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퀄라이저-89화 (89/141)

<-- 20. 도망자들 -->

길리언은 얼굴을 돌렸다.

“보라. 저 인간들을.”

프레이는 눈을 돌렸다.

어린 엘드리안이 식사를 마쳤다. 줄기를 타고 흐르는 혈액이 들어가며 엘드리안의 성장이 촉진된다.

줄기와 뿌리가 두꺼워지고 몸집이 커진다. 기쁜 듯이 미소가 가득하다.

그들의 밑에는 말라비틀어진 인간의 사체가 남아있다.

“뭘 보라는 거지...?”

프레이는 눈을 돌렸다. 그 광경을 즐길 만큼 미치지는 않았으니.

“저 인간들은 어떻게 자랐는가?”

“뭐?”

“트리언에게 들었다. 너, 그리고 그 마을의 인간들이 사슴을 사냥했지 않은가.”

프레이는 도축한 사슴을 떠올렸다. 길리언은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 말을 이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다. 다른 생물을 섭취하고 살아나는 게 자연의 섭리지. 하지만 식물만은 다르다.”

길리언은 숲을 훑어보았다.

“이 수많은 나무들은 그저 햇빛과 물로 살아간다.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리언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대한 옹이구멍이 프레이를 삼키듯 다가왔다.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단순한 식물이 아님을. 솔리스께서 왜 우리를 만드셨는지를!”

“미쳤군...!”

“움직이는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미천한 우리는 신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저 쫓기고 사냥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길리언의 입가에 미소가 만개했다.

“우리가 사냥꾼이오, 너희들이 사냥감이다! 너희들의 피를 취하고 우리는 번성한다. 솔리스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지 않는 부정한 피를 정화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프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광신도.

믿음에 심취한 나머지 미쳐가는 자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엘드리안이 미쳐버렸다.

‘그런데 나를 살려두는 건...’

아무래도 이퀄라이저 특성 때문이 아닐까.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저 미치광이 엘드리안이 쉽게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남다른 인간이라면 그들의 믿음과 상반될 테니.

‘그렇다면...!’

그 믿음을 이용해야 한다. 프레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길리언 님. 그 인간도 만찬의 재료로 삼습니까?”

잡아 온 인간이 전부 죽어 할 일이 없어진 트리언이 다가와 물었다. 길리언은 몸을 돌렸다.

“아니다. 너는 가서 약속을 지키거라. 뿌리와 잎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인간 수가 줄었으니 당분간 사냥을 자제하거라.”

“...알겠습니다.”

트리언은 숲으로 사라지고 우드스톡은 어린 엘드리안을 데리고 숲으로 돌아갔다. 프레이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증명하지.”

“뭐라고...?”

프레이는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적어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 믿음을 증명하겠다. 말로는 내 신앙심을 알 수 없을 테니까.”

“흠... 그렇군. 인간들은 솔리스 님을 닮은 물건을 만들지... 그 인간도 그랬고.”

길리언이 말하는 사이 프레이는 팔을 움직였다.

“손을 좀 움직이게 해주었으면 좋겠군. 내 가방에 있으니.”

“...좋다.”

스르륵-

프레이의 팔을 억누르던 줄기가 느슨해졌다. 프레이는 빠르게 인벤토리를 찾았다.

“이게... 내 증거다!”

“그건...!?”

프레이의 손에 쥐어진 붉은 마정석.

화르륵-

그와 동시에 그를 얽어매던 줄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연기가 피어오르며 끊어진 줄기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프레이는 빠르게 줄기를 풀어냈다.

“네놈! 나를 속였구나!”

길리언은 강렬한 열기에 물러섰다. 불길은 곧 다른 나무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놈을...!’

프레이는 그대로 길리언을 불태우려 했다. 이런 미치광이를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러나.

‘이게...?’

손에 있는 마정석의 빛이 점점 옅어지더니, 사라졌다. 치솟던 불길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어째서?’

[‘이그니스의 붉은 심장’ (소진)]

[불의 신 이그니스의 정수가 담긴 마정석입니다. 마정석 자체로 강력한 열기를 내뿜을 수 있으며 소지자는 화염과 열기에 면역을 얻게 됩니다. 장비 및 오토마톤 등에 부착할 수 있으며 효과는 부착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정석의 모든 마력을 소진했습니다. 열기를 보충하십시오.]

‘아차...!’

프레이는 그제야 이것 역시 마정석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토마톤을 상대하면서 경험하지 않았던가. 마정석은 충전 및 교환이 필요하다는 사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담았더라도 소모성이라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프람이 만든 시체골렘을 상대하면서 대부분의 마력을 쏟았던 게 분명했다.

‘승산이 없다...!’

계산을 빠르게 마쳤다. 길리언이 당황한 사이에 도망쳐야 했다.

“길리언 님...!”

멀리서 우드스톡이 말했다. 피어난 검은 연기를 보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프레이는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네놈...!”

길리언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프레이는 이미 숲을 내달리고 있었다.

불이 번져서는 곤란했기에, 길리언은 나무에 옮겨 붙은 불을 휘감았다. 공기가 차단되며 불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크...”

불길이 옮겨 붙으며 고통이 느껴졌지만 참아냈다. 뒤늦게 우드스톡이 도착했다.

“이게 대체...!?”

“영악한 놈이다...!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지금 쫓아가는 건 무리였다. 기회는 다음에도 올 것이다.

이 숲은 모두 엘드리안을 위한 것이니.

* * *

쉬지 않고 달렸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후우... 후우...”

프레이는 숲의 끝이 보이자 힘겹게 숨을 뱉었다.

떨리는 다리를 옮겨 입구까지 다다랐다.

탁- 탁-

문을 두드렸다. 입구를 지키던 당번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할산 님...?”

“접니다...! 프레이...”

“프레이...?”

문이 슬쩍 열린다. 당번이 놀란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당신...!”

프레이는 대꾸하지 않고 들어갔다.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어떻게...”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할산의 집으로 갔다.

벌컥 문을 여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바이런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와 프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바이런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형...”

프레이는 바이런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바이런이 급하게 그를 부축했다.

“인마! 어떻게 된 거야!?”

“형... 저 물... 물 좀...”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이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자, 자 좀 마셔.”

물 잔을 건네자 프레이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후...”

조금 살 것 같았다. 바이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프레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형, 세이렌은...”

“괜찮아. 할산이 준 약 덕분에 고통은 좀 덜한 것 같아.”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뭐...? 엘드리안 광신도라니...”

바이런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엘드리안의 첩자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프레이는 씁쓸하게 말을 뱉었다. 길리언은 이 마을 사람들이 솔리스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첩자라고?”

“네. 그리고 분명...”

프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그는 몸을 일으켜서 할산의 집을 훑었다.

“뭘 찾는 거야?”

“증거요.”

“뭐?”

“할산, 그녀가 엘드리안의 앞잡이예요.”

프레이의 말에 바이런은 그대로 굳었다. 눈을 껌뻑이며 그는 방금 들은 정보를 처리하는 데 주력했다.

“찾았다...”

프레이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솔리스의 석상을 발견했다.

* * *

끼익-

문이 열리며 인영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할산.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갔다 오셨습니까?”

“누구...!?”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소리쳤다. 어두운 방 안에서 등장한 남자는 프레이였다.

할산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당신... 분명 죽었다고...”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프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할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혀 기뻐 보이지 않으신데요.”

할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웃음은 지우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조금 놀라서 그런 거겠죠.”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프레이는 그녀를 따라 눈을 돌린다.

“고생하셨어요.”

프레이는 그녀가 내민 물 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 잔을 치웠다.

“다 알고 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프레이의 시선은 그녀가 가져온 가방으로 돌아갔다.

“저 가방 안에는 엘드리안의 잎과 뿌리가 들어있겠죠.”

“그걸...”

그녀는 표정에서 미소를 지웠다. 이제 가식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 엘드리안이 전부 말하던가요?”

“아뇨... 하지만 충분히 단서를 주었죠. 왜 그랬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유야 뻔하다. 그녀가 받아온 물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엘드리안에게 인간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부산물을 받아온다. 부산물의 용도는 뻔하다. 그녀가 스스로 좋은 마법 재료라고 했으니, 연구용이 당연했다.

“의외네요. 이유를 궁금해 할 줄 알았는데...”

가식을 벗겨내니 그녀의 진면모가 보인다.

할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가식이 아닌 흥미에서 나오는 미소.

“우리에게 주려는 그 영약도 사실은 표식 같은 게 아닙니까? 엘드리안에게 사냥감을 알려주는...”

프레이는 어린 엘드리안에게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약이 효과가 없다는 그 말.

“대단하군요... 맞아요. 인정하죠. 엘드리안의 부산물로 만든 표식이에요. 꽤 효과가 좋죠. 멀리서도 알 수 있으니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일까.

프레이는 얼굴을 굳혔다.

“여기는... 마치 축사와 같군요. 엘드리안에게 바칠 인간을 사육하는...”

숲에 들어오는 건 도망자들이다. 그들에게 갈 곳은 없다.

할산은 그런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관리해왔다.

스스로 떠나지 않으려는 가축을 돌보는 목동의 역할을 맡아왔던 것. 그녀는 솔리스를 믿는다는 증표를 보여주고 가축 신세를 면했던 것이다.

“그런 축사에... 풍파를 일으킬 셈인가요?”

할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프레이는 그녀가 건네준 물 잔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를 죽여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유저니까요.”

“그렇죠... 참 까다로운 일이에요...”

할산은 물을 들이켰다. 프레이는 흠칫 놀랐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요? 독이라도 넣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어차피 살아날 유저를 뭐 하러 죽이나요. 그나저나... 이렇게 바로 날 찾아왔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녀의 악행을 사람들에게 알렸다면 이렇게 집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프레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을 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었다.

“치료제.”

프레이는 짧게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컸다.

“오... 의외로 똑똑하네요.”

“나도 한때는 사냥꾼이었으니까요.”

프레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냥꾼은 무턱대고 사냥하지 않는다. 사냥감의 숫자가 줄어들면, 그 피해는 다시 사냥꾼에게 돌아온다.

길리언은 인간의 개체 수를 언급했다.

신성제국이 길을 봉쇄한 이상 도망자가 살아있는 숲을 찾아오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마을 사람들을 사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인간이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람 하나가 건강하게 크는 데에는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전염병...’

엘드리안은 피를 빨아들인다. 그들이 원하는 건 육체가 아니다.

육체야 어떻든 피를 제공하면 될 일이 아닌가.

인간은 살아있으면 피가 다시 재생된다. 다른 활동을 억제하면 재생 시간은 더욱 빨라질 터.

“맞아요. 하지만 수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저 재료도 그래서 받아온 거고.”

할산이 고개를 돌려 재료가 담긴 가방을 바라보았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치료제는 있었다.

전염병에 걸린 상태로 사람을 운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분명 치료제를 이용해 사람들을 다시 숲에 풀 계획이었을 터.

“치료제를 넘겨주면,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프레이는 차분히 말했다. 그의 표정은 무척 담담했다.

그는 거래를 제안했다.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거래를.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9%)]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8%)]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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