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여기는 어디 -->
아르갈은 심각한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스틸리오, 그놈들이 왜요?”
세이렌이 물었다. 그녀에게는 신성제국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황태자의 자리를 오랫동안 공석으로 놔둘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마틴을 돌려보내 삼촌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인간 도시로 가려면 늪지대를 건너야 한다피. 그러나 스틸리오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피.”
“늪지대...?”
“그렇다피. 늪지대 끝쪽에 동굴이 있다피. 그곳을 통과하면 인간 도시로 가는 길이 나온다피.”
아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프레이는 바이런과 세이렌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대륙 남부면... 배를 타고 가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세이렌의 의견이었다.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항구도시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아가씨, 그건 좀 힘들지.”
“왜요?”
바이런이 고개를 흔들자 세이렌이 물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떠내려온 건 조류 때문이잖아? 즉, 이 주변 바다는 남쪽으로 흐른다고. 당연히 우리 중에 항해술을 배운 사람이 없으니 바다를 거스를 수도 없지.”
“...중요한 건 우리에게 배가 없다는 거죠.”
바이런의 말끝에 프레이가 이유를 덧붙였다. 앞의 이유를 충족시킨다 한들 배가 없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크젤의 마법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아르갈 할아버지, 이 인간들 강하다피! 거미도 한 번에 쫓아냈다피!”
브류가 짧은 발을 아장아장 걸으며 앞으로 나왔다. 아르갈이 눈을 껌뻑였다.
“정글 거미를 말하는 것이냐피?”
“맞다피! 독을 뒤집어써도 멀쩡했다피!”
“오오...!”
브류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피스칸 족이 놀랍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르갈은 프레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프레이만 그런 건데. 그러고 보니 너 어떻게 멀쩡하냐?”
바이런이 손가락으로 프레이를 가리키다 뒤늦게 물어봤다.
‘아... 이런...’
프레이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식은땀이 흘렀다. 세이렌도 말은 안 했지만 궁금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얻은 특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걸 이야기했다가는 더원과의 만남까지 이야기해야 할 테고, 자신이 본래 유저가 아니라는 설명까지 해야 했다.
그런 프레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탈출구.
“아... 사실 이런 게 있습니다.”
프레이는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그가 꺼낸 건 다름 아닌 붉은 바위 부족 전사의 토템.
바이런이 토템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야, 너 진짜 강심장이네. 확률적으로 막아주는 건데 대놓고 몸빵을 해?”
“뭔데요?”
“어... 그러니까 확률적으로 상태 이상, 그러니까 화상이나 중독, 수면 등 나쁜 걸 막아주는 토템이죠.”
바이런은 세이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세이렌.
프레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했다.
‘다행히 넘어갔다.’
실상은 정글 거미가 가진 독 저항력이 면역수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토템의 덕으로 이해했다. 프레이가 바라던 흐름이었다.
“그... 그건... 전사의 토템이 아닌가피?”
프레이가 예상치 못한 반응은 아르갈에게서 나왔다. 아르갈이 놀라워하는 얼굴을 보고 브류는 프레이와 아르갈을 번갈아 보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냐피?”
“브류... 정말 대단한 인간을 모셔왔구나피.”
“네?”
정작 당황스러운 건 프레이였다. 아르갈은 새삼 달라진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어느 부족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전사의 토템이다피. 이런 어린 인간이 가졌다니 놀라울 따름이다피.”
아르갈은 조심스럽게 프레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작은 손으로 프레이의 손등을 만지며 말했다.
“오크의 인정을 받은 전사여, 명예가 그대를 쫓는다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프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명예를 운운하다니 무슨 속셈인 걸까.
“본디 전사란 강자에게 도전하고 약자를 도우는 자, 이런 시기에 자네와 같은 전사가 이곳에 도달한 것은 바다의 신 리퀴두스의 은총이 분명하다피.”
“어...”
아르갈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 프레이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브류는 그 작은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리퀴두스께서 인간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말입니까피?”
“그렇다피. 브류, 이 인간들을 해안가에서 발견했다 하지 않았느냐피?”
“맞습니다피.”
“그대들은 배가 난파되어 이곳에 도달했다피.”
아르갈이 고개를 다시 프레이에게 돌렸다. 프레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죠.”
“리퀴두스가 그대를 우리에게 인도한 증거다피.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어찌 도달했겠느냐피.”
“그건 그냥 조류가...”
바이런이 딴지를 걸려고 했지만 주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피스칸 족이 하나둘씩 엎드리기 시작했으니까.
아르갈은 프레이를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구원자가 나타났다피.”
“후와아아.”
브류가 앙증맞은 손을 뺨에 올리며 입을 벌렸다. 똘망똘망한 눈이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브류...!”
누군가 짧게 소리치자 브류는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엎드렸다.
“아니... 저...”
프레이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세이렌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프레이는 그녀를 돌아봤다.
세이렌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황태자를 선망하는 자들은 질리도록 봤으니까.
“굳이 분위기를 깨지마.”
세이렌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이런 자들에게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프레이는 어색함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아르갈은 프레이의 손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전사여, 우리를 도와주게피. 저 악독한 스틸리오를 물리치고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게피.”
“인간, 부탁이다피! 많은 피스칸이 스틸리오에게 죽었다피!”
브류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거절하면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잠시... 저희끼리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프레이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피스칸 족의 사정이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무조건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다피. 모두들 돌아가라피.”
아르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피스칸 족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편하게 있어라피.”
아르갈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말했다. 피스칸 족이 사라지자 프레이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아... 갑자기 무슨 일이죠.”
“그 토템 때문에 받은 퀘스트 같은데...”
바이런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토템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르갈이 부탁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그 스틸리오라는 놈들을 처리해야 하는 건 맞지 않아? 어차피 처리할 놈들이라면 피스칸 족을 돕고 보상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세이렌의 의견이었다. 피할 수 없는 적이라면, 적어도 챙기는 게 있는 편이 낫다는 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스틸리오라는 놈들이 너무 강하면 어떡합니까? 자칫하면 피스칸 족이 우리를 쫓을지도 모르죠.”
바이런은 신중했다. 퀘스트 실패에는 언제나 페널티가 있는 법, 피스칸 족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둘의 시선은 프레이에게 모였다. 결과적으로 피스칸 족이 원하는 전사는 프레이였기에 그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프레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스틸리오에 대해서 아는 건 없으세요?”
“음? 글쎄... 내가 아는 정보가 별로 없는데... 이쪽 대륙 남부로는 인간들 왕래가 거의 없어. 미개척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 개척할 가치가 없다는 편이 맞겠네.”
“가치가 없다뇨?”
세이렌이 돌아보며 물었다.
“뭐... 봤다시피 열대 우림이랑 아르갈이 말한 늪지대도 그렇고. 일단 지형 자체가 사람이 살기에 별로야. 굳이 온다고 해도 정글 쪽 몬스터는 상대하기가 껄끄럽거든. 독성인 놈들이 많기도 하고.”
투자하는 자원 대비 소득이 별로 없다는 말. 이곳 말고도 좋은 곳이 많은데 사람들이 올 필요가 있을까.
“음... 그렇군요.”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아르갈을 찾았다.
“오오... 드디어 결정을 내린 건가피?”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프레이가 손을 저었다. 아르갈의 수염이 그의 기분을 반영하듯 밑으로 축 처졌다.
“그런가피...”
“일단 그 스틸리오라는 놈들을 봐야겠습니다. 놈들을 몰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정말인가피?”
아르갈의 수염이 다시 팽팽해졌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상대할 적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스틸리오라는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차피 상대해야 할 놈들이기도 하고...’
해로는 막혔으니 선택지는 육로뿐이었다. 피스칸 족을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스틸리오와는 부딪쳐야 했다.
아르갈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음... 스틸리오는 동쪽 늪지대 쪽에 있을 거다피. 하지만 그대로 가면 놈들에게 들킨다피.”
“그러면요?”
“늪지대 남쪽으로 이어진 정글을 지나가야 한다피. 그런데 길 안내를 맡을 피스칸이...”
“내가 간다피!”
아르갈이 비늘을 긁으며 고민하는 사이 브류가 난입했다.
“브류? 무슨 소리냐피!”
“정글 많이 갔다 와봤다피. 내가 안내하겠다피!”
브류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미 준비를 마친 듯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르갈은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견을 묻는 듯했다.
‘확실히... 브류가 나온 건 정글 쪽이었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그가 브류를 발견했을 때 브류가 쫓기는 중이었다는 사실.
“프람을 치료할 약초 때문에 많이 갔다피. 나를 믿어라피!”
브류가 가슴을 쳤다. 한껏 크게 보이려고 숨까지 들이마셨다. 물론 그래 봤자 어린 피스칸이었지만.
“음... 좋습니다.”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더라도 경험이 있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브류에게서 이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강한 적 앞에서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모습이.
아니, 브류는 그보다 나았다. 적어도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이에 브류는 정글로 뛰어들었다.
브류가 그때의 자신처럼 좌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누군가 도와줬다면...’
프레이는 다시금 불타는 더스틴 마을을 떠올렸다. 누군가 도와줬다면 달라졌을까.
“프레이...?”
“네? 아...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세이렌의 목소리에 프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출발하자피!”
“브류를 잘 부탁한다피.”
브류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아르갈이 프레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 벌레 엄청 많을 것 같은데...”
바이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를 따랐다.
* * *
샤아악-
“아씨! 놀래라...”
바이런이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나무에서 내려오던 뱀 머리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조심해라피! 인간은 키가 커서 위험하다피!”
“일찍도 말해준다...”
바이런이 중얼거렸다. 세이렌이 웃으며 말했다.
“바이런이 인기가 많은 거죠.”
“이런 인기 사양하고 싶어요.”
세이렌 역시 단검을 양손에 쥐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프레이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언제 그 정글 거미 같은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몰랐으니까.
“이쪽이다피.”
브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프레이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브류는 그렇게 길을 걷다가도 이상한 색의 버섯이나 풀들을 뜯어 가방에 넣었다.
“브류.”
“왜 그러냐피?”
세이렌의 부름에 브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피스칸 족은 그래도 물고기 아냐? 이렇게 해안가에서 멀어져도 돼?”
“괜찮다피. 정글은 습기가 많다피.”
“그래? 습기가 없으면?”
“비쩍 말라버린다피. 물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죽는다피.”
브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서 저기 화산에는 접근도 못 한다피.”
브류가 가리키는 방향, 열대우림 사이로 우뚝 솟은 산이 있었다.
“화산이라고? 그럼 터지기도 해?”
바이런이 놀라 물었다. 브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피. 터진 적은 없다피. 그래도 열기가 많아서 스틸리오도 피스칸도 가지 않는 곳이다피.”
프레이는 검을 휘둘러 길을 만들면서 고개를 돌렸다.
“거미는 동굴에 산다피. 너무 걱정하지 마라피.”
브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프레이가 주위를 신경 쓰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쉿... 여기서부터 조심해라피.”
브류가 목소리를 낮추자 프레이 일행은 덩달아 몸을 낮췄다.
“뭔데...?”
“곧 스틸리오의 마을이 보일 거다피.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간다피.”
프레이 일행은 브류를 따라 경사진 곳을 올랐다. 얼마간 올라가자 열대우림으로 가려져 있던 하늘이 드러났다.
“이쪽이다피.”
언덕의 끝, 절벽 쪽에 브류가 엎드려 손짓했다. 프레이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와...”
빽빽한 열대우림 가운데 스틸리오의 마을이 보였다. 마치 신이 열대우림을 한 움큼 뜯어낸 것 같았다.
늪지대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피스칸 마을과 스틸리오 마을은 늪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저놈들이...”
아주 작게 스틸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3 (97%)]
[초급 단검술 Lv8 (89%)]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5 (16%)]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