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도망자들 -->
프레이의 말에 할산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프레이의 표정을 훑었다. 그렇게 보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있다는 듯.
“그걸...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할산의 대답에 프레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말이었으니까.
남을 속이는 사람은 남을 잘 믿지 않는다. 자신처럼 남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명쾌한 답이기도 했다.
할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부활이라... 참 까다롭네요.”
프레이를 어떻게 처리한다고 한들, 다시 살아날 터. 그가 그녀의 비밀을 누설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부활하자마자 계속 죽인다면? 그런 행동을 일삼는 할산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치료제로 세이렌을 치료하고, 이곳을 떠나기를 원합니다.”
“그쪽도 꽤나 태연하네요. 보통 이런 일을 알게 되면 나를 경멸하거나 혐오하던데...”
할산은 조금 말을 돌리며 고민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프레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바랍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시간 낭비는 싫습니다. 되도록 해가 뜨기 전에 숲을 벗어나고 싶거든요.”
할산을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고, 이 남자는 대답을 재촉한다.
“공멸이냐 공존이냐...”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치료제는 사라진다.
할산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엘드리안이 알게 되면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할 것이다. 도망가기 전에 최대한 확보를 하려 할 테니.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아니, 유저는 살겠지.’
반면 그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프레이 일행은 세이렌을 데리고 떠난다. 세이렌은 할산의 집에만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감염 사실을 모른다.
치료된 세이렌이 떠벌릴 가능성은?
먼저 조건을 제시한 건 프레이 쪽이니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이곳도 그대로 유지되고 연구 역시 계속할 수 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요.”
“지금 치료할 수 있나요?”
“가죠.”
* * *
“하아...”
얕은 숨소리와 함께 세이렌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천천히 균열이 회복되며 피부가 매끈해졌다.
“음...”
“이걸로 거래는 끝났어요.”
할산은 눈짓으로 세이렌을 가리키며 말했다. 프레이는 팔짱을 낀 채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형, 세이렌이 눈을 뜨는 대로 떠나도록 해요.”
“이미 준비 다 해 놨다.”
바이런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말았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됐습니다. 그 영약이나 주세요.”
할산의 말을 끊은 프레이가 손을 내밀었다.
“영약...?”
그녀는 잠시 의아한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엘드리안을 유인하는 영약이요.”
“그건 왜요?”
할산이 눈을 흘겼다. 엘드리안과 싸우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직 당신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엘드리안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때 쓸 겁니다.”
“잠깐... 그러면...”
할산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엘드리안이 그녀의 표식을 따라갔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엘드리안은 이변을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면 엘드리안이 그녀를 신뢰하겠는가?
엘드리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할산의 정체를 누군가 알고 있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을 터.
“해명은 그쪽의 몫이죠.”
“하지만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요...!”
할산이 따져 물었다.
바이런은 코웃음이 나왔다.
“허, 사기꾼이 약속이 다르다고 성을 내내.”
“뭐라고요?”
그녀가 몸을 돌려 바이런을 째려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했다. 굳이 그녀와 말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열 받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그게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지금까지 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줬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할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프레이의 말이 맞았다.
늦은 밤에도 경계를 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프레이 일행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후... 알았어요. 죽지는 않겠죠.”
사정을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해주리라.
“으음...”
세이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프레이는 고개를 돌려 세이렌의 안색을 살폈다.
“세이렌, 정신이 들어요?”
“프레이...?”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프레이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서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이게 대체...”
“설명은 가면서 할게요. 지금 마을을 떠나야 해요.”
“마을을...?”
그녀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프레이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아, 알았어...”
프레이 일행과 할산은 밖으로 나왔다. 프레이는 그녀를 부축해 말에 태웠다.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프레이가 타고 온 말이 죽었기에, 남은 말은 2마리뿐이었다.
프레이와 세이렌이 같이 타기로 했다.
“괜찮아요?”
“어... 괜찮아.”
세이렌은 프레이의 허리를 붙잡고 등에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등에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프레이는 고삐를 쥐었다.
할산은 프레이에게 영약을 넘겼다.
“조심해요.”
집 안에 있을 때와는 다른 표정. 그녀의 연기력에 프레이는 혀를 내둘렀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조금 비꼬는 말투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었다.
프레이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끼이익-
마을 입구가 열렸다.
“행운을 빕니다.”
입구를 관리하는 남자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뱉은 말과 다른 그의 표정, 프레이는 대답 없이 말을 몰았다.
히힝-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프레이 일행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할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숲의 초입을 지나 얼마간 들어갔다.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숲은 어두웠다. 간신히 한 치 앞만 분간할 수 있는 정도였다.
프레이와 바이런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프레이?”
세이렌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레이와 바이런이 말에서 내렸으니까.
“여기서부터는 걸어갈 거예요.”
프레이는 손을 뻗어 세이렌이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이렌은 일단 말에서 내렸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내리는 거야? 숲을 빠져나가려면 더 빨리 가야지?”
“너무 어두워서 어차피 속도를 못 내요.”
프레이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 할산에게 받은 영약을 꺼냈다.
“그거... 쓰면 안 되는 거 아냐?”
오면서 설명을 들었기에 세이렌도 할산이 엘드리안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쓰면 안 되죠.”
프레이는 영약을 말 등에 뿌렸다.
히히힝-
차가운 액체가 닿자 말이 놀라서 투레질한다. 바이런도 말에 영약을 뿌렸다.
“설마...”
“맞아요. 이 말이 엘드리안을 혼란스럽게 할 겁니다.”
말을 미끼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 비록 남은 길은 걸어가야 하겠지만, 나무 괴물에게 잡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 자식들 쫓아간 게 말인 줄 알면 어떤 기분일까?”
바이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팍-!
강하게 말 궁둥이를 치자 놀라서 뛰기 시작한다. 프레이와 바이런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계속 가죠.”
“프레이... 정말 이렇게 가도 되는 거야!?”
세이렌은 낮게 소리쳤다.
프레이와 바이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무슨 죄야?”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일까. 프레이는 잠시 세이렌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폭군으로 불렸던 사람이 참 많이 변했다. 프레이는 세이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세이렌,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요?”
프레이의 말에 세이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을 무슨 더러운 것 보듯이 봤어요. 전염병이 옮을까 손도 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사실 사람들은 세이렌이 발병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프레이는 마을 사람들이 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봤다.
같은 마을 사람들도 그러한데, 세이렌에 대해서는 더 나쁠지언정 좋게 보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세이렌은 말을 흐렸다. 그녀도 환자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떠올렸으니까.
프레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어요. 바이런 형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스스로를 구해야 할 거예요.”
“음...”
바이런이 낮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회는 줬어요. 선택은 그들 몫이에요.”
* * *
아침이 밝았다.
할산은 밤사이 준비한 치료제를 들고 환자들을 찾았다.
“으으...”
“끄으으...”
고통과 신음이 가득한 곳. 할산은 치료를 시작했다.
껍질처럼 단단해진 피부가 점차 연해지며 원래대로 돌아간다. 마치 지우개로 낙서를 지우듯 균열이 사라진다.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해지고 앓는 소리는 점차 줄어든다.
“하아...”
안정적인 숨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마스크를 벗었다.
‘후... 이들을 엘드리안에게 넘기면 좀 괜찮겠지...’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리려면 제물이 필요한 법. 환자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영약을 여기저기에 묻혀두었다.
‘됐어...’
할산은 문을 나섰다.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할산 님...! 마스크를...!”
“성공한 겁니까!?”
그녀는 기쁨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필요 없었다.
“됐어!”
“역시 할산 님이셔!”
이로써 그녀는 마을에서 더욱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될 것이다.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이 줄어들 터, 더 많은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다.
“우읏...”
비틀거리며 환자들이 밖으로 나온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돌아간다.
“정말이네!”
“살았어! 살았다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할산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밖으로 나온 환자들이 작은 종이를 들고 있다.
“책을 찢은 건가?”
“뭐야, 뭔데?”
할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자네도 있나?”
“어... 있는데...”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환자들이 모두 종이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나온 보로프는 굳은 얼굴로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종이의 크기가 컸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종이에 적혀있는 문장.
“이건 뭐죠?”
사람들은 종잇조각을 모았다.
[할][당][들][사][육][있][다][하][산][은][고][신][을]
모아둔 글자는 도저히 알아보기 힘들었다.
“할당? 신? 하산?”
“사육?”
사람들은 저마다 보이는 단어를 내뱉었다. 사육이라는 말에 할산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설마...?’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환자에게서 나온 종이에 쏠렸기에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근데 이거 다 책에서 찢은 글자 같은데?”
“책?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할산 님밖에 없잖아?”
보로프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글자를 모았다.
[할산] [사육] [있다]
“보로프? 지금 뭐 하는 거야?”
“잠깐... 생각 좀 해봅시다.”
남은 글자를 바라보던 보로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의 표정에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할산] [사육] [있다] [당신들]
“이건...”
보로프가 빠르게 글자를 조합했다. 그리고 완성된 문장.
[할산은 당신들을 사육하고 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어 할산을 바라보았다.
“왜, 왜요?”
그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보로프가 대표로 그녀에게 물었다.
“외부인들은...?”
“그들은 밤에 떠났어.”
“그렇다면 이건 그들이 남긴 건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의문은 의심으로 번졌다.
“할산 님, ‘할산은 당신들을 사육하고 있다’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보로프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물었다.
그의 말에 할산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프레이...!’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프레이는 언젠가 할산이 환자들을 치료할 것이라고 예상한 게 분명했다.
완벽한 문장을 써넣으면 할산이 먼저 눈치챌 수도 있으니 글자를 잘라서 각 환자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 게다가 책을 찢으며 할산을 지목하는 단서까지 만들었다.
“할산 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그녀의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든다.
보로프는 재차 그녀에게 다가섰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9%)]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24%)]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