열기 때문에 솟아오른 머리 때문에 꼴이 우습긴 했지만, 멀쩡했다.
“이게 무슨...!? 어떻게...!?”
크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퍼부은 마법의 위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프레이는 인벤토리에서 이그니스의 붉은 심장을 꺼냈다.
이전처럼 붉은빛을 머금은 마정석.
“고맙다고 해야 하나?”
프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크젤의 화염마법 덕분일까.
붉은 심장의 열기는 충분히 보충되었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9%)]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24%)]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89%)]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