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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엘타란은 정갈하게 몸을 씻었다.
몸을 청결히, 마음은 차분하게. 그는 갑옷을 착용하고 예배당을 방문했다.
“아, 엘타란 경.”
나이든 사제가 그를 반겼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는 엘타란은, 그야말로 성기사의 귀감이었다.
사제는 익숙하게 그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의 경건한 기도가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했기에.
엘타란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렸다.
그가 바라보는 건 솔리스의 모습을 흉내 내서 만든 석상도 아니며, 신의 말씀을 기록했다는 성경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예배당 위쪽에 나 있는 작은 창, 그리고 그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었다.
솔리스는 태양과 생명의 신. 그에게 비치는 햇살이 신의 말씀이자 신이 내려주시는 사랑이었다.
‘오늘도 그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엘타란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다.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충만감, 신의 뜻을 대행한다는 만족감이 그를 기쁘게 했다.
“엘타란 님!”
그가 문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전령이 나타났다.
“아, 왔는가.”
엘타란은 덤덤하게 전령의 얼굴을 마주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엘타란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을 받은 전령 역시 신의 뜻을 대행하는 자, 그 고달픔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테니.
“여기, 헤리엇 대주교님의 회신을 가져왔습니다.”
“음.”
전령은 불평 하나 없이 대주교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엘타란은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엘타란이 앓는 소리를 내자 전령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전령은 되도록 피곤함을 감추고 싶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고단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다시 아일렘을 방문하여야 할 터, 그런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대주교님께서 주신 것이 분명한가?”
“예. 확실합니다.”
엘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없었지만 확인차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전령의 태도를 보아하니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알겠다. 고생했네.”
“예.”
전령은 겨우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피어 나왔다. 엘타란은 그 웃음이 사명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서로 생각이 달라도 모두가 만족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나중에 또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지.”
“예, 언제든지 명하십시오.”
엘타란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발은 감옥으로 향했다.
* * *
프레이는 찌뿌둥한 느낌에 눈을 찌푸렸다.
“우으...”
절로 신음이 나왔다. 감옥 잠자리가 편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 프레이...”
세이렌이 지친 표정으로 일어섰다. 노숙 경험이 적은 그녀로서는 차디찬 감옥 바닥을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바이런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프레이는 다시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괜찮아요?”
“응... 근데 허리가...”
세이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풀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냈다.
“어휴... 소식이 언제 오려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일어났나.”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이렌은 화들짝 놀랬다. 엘타란이 창살 뒤에서 프레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랑이?”
프레이의 말에 엘타란이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어떻게 됐어요? 수도로 가야 하나요?”
세이렌이 프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어보았다. 엘타란이 돌아왔다는 건 뭔가 변동사항이 있다는 말일 터.
“아, 그대들의 주장을 헤리엇 대주교님께 전했다. 방금 회신이 왔지.”
엘타란이 서신을 꺼내 보여주었다.
“수도로 오라고 하던가요?”
“아니, 그건 곤란하다.”
엘타란이 고개를 흔들자 세이렌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 증명할 수 있다니까요!?”
“그 증명이 문제다.”
엘타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는 헤리엇의 회신 중 필요한 부분만을 떠올렸다.
“현재 신성제국에는 제국의 후예 황족을 입증하는 도구가 없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프레이도 놀라 물었다. 세이렌의 이야기와는 다른 말이었으니, 그녀도 놀란 기색이었다.
“본래 그 도구는 마틴 도프람이 신성제국에 올 때만을 위해 빌렸던 물건이었다.”
엘타란도 자세한 사정은 몰랐기에 헤리엇 대주교의 설명을 전달했다. 그는 세이렌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설령 그대가 데일 도프람이라고 한들, 신성제국에서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지.”
“그런...!”
“잠깐, 그러면 우리는 계속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철컹-
프레이가 쇠창살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아직 리반의 낯짝도 보지 못했는데 감옥에서 여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아니다. 내 말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네.”
엘타란은 손을 들어 프레이의 흥분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프레이는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헤리엇 대주교님께서는 그대들이 신성제국에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은 점과 모르테미안 토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만약 모르템의 사도라면 힘의 원천인 토템을 철저히 숨겼을 테니까.”
엘타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기까지는 그도 이해하는 바이지만, 그 이후의 내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네들을 억류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 즉시 풀어줄 것이다. 다만...”
“다만...?”
프레이는 엘타란의 말을 재촉했다. 엘타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대들의 주장이 사실임을 재차 요구하려면, 직접 마도연합에 가서 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 도구의 이름은 ‘켈라인의 오브’, 현재 마나홀드 대학에 보관 중일 거라고 말씀하셨다.”
엘타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헤리엇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타국의 황태자를 검증하는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할 이유는 없었다.
마틴이 신성 제국에 왔을 때만 필요했던 물건이니만큼 사용 후, 교단은 바로 마도연합에 돌려주었다.
“그럼...”
프레이는 엘타란의 말을 정리했다.
일단 감옥에서 나갈 수는 있다. 그런데 세이렌이 데일 도프람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도연합에 찾아가 특정한 도구를 가져와야 했다.
“이들을 풀어줘라.”
세이렌과 프레이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엘타란의 말에 병사가 감옥 문을 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일어난 바이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뭐야? 해결된 거야?”
하지만 다른 일행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 * *
“문제를 일으키지는 말게.”
엘타란의 말을 뒤로하고 프레이는 일행과 함께 여관을 찾았다. 일단 숙소를 정하고 향후 계획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할 거야?”
빈 자리에 걸터앉으며 바이런이 물었다. 프레이는 눈을 돌려 세이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신성제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으니,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일단 프레이와 당장 헤어지지 않게 되어서 기뻤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마도연합까지 같이 가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여기까지 와준 것도 고마운데...’
자신이 프레이에게 해준 게 뭐가 있겠는가. 돈도 권력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프레이가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가 아니던가.
“세이렌?”
“어? 응?”
프레이의 말에 세이렌이 놀라서 대답했다. 그녀는 프레이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다.
“미안... 괜히 고생만 시켜서...”
“고생은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문제인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어쩐다...’
본래 계획은 세이렌을 무사히 데려다주고 그녀의 곁에서 성기사들의 전투 방식을 살피는 것이었다. 다른 성기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면 리반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세이렌과 마도연합을 간다면...?’
마도연합으로 가려면 또다시 동쪽으로 향해야 한다. 엘레타스 대륙까지 가려면 다시금 바다를 건너야 했고, 우조스까지 돌아오려면 또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물론 아직 리반을 상대할 실력은 되지 않는다. 그가 보유한 스킬은 아직까지 중급 수준, 리반의 스킬은 적어도 고급 이상일 터였다.
‘하지만... 너무 멀어지는 것 같은데...’
당장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점점 리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세이렌이었다.
복수심이 옅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맞는 방향으로 가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도연합...’
아무런 대가 없이 세이렌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녀를 도와주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일까.
‘황태자, 신성제국, 볼모, 마틴...’
마틴을 대신해 볼모로 잡히는 세이렌, 과연 마틴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배다른 형제, 아니 남매를 동정할까? 아니면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할까?
그리고 세이렌을 신성제국에 인도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적? 아니면 아군?
‘황실에 연을 만든다...?’
프레이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 마틴은 어떻게든 세이렌과 함께한 자신을 신경 쓸 터였다.
‘그러고 보니...’
리반에게 복수할 생각만을 했지, 리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세이렌은 리반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리반이 어떻게든 황실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
‘리반에게 접근하려면...’
리반은 제국의 후예에서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 영웅을 아무나 만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황실로 들어간다면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프레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움찔 몸을 떨었다. 바이런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마,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네? 아...”
프레이는 멋쩍게 웃었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
세이렌은 프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직접 말하기에는 미안하지만, 내심 프레이가 먼저 자신과 함께하자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바이런이었다.
“일단 가자.”
“어디를요?”
“마도연합.”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 프레이와 세이렌은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여기서 안 간다고 선택하면 뭘 어쩔 건데?”
세이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프레이는 눈을 껌뻑였다.
지금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민을 했을 뿐, 선택 이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프레이, 생각해 봐라. 세이렌과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무도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거야. 누가 여자로 변한 황태자와 다니겠어?”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 없었다. 바이런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경험, 누가 해봤겠어? 내가 말했잖아, 지금 다른 유저들은 스킬 수련이다, 득템이다, 이런 거에 빠져 있지만 우리는 모험을 즐기고 있다고!”
“바이런...”
“프레이, 내가 부탁하마. 이 기회 놓치면 진짜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바이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세이렌과 헤어지는 길을 택한다면 그들이 할 일이 뭘까? 조합에 가서 의뢰를 받고, 돈을 벌고 장비를 맞추고, 다시 의뢰를 수행하고.
가상현실에서도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 빠져들 것이다.
반면 세이렌과 함께하는 건 격이 다른 일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입증하는 건 새로운 쳇바퀴를 만드는 일이었다.
쳇바퀴를 돌리는 쪽에서 쳇바퀴를 만드는 쪽으로 옮겨가는 것, 바이런은 현실과는 다른 삶을 원하고 있었다.
가상현실 판타지 게임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놀라운 경험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바이런...”
세이렌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프레이를 설득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전해졌기에 고마움을 느꼈다.
“프레이, 부탁할게. 조금만, 나와 더 같이 있어주면 좋겠어.”
그녀 역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는...”
프레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5%)]
[중급 검술 Lv5 (3%)]
[초급 단검술 Lv9 (24%)]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4 (47%)]
[초급 승마 Lv5 (16%)]
[초급 도축 Lv3 (49%)]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