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도망자들 -->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자칫 잘못 대답하면 지금까지 이루었던 게 모두 물거품이 되리라.
“그건...”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사람들은 대답을 재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사육이라니?! 우리가 무슨 가축입니까?”
“누가 우리를 먹기라도...”
마을 사람들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잠깐... 설마 그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 그리고 그것은 곧 진실이었다.
할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인가...’
여기까지일까.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군가 소리쳤다.
“다들 제정신이야? 할산 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써주셨는데?”
“그, 그렇긴 하지...! 맞아!”
“지금 우리와 함께한 할산 님보다 그 외부인들이 남겨놓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에 휘둘리겠다는 건가?!”
보로프의 눈이 흔들렸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면 이건 왜 남겼단 말인가? 글자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고?”
“그거야 그 괴팍한 외부인 놈들의 장난이지! 유저도 섞여 있었잖아!? 유저들이 개 같은 짓거리 하는 게 한두 번이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희망이 보였다. 할산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아있다.
“할산 님?”
그녀의 사과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를 기다린다.
“제가 그만큼 여러분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다는... 그런 의미겠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할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걸까요.”
할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고작 종잇조각인데 어떤 해명이 필요할까.
마을 사람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옥신각신했다.
“할산 님이 한 일을 떠올려봐!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났는데!”
“마을 바깥에 설치한 마법진이 다 누구 덕인데!? 할산 님이 없었으면 우린 진즉에 다 죽었어!”
옹호파는 그녀가 이루었던 업적을 칭송했다.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글자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래! 솔직히 좀 이상했잖아! 밤중에 나가시는 것도 그렇고!”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은 그간 품었던 의혹을 꺼냈다.
할산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여러분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를 찾으러 나간 것이었는데...”
그녀가 말을 흐리며 눈물을 떨어뜨린다.
억울함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에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을 낸다.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 어디 은혜도 모르고!”
“그... 그건...”
“할산 님이 없으면? 이 마을은 누가 지킬 거야? 여기서 마법진 다룰 줄 아는 사람 있어? 약은 만들 줄 알아!?”
대화의 주제는 진실이 아닌 할산의 필요성으로 옮겨졌다.
옹호파조차도 내심 그녀에게 비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하기로 했다.
진실은 가혹하다. 그걸 인정하면 자신들은 한 사람에게 속은 멍청이가 되니까.
진실은 두려웠다. 그걸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희망이 없으니까.
진실은 무가치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실리적인 도움이며, 그녀는 마을에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눈을 돌렸다. 불편한 진실보다 안정적인 거짓을 택했다.
“이깟 종이가 뭐라고!”
보로프가 정리해 놓은 글자를 짓밟고 흩트려버린다.
“그렇게 헛소리 할 거면 여기서 나가! 나가라고! 아무도 안 말려!”
진실을 주장하는 입을 막는다.
“할산 님, 괜찮으세요?”
거짓말쟁이를 옹호하고 이득을 취하려 한다.
공존인가, 공멸인가?
사람들은 공존을 선택했다.
비록 그것이 언젠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더라도, 지금 당장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할산은 웃었다.
그녀를 의심하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보로프는 씁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럽혀진 종이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곧 그의 눈은 할산에게 향했다.
마을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망치는 걸 선택했으니까. 그들은 도망자니까.
* * *
프레이 일행은 길을 따라 걸었다.
“후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이렌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야 숲을 벗어났군.”
바이런이 한마디를 보탰다.
다행히 엘드리안에게 쫓기지 않았다. 미끼로 쓴 말들이 제 역할을 해준 모양이다.
“형, 이대로 얼마나 더 가야 하죠?”
프레이가 물었다. 바이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바다가 보여야겠지?”
“바다...”
세이렌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는 그런 그녀를 독려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일단 숲에서 더 떨어지고 쉬어요.”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프레이는 멈춰 섰다.
“여기서 좀 쉴까요.”
“드디어...!”
세이렌은 엉덩이를 주저 없이 바닥에 붙였다. 황태자였다고는 보기 힘든 몸짓이었다.
바이런은 익숙하게 모닥불을 준비했다.
“자자... 먹어야 사는 법이지.”
화르륵-
불길이 일어나자 프레이가 주섬주섬 인벤토리를 뒤졌다.
“아... 일단 이것 좀 넣어 놓을게요.”
“응?”
툭하고 마정석이 모닥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야, 마정석 구워 먹냐?”
“그럴 리가요. 이거 열기 보충해줘야 다시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바이런이 슬쩍 눈을 돌렸다.
잠시 마정석을 바라본 바이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야, 이거 그거지? 화산 동굴에서 가져온 거?”
“네? 아... 맞아요.”
바이런이 이그니스의 붉은 심장을 자세히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는 나타난 메시지를 읽으며 경악했다.
“세상에... 이거 도대체 뭔 아이템이냐...!?”
“왜요?”
세이렌이 관심을 보였다. 바이런은 만들던 꼬치를 프레이에게 넘겼다.
“잠깐... 나 검색 좀 하고 올게. 요리는 네가 좀 하고 있어 봐.”
“네?”
바이런의 모습이 사라지자 프레이는 망연히 꼬치를 들고 서 있었다.
“허...”
어쩔 수 없이 프레이는 모닥불 위에 꼬치를 올렸다. 그래도 요리 스킬이 있으니 나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프레이.”
“네?”
세이렌이 말하자 프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타는데...”
프레이는 황급히 꼬치를 돌렸다. 검게 그을린 부분이 눈에 보였다.
“아... 이건 제가 먹을게요.”
멋쩍게 머리를 긁은 프레이는 곧바로 새로 꼬치를 올렸다. 세이렌은 불길 옆에서 프레이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계속 다닐 수 있다면...’
프레이와 함께 있으면 자유로웠다. 이 자유를 계속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이렌의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럴 수는 없다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던가.
영원한 건 없다. 자신은 늙고 추하게 변할 테지만 프레이는 유저니까 쉽게 늙지 않는다.
마틴도 돌려보내야 했다. 마법연합에 갔다가 돌아오면 이 여정도 끝이다.
‘그래, 지금을 즐기자.’
암울한 미래를 굳이 지금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애써 웃었다.
“여기요.”
“아, 고마워.”
그녀와 그의 손이 닿았다.
따뜻하다. 모닥불의 열기인지 아니면 프레이의 체온인지 알 수 없었다.
“세이렌?”
“아...”
그녀가 계속 손을 잡고 있자 프레이가 물었다. 세이렌은 얼굴을 돌렸다.
“세이...”
“대박!”
바이런이 로그인하자마자 소리쳤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프레이와 세이렌 모두 흠칫 몸을 떨었다.
“뭔데요?”
“저거, 저거 아직 공개되지도 않은 아이템이야! 정보가 아예 없어!”
바이런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예?”
“그래도 이그니스에 관한 건 찾았어. 나중에 드워프 왕국도 가봐야겠는데?”
“드워프 왕국이면...”
세이렌이 기억을 더듬었다. 드워프들이 사는 섬, 그들의 영토.
“아이오티스를 말하는 거예요?”
프레이가 먼저 대답했다.
“그래 인마. 이그니스는 불의 신이거든. 드워프들이 모시는 신이기도 하고. 그거 가져가면 아마 껌뻑 죽을 거다. 뭐라도 내주려고 할걸?”
“그 말은...”
“드워프하면 대장장이, 대장장이하면 드워프 아니냐.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최고급 장비를 줄지도 몰라!”
바이런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비록 다른 유저들과 달리 욕심이 많지 않은 그였지만,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회를 앞에 두고 걷어찰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프레이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형, 진정해요. 지금은 웨이버에 가는 데 집중해야죠.”
“응? 아아, 맞아. 그렇지. 일단 그래야지.”
바이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꼬치 하나를 집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훈훈하게 타올랐다.
* * *
늦은 밤.
흔들리는 마차가 천천히 웨이버로 다가왔다.
“멈추시오.”
경비병이 손을 들었다. 마부가 슬쩍 모자를 들어 올렸다.
“고생하십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뭐, 보다시피 상인 나으리를 모시고 오는 길입죠.”
마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경비병은 슬쩍 마차를 훑었다.
확실히 짐마차가 틀림없다.
“상인분은 어디 계십니까?”
“아, 그분은 좀 뒤에서 오실 겁니다. 마차가 하나가 아니라서요. 먼저 저를 보내시고 다른 마차를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물건이 좀 급한 물건이라서요.”
마부의 설명에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 혹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소?”
경비병이 품에서 수배서를 꺼냈다. 마부는 최대한 허리를 숙였다.
“음...”
갸웃거리는 마부의 모습에 경비병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못 본 모양이군. 아무튼 지금 이 수배범 때문에 검문이 필수요. 주인도 이해할 겁니다.”
“아, 물론입죠. 살펴보십시오.”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병이 짐마차로 다가갔다. 천막을 들추자 한가득 쌓인 상자와 포대가 보였다.
경비병이 짐 검사용 철침을 꺼냈다. 아주 가늘지만 날카로운 침이었다.
그는 상자의 틈 사이로 철침을 쑤셔 넣었다. 만약 수배범이 숨어있다면 피가 배어 나오리라.
“음?”
붉은 줄기가 침을 타고 흐른다. 경비병이 동료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다른 경비병이 창을 마부에게 겨눈다.
“왜, 왜 그러십니까요!”
“손을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라!”
동료가 윽박지르자 마부가 겁먹은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마차를 검사하는 경비병은 긴장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음...”
그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고기였다. 철침에 묻은 건 수배범이 아니라 고기의 피였다.
“됐어. 내가 착각했네.”
“음? 아... 이거 미안하게 됐소.”
경비병이 창을 거두자 마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입니다.”
다른 짐을 검사했다. 포대를 찌르니 하얀 가루가 묻어 나왔다.
찍어 먹어보니 달달했다.
“설탕인가.”
다른 특별한 짐은 없다. 경비병은 다시 돌아와 손을 흔들었다. 보내도 좋다는 표시.
“협조해줘서 고맙소.”
“아이고, 별말씀을. 그럼 수고하십시오.”
마부는 다시 마차를 끌었다. 마차가 천천히 마을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다음 마차를 검사했다.
마부는 마을 광장을 지나 잡화점에 멈춰 섰다.
그는 땀을 닦아내며 마차 바닥을 두드렸다.
탁- 탁-
“어휴... 팔 빠지는 줄 알았네.”
투덜거리며 마차 바닥에서 나오는 한 남자. 바로 크젤이었다.
“무척 기발한 방법입니다. 어떻게 마차 밑에 숨을 생각을 했습니까?”
마부는 크젤을 호위하는 정통파 대장이었다. 그는 모자를 집어 던지며 물었다.
“영화에서 봤는데... 보는 거랑 직접 하는 거랑 다르네요.”
“영화...?”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너무 시간이 걸린 거 아닙니까?”
크젤이 투덜거렸다. 마을을 들를 때마다 이 짓거리를 하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도 최단 거리로 온 겁니다. 이제 기다렸다가 준비한 배로 밀항하기만 하면 돼요.”
수배당한 크젤이 멀쩡한 배를 탈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 짐마차를 준비한 것이다.
이미 입구에서 통과한 화물을 검사하지는 않을 테니까.
크젤은 상자에 실려 배를 타고 엘레타스까지 간다. 거기에 도착하면 이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크... 그럼 좀 깨끗한 상자라도 주지...”
“차라리 냄새나는 게 낫습니다. 선원들도 쉽게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요.”
“알았습니다. 배는 언제...”
저벅- 저벅-
발소리에 크젤은 입을 다물었다. 정통파 대장 역시 얼굴을 굳혔다.
“여관 먼저 가면 안 돼요?”
“내일 들르면 배 시간에 못 맞출 거라니까요. 지금 여행 물품을 보충하는 게 더 많이 잘 수 있다니까 그러시네...”
“세이렌, 그러니까 여관에 가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두런두런 들리던 목소리가 안으로 사라졌다. 정통파 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런 늦은 시간에도 손님이 있다니... 아무튼 이제 상자로... 크젤?”
대장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크젤을 바라보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모습이 정상이 아니니까.
“크젤? 무슨 일입니까?”“하루... 하루만 늦춰주십시오.”
“뭐라고요?”
그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크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프레이...!”
크젤은 웃었다.
달콤한 복수의 기회가 그를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9%)]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24%)]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89%)]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