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도망자들 -->
길잡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프레이가 뒤에서 말했다. 길잡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길이 바뀌었습니다.”
“길이요?”
“예... 엘드리안이 지나간 모양입니다. 나무에 새겨둔 표식이 사라졌어요.”
그는 나무껍질을 문지르며 말했다. 프레이는 눈을 돌렸지만 표식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보겠습니다만...”
길잡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엘드리안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피부를 찌르듯 긴장감이 느껴졌다.
‘주변에 있다는 말이지...’
프레이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이그니스의 붉은 심장을 사용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그건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엘드리안이 불타버리면 부산물이 잿더미가 된다. 그리고 이 숲에 불이 옮겨붙어 아예 산불이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부산물을 채취해야 해...’
전문 사냥꾼이 아니었기에 적절한 장비도 없다. 결국 엘드리안을 쓰러뜨리고 직접 채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부스럭- 부스럭-
“뭐, 뭐야!”
누군가 놀라서 소리를 높였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길잡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목소리 낮춰요!”
그 사이 프레이는 시위를 당겼다.
오랜만에 보이는 조준점,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쏴아악-
화살이 날아간 끝에는 새끼 사슴이 있었다. 화살촉이 사슴의 목에 박혔다.
사슴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단하군...!”
사람들은 프레이의 솜씨에 감탄했다. 사람들이 사슴에게 다가갔다.
“이 정도면...!”
“바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빨리 이 숲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길잡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일단 나중에 돌아갈 때 가져가기로 하죠.”
“아뇨. 나중에 오면 다른 짐승이 물어갈 수 있습니다.”
프레이가 나서서 반박했다.
그는 사냥꾼이었다.
“잠깐 빌리겠습니다.”
창을 잡았다. 주인은 홀린 듯이 프레이에게 창을 넘겨주었다.
‘단검만 멀쩡했어도...’
그가 가진 단검은 용암 거인을 상대하느라 내구도가 엉망이었다. 도축하다가 무기를 깨 먹을 수는 없는 노릇.
투박하더라도 창의 날붙이를 이용해 도축을 시도했다.
서걱- 서걱-
단숨에 내장을 들어냈다. 사슴의 피가 바닥을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우, 우리는 열매라도 땁시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길잡이가 말했다.
활잡이들은 근처 수풀을 뒤져 먹을 만한 걸 찾았다. 다른 창잡이는 연신 나무를 올려다보며 창을 휘둘렀다.
‘응?’
창잡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무 사이에 창이 걸렸다. 휘두르다가 나뭇가지에 박힌 모양이었다.
‘이거 왜 안 빠져...?’
연신 힘을 주었지만 창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창을 빼내려 했다. 그렇게 나무 기둥에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
“맛있는 인간이 왔군.”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에 창잡이는 몸이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마주한 것은 거대한 옹이구멍이었다.
문제는 그 옹이구멍이 살아있는 듯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 * *
‘됐다.’
프레이는 깔끔하게 분리된 고기를 보며 만족해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길잡이에게 고기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길잡이가 고기를 챙겼다.
그때였다.
“끄아아아아!”
비명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나무에 삼켜지듯, 창잡이의 머리와 어깨가 옹이구멍에 박혀있었다.
그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활잡이들이었다.
“에, 엘드리안이다!”
“도망쳐!”
남들이 도망치는지는 상관없었다. 그들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길잡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깐...! 제기랄!”
도망가는 사람들을 붙잡는 건 무리였다. 프레이는 다급하게 검을 들었다.
아직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프레이는 다급하게 창잡이를 향해 달려갔다.
콰득- 콰드득-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창잡이가 살 가능성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창잡이의 몸이 바스러졌다. 뼈가 살점을 찢고 나오며 붉은 피가 뿜어졌다.
그러나 바닥으로 흐르는 피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엘드리안이 피를 흡수하는 것 같았다.
‘이미 늦었어...!’
주르륵-
구겨진 창잡이의 몸이 옹이구멍에서 흘러내렸다. 피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특이한 인간이군. 내 후식이 되어줄 셈인가.”
옹이구멍이 움직이며 목소리가 들렸다.
[‘이퀄라이저’ 특성이 반영됩니다.]
[엘드리안 ‘트리언’의 스테이터스로 보정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이름이 있는 놈...!’
달려가던 속도가 느려진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힘은 남달랐다. 용암 거인보다는 못 하더라도 웬만한 오크의 서너 배는 될 정도의 힘.
“길리안 님께서 과식은 삼가라고 하셨지만...”
쿠구국- 쿠국-
바닥이 들썩이며 뿌리가 드러났다. 마치 사람의 다리처럼 뿌리 묶음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달려드는 인간까지 거절하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지...”
프레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괴물과 대화할 생각은 없었다.
나뭇가지가 얽히며 팔처럼 형태를 이루었다. 트리언은 프레이를 붙잡으려는 듯 팔을 휘둘렀다.
“큭...!”
그 기세가 대단해 프레이는 급하게 앞으로 엎드렸다.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팔이 지나갔다.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뻔했군...!’
프레이는 곧바로 일어나 트리언에게 접근했다. 가까이 붙으면 공격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어리석군.”
“뭣...!?”
옹이구멍이 크게 벌어지며 안에서 가느다란 줄기가 뻗어졌다. 아무래도 창잡이는 이것에 붙잡힌 것 같았다.
“이런...!”
다행히 프레이는 멍청하게 당하지 않았다. 칼을 휘둘러 줄기를 쳐냈다.
“소용없다...!”
그러나 줄기는 몇 번을 잘라내도 쏟아져 나왔다. 결국 프레이는 물러서서 다시 거리를 벌려야 했다.
‘도대체...!’
잘라낸 줄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트리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얌전히 포기해라. 이 숲이 곧 엘드리안이오, 솔리스의 축복을 받은 곳이니...”
트리언이 다시금 팔을 뻗었다. 프레이는 신속하게 몸을 틀어 피하면서 인벤토리를 열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 죽으면 4일 뒤에나 살아난다. 그 사이 세이렌의 병이 얼마나 진행될지 모른다. 일단은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이그니스의 붉은 심장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프레이가 손을 뻗기도 전에 그의 몸을 줄기가 얽어맸다.
“크악...!”
튼튼한 밧줄이 몸을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프레이는 부들부들 떨며 인벤토리에 손을 넣으려 했다.
“다른 엘드리안은 줄기로 피를 빨아들이는 걸 좋아하지...”
“크윽...!”
힘은 지지 않는다. 그러나 힘으로 이길 수도 없었다.
점차 프레이는 트리언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세였다. 같은 힘이라도 자세에 따라 다르니까.
줄기에 포박당한 프레이는 힘을 모두 끌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씹어 먹는 게 좋다... 너희 인간들의 살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촉촉이 내 속을 적셔줄 때의 그 느낌...”
“크윽...!”
프레이는 안간힘으로 버텼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촤악-
줄기가 더 돋아나 프레이의 몸을 엮었다. 마치 줄기로 된 갑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너의 몸을 비틀지 않는 건, 너의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서다. 무의미한 반항은 그만두어라...”
옹이구멍이 연신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인간이 표정을 짓듯이, 트리언의 옹이구멍도 그러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트리언에게 다가갔다.
어두운 옹이구멍 안은 마치 지옥의 입구와도 같았다. 프레이는 저항할 수 없었다.
* * *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정신없이 내달렸다.
길잡이는 빠르게 소리쳤다.
“저기, 저쪽으로!”
방향은 알려준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나무를 헤치며 움직였다.
“아아아악!”
활잡이 하나가 높이 솟구쳤다. 길잡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발에 굵은 나무줄기가 묶여있었으니까.
엘드리안은 하나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일단 한 명이라도 살아야 했으니까.
‘조금만 더...!’
숲의 끝이 보인다. 다행히 희생자 덕분인지 엘드리안이 쫓아오는 기미는 없었다.
마을이 보인다. 그는 잠깐이나마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남은 생존자는 활잡이 하나와 자신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헉... 헉...”
입구에 도착한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입구를 담당하는 남자는 그에게 사정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식량은...?”
길잡이와 활잡이는 숨을 몰아쉬다가 가방을 열었다.
피로 흥건한 고깃덩어리와 과일들이 들어 있었다.
“수고했네...”
무사히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됐어...’
당분간 자신의 차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 * *
“크악...!”
프레이의 머리가 옹이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창잡이의 뼛조각과 살점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질척한 살점이 얼굴에 닿았다.
옹이구멍이 점점 좁아지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크윽...’
이대로 죽는 걸까,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트리언.”
목소리가 들렸다.
똑같은 톤이었지만, 다른 엘드리안이 나타났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빛이 들어왔다.
“우드스톡. 무슨 일이지? 내 식사를 방해하는 이유가 뭔가?”
트리언이 대답하면 옹이구멍이 흔들렸다.
안심은 일렀다. 프레이는 여전히 얽매여 있었으니까.
“길리언 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인가?”
“우드스톡... 그게 무슨 말이냐?”
“오늘은 만찬의 날이다. 멋대로 인간을 먹지 말라고 하셨을 텐데...”
트리언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프레이의 몸이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제야 그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엘드리안은 활잡이 중 한 명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아예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당한 건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붙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까다롭군... 한 놈쯤은 먹어도 길리언 님도 모르실 텐데...”
“그건 네 옹이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뼛조각이나 가리고 말하는 게 좋을 텐데... 길리언 님께서 보시면...”
우드스톡의 지적에 트리언의 옹이구멍이 흔들렸다. 남은 잔여물이 바닥으로 흘렀다.
“음... 알았다. 이 인간은 만찬의 재료로 삼도록 하지.”
쿵- 쿵-
우드스톡과 트리언이 걸음을 옮겼다. 프레이는 속수무책으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그들의 이동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프레이는 되도록 방향을 가늠하려 했다. 나중에 부활했을 때 이곳을 찾아올 생각으로.
그들은 점차 걸음을 늦추었다.
‘여기는...’
건장한 남성 10명의 허리를 모아두면 저 정도 둘레일까. 무척 두꺼운 나무가 보였다.
문제는 그 나무 역시 엘드리안이라는 점이었다.
“우드스톡, 트리언. 인간을 잡아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길리언 님.”
목소리가 같아 누가 대답했는지 알 수 없었다. 길리언이라는 엘드리안이 그들의 수장으로 보였다.
“음... 만찬의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 인간들은 보관해 두어라.”
“알겠습니다.”
길리언의 말에 우드스톡과 트리언이 잡아 온 인간들을 내려놓았다.
“트리언...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피를 빼두었어야지.”
프레이가 아직 정신이 멀쩡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우드스톡이 질책했다.
“두어라. 너희들은 만찬 재료를 가지러 가거라. 이 인간은 내가 맡지.”
길리언의 몸에서 줄기가 뻗어져 나왔다. 프레이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크윽...!”
바늘처럼 날카로운 줄기가 프레이의 목에 꽂혔다. 강렬한 격통과 함께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런...’
정신이 몽롱해졌다. 곧 프레이는 의식을 잃었다.
길리언은 쓰러진 프레이를 줄기로 받아내며 목소리를 냈다.
“이 인간... 뭔가 다르구나...”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6%)]
[중급 검술 Lv5 (9%)]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8 (8%)]
[초급 도축 Lv3 (62%)]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